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영 시인으로부터 4.3시 "4월의 어느 제삿 날" 한편을 보내 왔는데 신선해서 소개한다.

4월의 어느 제삿 날

노루 눈매 닮아서 백록담이겠지

그 푸른 눈물에는 제주인의

피와 살점이 고여 있고

세월에 썩어버린 설움이 갇혀 있다

어느 해 4월

하늘을 향하던 들풀을

칼 빛 바람에 소리없이 휘둘려져

총알이 춤을 추고 넋들도 함께 가니

어느게 몸이며 머리는 어디 있나

세월의 흐름 속에

얽히고 설킨 사연은 너와 내가

하나가 됨을 휘젓고

길 잃어 방황하는 영혼들은

숨 쉴 터를 찾고 있는데

우리네 산 자들은 '나'만 찾는

수치를 껴안고 있구나

한잔 술로도 풀 수 없는

어둠의 매듭은

부서진 조각배 휘감아 

어제의 발목을 잡고

죽은 역사처럼

오늘도 밤이 내리는 섬에

외로이 서있는 흔들리는 촛불 하나.

 

노루 눈매 닮아서/백록담이겠지/ 그 푸른 눈물에는 제주인의/ 피와 살점이 고여 있고/ 세월에 썩어버린 설움이 갇혀 있다/

제주만이 아니고 한국 최고 높은 산, 한라산 백록담에 4.3의 모든 희생자의 혼이 갇혀 있다.

제일 높은 곳에서 제주도를 조감도처럼 두루 살피면서 자신들 생애까지 객관화 시켜서 냉정하게 관조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어느 해 4월/ 하늘을 향하던 들풀을/ 칼 빛 바람에 소리없이 휘둘러져/ 총알이 춤을 추고 넋들도 함께 가니/ 어느게 몸이고 머리는 어디 있나/

4월의 봄은 모든 새싹이 돋아나고 희망을 향하는데 모질게 잘라지고 만다. 

세월의 흐름 속에/ 얼키고 설킨 사연은 너와 나가/ 하나가 되는 것을 휘젓고/ 길 잃어 방황하는 영혼들은/ 숨쉴 터를 찾고 있는데/ 우리네 산 자들은 '나'만 찾는/ 수치를 껴안고 있구나/   

그치지 않는 흑백 논쟁은 결국 희생자의 영혼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자신만을 위한 손익계산서에 불과했다.

어둠의 매듭은/ 부서진 조각배 휘감아/ 어제의 발목을 잡고/ 죽은 역사처럼/ 오늘도 밤이 내리는 섬에/ 외로이 서있는 흔들리는 촛불 하나./

서로를 위한 치유 속에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얼키고 설킨 과거의 매듭 속에서 나만이 희생자라고 서로 발목을 잡아 끌어내기에 힘을 쓰고 있으니 영혼의 촛불도 흔들릴 수 밖에 더 있을까. 

<부서진 조각배 휘감아>의 의미를 잘 몰라서 문의했더니 피해자와 가해자 전부를 의미한다고 했다.    

많은 4.3시를 읽었는데 상투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무자년 운운"이라든가 어떤 시는 문맥이 전혀 맞지 않는데 갑자기 "무명천 할머니"가 나오기도 한다.  

때에 따라서는 4.3의 관용구가 되버린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지만 스스로의 언어 표현에 대한 안일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인상을 주어서 독자들은 식상하기 쉽다.

"4월의 어느 제삿 날"에는 이러한 상투성을 배제한 독창적인 시어(詩語)들이 번뜩이고 있고 4.3을 바로 직시하고 있다. 

다음은 필자의 이야기이다. 지난 2월 백세 넘으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동안 일본에서 고향 제주 삼양에 홀로 사시는 어머니 집에 가면 무척 포근하고 아늑하다.

어머니와의 따뜻한 수 많은 얘기는 모든 사람들도 갖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태어난 "고향집"에 대한 이야기는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쓴 것이 졸시 "갈 수 없는 집"이다.  

갈 수 없는 집

사십여년 일본살이 속에

일년에 한두번 찾아가는 제주 고향집은

어머님이 살고 계셔서 우리집이다

 

백세 넘으신 어머님 홀로 사시다가

돌아가신 후, 큰 아들의 큰 아들이

고향집을 대물림했다

 

서울태생, 서울살이 대물림 손자는

나이 오십 넘도록 고향집 방문은

가뭄에 콩 나듯이었다

깃든 정 없는 손자는 고향집을

낯선 사람에게 빌려 주었다

 

고향 가도 우리집이라던

고향집에 이제는 갈 수 없는 집이 되버렸다

고향 가서 망설이다 형제집에 짐 내리면

친절한 주위는 고향집 보러 가자고

차를 몰고 간다

고맙지만 딱부러지게 사양했다

우리집을 남의집처럼 기웃거리는

우리 모습에 고향집이

옛 식구 그리워 너무 그리워 손짓해도

갈 수 없는 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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