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고경대 개인전 <이치룩 변헌 거 보염수과?>(2017.10.14-11.14, 청소년 문화까페 생느행)

양성자/ 제주4.3연구소 이사, ‘육지사는 제주사람’ 회원

1996년 가을, 길가 돌담 귀퉁이에 억새가 드믄 드문 꽃을 피울 때 제주 문예회관에서 ‘고영일 사진 전시회’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한창 육아에 전념할 때라 자연을 느긋이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을까. 그 당시 나는 제주의 사계절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을 때라 아쉬울 것도 없었다. 사진 속의 풍광은 내 삶의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고 나는 그 속에 있었으므로. 사진에 무지하기도 했다. 사진이 주는 기록적 가치를 일찍 알았다면 4.3 증언채록을 다닐 때(1980년대) 그 분들의 표정을 낱낱이 담아두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림이 주는 압도적 인상에 깊이 빠져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걸개그림의 문을 연 최병수의 판화 <한열이를 살려내라>에서 받은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판화가 최병수는 신문에서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진을 보고 작업을 하였다고 했다. 사진이 사실의 기록이라면 ‘사실보다 더한 사실’이 주는 압도감은 판화가 예술의 훌륭한 장르임을 실감케 했다. 동시에 사진은 예술이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러저러 20년이 지났다. 그 시간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거치며 이념으로 무장된(?) 나의 가치관으로 사회전반을 아우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그저 나의 가치관일 뿐이며 다른 이들은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그 시간은 내가 제주를 떠나 유목민처럼 살아가면서 힘든 고비마다 나를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받쳐주는 고향, 제주도에 대한 애정이 더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고경대 개인전을 보는 나의 눈은 이제 작가 고영일의 마음을 따라가고 있었다. 사진은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그 속내를 절절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담을 수 있는 풍경이었다. 1960-70년대의 제주를 표현한 어떤 글이나 그림보다 더 진솔하게 그 시대를 보여주며 나에게 상상력 공간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었다. 내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들 고경대가 카메라에 담은 풍광들도 아버지의 제주에 대한 깊은 애정을 확인하는 순간들이었을 것이라.

미디어가 범람하는 오늘, 이런 흑백의 사진이 주는 감동은 사진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웅변하고 있다. 글과 그림은 마음의 프리즘을 통과하여 진실을 전해준다. 사진은 그냥 보여준다. 보는 사람의 영역이 큰 예술장르라는 것도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혹자는 1960년대 한국 사회상황에 대한 서민의 일상에 대한 이해는 박수근의 그림이 메꾸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에 여자는 부지런히 일하고 남자는 거의 놀고 있었다. 남자들에게 뚜렷한 일거리가 없던 서울의 변두리 삶을 담담히 담아낸 박수근의 그림들. 제주에서 그 역할을 한 것은 사진인 것 같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버지가 담은 풍경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것은 한 개인으로서는 자신의 개성을 눌러야하는 작업일 것이다. 사물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과장하고픈 인간의 욕구를 이겨야만 가능한 작업이리라.

전시를 보면서 안도한 것은 제주의 자연은 아직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발과 관광산업으로 다소 일그러졌지만 아직 제주는 압도적인 자연의 힘으로 거기에 버티고 있었다. 아들 고경대는 사진에 별 관심이 없을 때 아버지께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어떵 아버지 사진에는 자연풍광만 있곡 사람 사는 모습은 어수과?

- 잘 봐 보라게. 오름만 찍은 거 닮아도 잘 보믄 척박한 중산간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제주사람의 흔적이 보일 꺼라

- 흔적만 이신게 무슨

이제는 운항이 중단되었지만 타향에서 20년을 산 우리가족은 몇 년 간 카페리호를 이용한 귀향길에 재미를 붙였었다. 서울에서 하루를 잡아서 자가용으로 맛집을 들르며 장흥까지 가서 오렌지1호를 타고 2시간 남짓 항해하면 성산포 항에 도착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산 일출봉의 장엄함에 압도되어 거친 숨을 내쉬며 따뜻한 전복죽이나 고등어조림을 먹었다. 그때 보여준 제주의 자연은 공항에서 내리는 것과 퍽 달랐다. 그때 갓 대학생이던 둘째는‘내가 제주를 고향으로 갖고 있다는 것이 재산 1호’라는 말을 했다. 우리에게 제주는 그런 곳이다. 자연 위에 문명을 구축하는 도시가 아닌, 자연속의 한 풍경으로 인간이 자리하는 곳.‘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어떤 이정표가 되는 곳.

작가 고영일이 담은 곳을 고경대가 따라간 애월읍 상가리의 마을목인 듯한 팽나무나 조천읍 북촌리의 나무도 40년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구좌읍 김녕리의 언덕배기에 바람에 쓸려가는 여덟 그루의 나무는 4-50년의 비바람 속에서 더 낮은 키로 구부린 두 그루만 남았다. 그 노구의 모습이 허리가 꺾인 제주의 어르신들을 생각나게 했다. 지나가는 어린 길손에게도 존댓말을 쓰시는 제주의 할머니들.‘살암시민 살아진다’며 자연과 인간의 폭풍이 지나가는 길까지 내어 준 모습 같아 경건하면서도 한편 심란하였다. 그림을 보는 동안 내 허리도 시큼거렸던 것이다. 저 나무처럼 더 낮춰야 할 것만 같아서.

작가 고경대의 말을 빌면 ‘자본주의가 덜 들어간 곳’은 보전이 잘 되어 있더라고 했다. 매우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적극적으로 제주자연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개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리라.

제2공항을 부지 설정의 절차상 문제점으로 접근하는 한 미래의 제주의 모습은 지금 40년의 변한 모습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몇 년 전 바이칼호수를 보려고 이루쿠츠공항을 통과한 적이 있다. 그 좁고 소박하고 불편했던(?) 공항을 겸손하게 통과하고 이차대전에 썼던 40년대 소련제 지프차를 거칠게 쿵광거리며(비포장도로이므로) 한 시간 정도 달려야 바이칼호수를 볼 수 있었다. 바이칼을 보기위해서 그 정도의 여정은 모두가 감수하는 일이다. 제주가 포용할 수 있는 이상의 관광객 수요는 자연의 훼손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심성도 변화시킬 것이다. 고경대 사진전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이치룩 변헌 거 보염수과’에 숨긴 말은 ‘ 게난, 어느 만이 변헐 거 담수과?’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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