[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 훈/ 제주출신으로 제주일고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 달리 말해서 인간만의 고유한 특질을 설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다. 이를테면 생각한다든지 논다든지 하는 성질을 강조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 아는 얘기다. 이 밖에도 도구를 만드는 것을 인간의 특징으로 들기도 한다. 이 경우에 자유로운 손은 거의 절대적인 근거가 된다.

인간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손을 갖고 있다. 이 글도 손으로 쓴다. 다른 동물들에게도 손이 있다고 할지 모르나 발과 거의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유인원은 이를 잡는 데 손을 쓰지만 인간처럼 오래 서서 걸어 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도무지 인간의 손과는 같은 차원에서 얘기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이 유전적인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다 후천적으로 배우고 닦은 손재주를 후손에게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오로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손의 기능만을 반복하는 침팬지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같은 손이지만 유인원의 것은 손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손은 내 밖의 세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는 도구다. 나와 세계 사이의 매개물이다.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서 사용하는 도구들은 이 손을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구를 만드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기계를 사용하는 덕분에 우리 인간들은 생존에 필요한 시간을 절대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됐다. 얼른 보기에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술 같은 것이 그 예다.

물론 예술이 꼭 여유가 있어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의 감정이 없어지지 않는 한 예술이라고 할 만한 현상은 늘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생존을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써야 하는 사회에서 생산되는 예술의 성취는 보잘것없는 것이기가 쉽다.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조야한 실제적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감각'은 역시 '제한된' 감각일 따름이다.”

그런데 손이 노동하고 기계를 만든 결과로 이른바 물질문명의 발달에만 이바지한 것은 아니다. 손을 통해서만 인간은 동물적인 수준에서 참다운 인간으로 변화한다고 해야 맞다. 앞에서 이 글도 손으로 쓰는 것이라고 그냥 지나가면서 말하듯이 했지만 손을 거쳐야 제대로 된 생각도 나온다.

'파악(把握)'이라는 말이 있다. 잘 알다시피 ‘뭘 손에 잡아 쥔다’는 말인데 비유적으로 '확실하게 이해한다'는 뜻을 갖는다. 신기하게도, '잡는다'는 뜻을 지닌 영어 단어 'catch'나 'grasp'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보여 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생각도 손으로 붙잡아야 글쓰기가 시작된다고 하는 것은 헛말은 아니다.

이렇게 손은 현실 세계와 접촉하고 이해하게 함으로써 속 좁은 자기중심주의를 초월하도록 이끈다. 주로 손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의 참다운 의미는 바로 세상과의 소통에 있다. 노동은 나를 둘러싼 세계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이다. 특히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이 그렇다. 나와 세계가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나는 세계에 대해 문을 열게 된다. 이를테면 땅을 판다고 해 보자. 너무도 당연하게도, 이 일을 잘 하려면 땅의 성질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이렇게 내 힘이 가해져야 할 대상의 성질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내 마음을 여는 일이다. 다른 말로 하면, 땅과 내 마음이 일치된 상태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은 내 안에 숨어 있는 능력을 이 세계에 드러내 보이는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어떤 일을 해 냈을 때 느끼게 되는 보람은 바로 이러한 능력의 외화(外化)와 노동 대상과의 일치된 리듬에서 온다.

그런데 손의 유용성을 강조하다 보면 이와는 반대쪽으로 나아가는 현실과 마주치지 않을 수가 없다. 흔히 말하는 인간의 소외 현상을 손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놓고 우리는 손맛이라는 얘기를 흔히 하지만 앞으로는 과거의 말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기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더 손맛을 느끼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문명화 또는 그 문명화의 척도인 예의는 자꾸 손의 직접적인 개입을 금지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박물관 같은 곳에 들어가면 전시된 작품을 만지지 말라고 한다. 더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면, 코를 풀 때 과거에는 직접 손으로 했지만 이제는 손수건이나 휴지가 코와 손 사이에 있어야 한다. 이른바 손의 간접화라고 할 만한 현상이 현실의 거스를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손의 직접적인 개입이 줄어드는 현상은 자동차의 대중화로 발이 땅에 직접 닿는 일이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현대의 삶 자체가 발과, 생명의 터전인 땅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가로막는 방향으로 간다고 해야 옳다.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양말을 신고 사는 걸 자연 현상처럼 여기게 되었다. 심지어 전쟁마저도 과거와는 다르게, 방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무슨 단추를 누르면 되는 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인터넷에서 무슨 게임을 하듯이 말이다. 이러다 보니 실제의 인간의 목숨이 가상의 것과 구별되지 않고 따라서 아주 하찮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풀어야 할 문제는 손의 직접성을 어떻게 살릴까 하는 것이다. 특히 교육의 현장에서는 이 문제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머리로만 하는 공부가 아니라, 예컨대 손으로 직접 땅을 파 보고 무얼 심고하는 일이 온전한 인간으로 자라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손이 이 세상과 직접 소통하게 만들자.

식민지 시대에 시인 이상화는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달라면서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했다. 우리 아이들을 이런 바람에 온몸으로 호응하는 사람으로 키울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다. 그래야 이 소중한 손과 자연을 빼앗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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