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 지사가 지난 30일 오후 서귀포KAL호텔에서 열린 '2017 서귀포시 포럼'에서 기조강연을 통해 제2공항에 대해 언급했다. 내용은 “국토교통부가 내부적으로 제주 제2공항 개발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11월 발주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는 것. 반대 대책위에서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면서 단식 농성 중이다. 기본계획 수립 용역이 11월 발주된다는 원 지사의 발언은 반대 여론에 상관없이 제2공항 건설 행정 절차 밟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시민사회단체, 반대대책위가 원 지사의 발언에 발끈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반대위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우선 국토교통부의 용역 시행 계획을 제주도지사가 발표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점이다. 국토부는 올해 예산으로 제주 2공항 기본계획 수립 용역비 47억원을 잡았다. 지난해 관련 예산 통과 당시 국회에서 부대조건을 달았다. 성산읍 피해주민과 충분한 협의를 통해서 갈등해소 방안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해 주민들과의 협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국토부는 제2공항 인근 부지에 천연동굴이 있다는 주민들의 의혹 제기를 해소하기 위해 전략 환경영향평가를 수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토부도 아니고 도정 최고 책임자인 원 지사가 제2공항 기본계획 수립 용역 시기를 언급한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두 번째는 반대위와 시민단체, 국토교통부, 제주도가 27일 간담회를 하면서 국회에서 예산 통과 시 달았던 부대조건에 대해서 협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주민들이 설명했는데도 용역 발주를 논의하는 것은 주민들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원 지사의 이번 발언은 도의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예의가 아니다. 23일째 도청 앞에서 단식 농성이 이어지고 있다. 용역 발주 계획이 있다면 단식 농성을 하면서 반대하고 있는 주민들을 찾아가 양해를 구하는 게 순서다. 제2공항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면서 목숨을 건 단식 농성을 하고 있는데 용역 발주 계획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좋게 보아 준다 해도 사리에 맞지 않다. 도의적으로도 정치적으로는 악수다. 반대 대책위나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이 예상되는데 사전 조율이나 양해 없이 일방적으로 언론에 흘리는 방식은 원희룡 지사의 정치적 판단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성도 없다. 최소한의 정치적 고려도 없다. 제2공항 추진이 제주도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는 게 원 지사의 신념이라면 자신의 신념을 현실화하는 방식도 미숙하기만 하다. 3선 국회의원에 여당 사무총장까지 지냈다는 정치적 이력이 무색할 정도다. 뻔히 내다보이는 수를 읽지 못하는 하수 중의 하수다.

사정이 이런데도 원 지사 이날 기조강연에서 “제주 제2공항 개발 기본계획 수립 용역이 발주되면 제주도도 제2공항 주변지역 발전을 위한 용역을 시행할 계획”이라고 장밋빛 청사진을 이야기했다. 지역 상공인들에게 제주 발전을 위해서는 제2공항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제주 동남부권 발전을 위해 성산읍에 들어서는 제주 제2공항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도 이어갔다. 단식 농성 와중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제2공항 추진 필요성을 신념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미숙할 수 없다.

원 지사 본인이 이런 태도를 정치적 레토릭이라는 구태에서 벗어난 정면 승부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소통과 신념을 구분하지 못하는 태도다. 자신의 신념만 고집하면 하수 중의 하수다. 하수의 수는 정도에서 벗어난 꼼수다. 꼼수가 계속되면 진퇴 불가, 악수(惡手)가 되고 만다. 정치를 모르지 않을 원 지사가 이런 악수만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희룡 지사는 4년 전 호기롭게 제주로 금의환향했다. 자신의 정치 철학을 제주에서 펼쳐 보일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역의 정치인들은 구태에 젖은 동네 삼류 정치인쯤으로, 도민들은 아직 계몽이 덜 된 미숙한 시민쯤으로 보았는지 모른다. 제주 지역 언론기자들을 모아놓고 제주 언론을 보지 않는다는 말로 한 차례 설화를 빚었던 것도(물론 나중에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은 했지만) 그런 무의식 때문인지 모른다. 프로이트는 말실수가 단순히 실수가 아닌 무의식의 발로라고 설명한 바 있다. 실수가 계속되면 그것은 의도된 것이다.

원희룡 지사가 명심해야 할 게 있다. 제주도지사 출마를 머뭇거리며 눈치를 봤던 원희룡이라는 정치인이 도지사가 된 것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도민들이 판을 만들어 줬다. 도민들의 열망은 제주를 서울로 만들어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제주라는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서울과 다른 제주만의 공동체를, 제주판 3김으로 대변되는 지역의 적폐를 바꿔달라는 주문이었다. 독단과 아집 대신 도민들과 소통하는, 젊고 유능한 지도자를 원하는 도민들의 열망이었다.

그런데 정작 바뀐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이런 도민들의 열망을 지사 스스로 배신했다. 지난 총선에서 여전히 전직 지사들의 정치적 영향력에 기웃기웃하는 모습들을 도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청정과 공존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예래 휴양단지와 오라관광단지 개발에 대한 우려에는 귀를 막는, 이율배반의 행정을 보면서 실망감을 토로하는 도민들이 늘고 있다.

30%대에 머물고 있는 지사의 지지율이 그러한 방증이다. 인사실패가 계속되어도, 협치 논란으로 도의회와 ‘예산전쟁’을 벌여도 도민들은 인내했다. 하지만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 악수가 계속되면 제주인들의 기대를 받았던 스스로의 정치적 자산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영광은 한 순간이지만 몰락은 순식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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