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그런데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서 9월 1일부터 입원 예약도 했는데 다음 기회 때 하기로 하지."

지난 8월 민단에서 광복절 기념식을 마치고 강재언 박사님께 전화로 사모님과 함께 식사 초대를 했을 때의 대답이었다.

"네. 잘 알았습니다. 병원에 입원 하신다니 어느 병원에 입원하십니까? 병 문안 가겠습니다." "오지 않아도 괜찮아. 검사 입원 정도이니까. 그 대신 퇴원해서 한잔 하기로 하지."

구십 넘은 노인의 몸이니까 여기저기 검사도 해야 한다면서 일부러 병 문안까지 올 필요없다면서 극구 사양하셨다.

약 한달이 지난 9월 27일, 강 박사님 사모님의 전화를 받고 다음 날 저녁 오사카 사카이시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신 강 박사님 문병을 갔다.

"아니, 어떻게 알고 왔지?" 반갑게 맞아주시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모님을 쳐다보셨다. "제가 연락했습니다." 사모님이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는 사람들은 모두 바쁜데 번거로워서  귀찮고 나도 맞는라고 피곤해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 약간 짜증스러운 핀잔이어서 사모님이 안타까웠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며칠 못 넘길테이니 부르고 싶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연락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에 사모님은 여기저기 연락을 했었다.

필자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갑작스럽게 찾아간 병 문안에 강 박사님 자신께서도 잘 아셔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고 퇴원해서 한잔 하자는 겉돌기 인사로 마쳤다.

이렇게 헤어진 것이 강 박사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필자는 11월 19일부터 21일까지 민단 오사카본부주최 서울 연수에 참가했었는데 11월 19일 심부전으로 돌아가셨다.

장례식은 21일 나가이공원에 있는 장례식장에서 직계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만 모인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르었는데 신재경 교수의 권유로 필자의 마누라가 참석했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장례식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님을 모시거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 의식과 만발한 꽃들이 제단 가득한 장식도 전혀 없는 장레식이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아늑함과 엄숙함이 감돌고 있었으며, 또 하나 깜짝 놀란 것은 박사님께서 좋아 하셨던 고시지 후부키 샹송 가수의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고시지 후부키 샹송 가수는 1924년에 태어나서 1980년에 타계한 일본을 대표하는 샹송 여성 가수로서 아직도 그녀의 노래 "사랑의 찬가" "연심:戀心" 등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1926년에 태어나신 강 박사님이 동연대의 그녀의 노래를 장례식장에 흐르게 할 것과 영정 사진과 돌하루방 앞에 앉아서 찍은 사진도 제단 곁에 둘 것 등의 아주 간소한 장례 절차도 유언을 남겨셨다고 했다.  

21일 서울 연수를 마치고 밤 9시 넘어서 돌아온 필자에게 마누라는 오늘 참석한 장레식의 그 감동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그리고 박사님의 저서와 즐겨 읽던 책들도 장례식장에 비치되어서 마음에 드는 책을 갖고 가십시오라는 안내 말씀도 있어서 몇권 자기도 갖고 왔다면서 보여주었다.

향년 만 91세로 타계하신 강 박사님은 제주 삼양에서 태어나셨다. 필자도 삼양에서 태어나서 같은 동향이니까 일본에서 처음 뵈웠지만 가깝게 지냈다.

앞에 문장에서는 박사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지만 필자는 언제나 우리 말로 어디에서도 "삼촌님"이라고 불렀다.

필자의 외할머니도 같은 강씨여서 촌수를 따지면 그럴는지 몰라도 그 이전에 제주 특유의 "동네 삼촌"이라는 의미에서 필자는 그렇게 불렀었다.

약 20여년 전 "역사의 접점을 걷는 모임"이 있었다. 강재언 박사님을 중심으로 양영후 선생님, 필자들과 한달에 한번 한.일역사에 유래가 있는 곳을 탐방하는 모임이고 기획이었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거의 돌아다니면서 탐방을 했다. 이 때에 필자는 신재경 교수도 소개를 해서 같이 다니게 되었고, 후에는 그가 이 모임을 담당했으며 <오사카 제주문화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탐방지 가까운 곳까지 열차로 가서 목적지까지 걸어서 가는데 설명은 거의 강재언 박사님이 맡으셨다. 같이 나누어 먹는 점심도 그렇거니와 마치고 오사카에 와서 뒤풀이가 더 좋았다.

이 모임이 해산 후에는 강재언 삼촌과는 자주 못 뵈웠지만 일년에 몇 차례 만날 때마다 그 중에 한번은 꼭 같이 참가하는 멤버가 있었다.

강재언 삼촌님의 정말 조카이며 오사카에 살고 계시는 장정길 선배님인데 어머님은 제주 고분양태 장인으로 인간문화재이셨던 강경생 할머니는 강재언 삼촌과는 사촌간이었다.

그리고 지난 5월에 돌아가신 양영후 선생님, 신재경 교수, 강재언 삼촌 부부, 장정길 선배님, 필자였는데 양영후 선생님이나 신재경 교수는 종종 빠질 때도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공식적인 모임이 아니면 강재언 삼촌은 학자의 "학"티도 내지 않고 니이 많으신 할아버지와 같이 덤덤하고 동심으로 돌아가서 모든 대화는 간단하고 단순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위의 멤버들과 만나서 식사를 하거나 식사를 마치고 정해진 코스 노래방 라운지에 갔을 때도 동심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이 분위기를  강재언 삼촌께서는 무척 좋아 했었다. 서울 연수로 인해서 필자는 장례식은 참석 못했지만 이렇게 학자로서의 격식(?)을 버리고 삼촌다운 장례식을 치뤘다고 느꼈다.

"90인생 후회 없었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사모님 타케나카 에미코 여사께 남기고 가셨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시드라는 마누라의 말에 필자는 몇번이나 수긍했다.

훤출한 키에 곳곳한 자세는 마치 이미지로 그려보는 영국 신사 모습 그대로였다. 팔순을 훨씬 넘어서 지팡이를 짚고 다닐 때도 그 모습은 변함이 없으셨다.

언제나 나란히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두 분의 뒷 모습은 포근함과 정겨움을 주위에 안겨주는 한폭의 따듯한 그림이었다. 앞으로 그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서글프다.

가끔 필자가 제주투데이에  쓴 기사를 펙스로 보내면, 이렇게 한국어로 일본을 직시해서 쓰는 사람은 길호 밖에 없으니까 계속 좋은 글을 써서 고국에 알리라고 그때마다 격려해 주셨다.  

제주가 낳은 석학 강재언 박사는 쿄토대학에서 문학박사를 받았으며, 재일동포사회의 최고 원로 교수 학자이셨고 한.일양국을 대표하는 조선 근대사의 권위자이시며 하나조노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하셨다.

한.일양국의 지자체가 공동 신청한 <조선통신사>가 금년 유네스코 <세계의 기록>에 등재된 역할에도 많은 공헌을 한 것을 돌이켜볼 때 감개 또한 깊지 않을 수 없다.

조선근대사, 사상사 전공으로 저서로는 <강재언 저작선 5권> <조선근대사상연구> <근대조선의 변혁사상> <조선의 개화사상> 등의 있고 역서로는 <조선세시기> <해유록-조선통신사의 일본기행> <조선유교의 2천년>  등이 있다.

1991년 제1회 한국KBS <제1회 해외동포상> 2006년에는 <목단장> 훈장을 받았다.가족으로서는 부인 타케나카 에미코 여사와 장남 타케나카 히토시 와세다대학 교수가 있다.

부인 타테나카 에미코 여사는 오사카시립대학교 경제학부장을 역임하고 하나조노, 류코쿠대학 교수, 오사카부립여성종합센터(동센터)관장을 지냈고 저서로는 <타케나카 에미코저작선 전7권> 등이 있다.

제주투데이에 게재했던 강재언 박사의 기사와 타케나카 에미코 여사의 기사를 참고로 첨부한다.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81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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