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박철홍(朴哲弘)/ 영남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사범대학장과 교육대학원장, 한국도덕교육학회 회장 역임, '스무살의 인문학'등 20여 편의 공저와 역서가 있음

한동안 수학능력고사의 평가 방식과 관련하여 지금의 상대평가 방식에서 절대평가방식으로 변경하는 문제를 두고 정치계와 교육계에서 심각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한 인간상을 기르기 위해서는 상대평가냐 절대평가냐 하는 평가방식보다도 오지선다형이라는 선택형 객관식 평가 문제의 유형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며 근본적인 관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학능력고사에 나오는 문항의 성격과 유형이 곧 학교 공부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수능과 관련된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앞으로 제주 교육, 나아가 우리나라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먼저 공부를 ‘정답을 얻기 위한 공부’와 ‘질문을 하기 위한 공부’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후자 즉 ‘질문을 하기 위한 공부’가 공부의 본질적인 모습이며 앞으로 도래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지향해야 할 교육의 방향이라는 점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유태인의 지혜의 보고라는 「탈무드」에는 큰 길을 달려 가면서 “나는 답을 알고 있다. 누가 질문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말을 반복하며 외치는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실제로 이런 사람을 마주치게 되면, 십중팔구 사람들은 그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거나 사람들을 웃기려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질문과 답 사이 관계를 두고 말하면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질문이 먼저 있고 거기에 대한 답이 있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담고 있는 우화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편견이나 잘못을 우화의 형식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러한 생각이나 관점이 모순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우화가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에 주는 시사는 무엇일까요? 교육학자로서 저는 이 우화를 읽는 순간 우리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공부의 일반적인 모습과 고사장으로 들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 우화와 관련해서 보면 수학능력고사장을 향하여 달려가는 학생들이나 다양한 공채시험이니 자격고사를 치르러 고사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저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어떤 시험 문제가 나옵니까?” 하는 태도로 고사장에 들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일반화해서 말하면, 수능을 비롯한 각종 고사장을 향하여 질주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답은 있는데 정작 진지하게 탐구하는 질문은 없다는 점에서 바로 󰡔탈무드󰡕에 나오는 그 사나이의 외침과 유사한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학능력고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채용고사나 자격시험의 전형적인 모습은 4가지든 5가지든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정답을 고르게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시험에 대비하는 공부는 시험에 나올 만한 내용들을 기억하는 암기식 공부가 주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의 공부는 시험에 답할 수 있을 만큼만 아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공부에서도 수업 중에 교사와 학생 사이에 질문이 오고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교사가 하는 질문은 학습한 내용을 제대로 암기하기 위한 질문이 주를 이루며, 학생들이 하는 질문도 학습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데에 한정되게 됩니다. 이때의 질문은 학습내용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토론함으로써 학습자 자신의 관점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학습내용에 대하여 학습자 자신의 생각을 갖는 것은 오히려 시험에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부는 한마디로 ‘정답을 얻기 위한 공부’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부에는 두 가지 점이 가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문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알고 있어야 할 ‘정답’, 강조하여 말하면 ‘획일적인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서,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완전히 알거나 전혀 모르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정답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그 문항에 주어진 배점 전부 즉 만점을 주며, 다른 답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간주하여 0점을 줍니다. 그러한 교육은 교과서에 있는 단편적 지식을 있는 그대로 암기하는 공부와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주입시키는 교육을 공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생각하게 만들며, 나아가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절대적인 진리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과연 이러한 공부의 관행과 그러한 공부를 지탱하는 생각들이 공부에 대한 전형적인 생각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앞에 언급한 「탈무드」에 나오는 사나이가 지적하려고 한 것이 ‘정답을 얻기 위한 공부’라면, 그 우화에 함의되어 있는 대안적인 공부의 방법은 ‘질문하기 위한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작 그 사나이가 외치고 싶었던 것은 그가 길을 달리며 외치는 것과는 정반대의 말, 즉 ‘나는 질문을 가지고 있다. 누가 답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었던 공부하는 태도는 이 말에 함의되어 있는 공부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면상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제가 공부하면서 체험한 바에 비추어 보거나, 문헌을 통해서 전해지는 소크라테스나 공자의 말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무지의 지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 인간 삶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무지함을 깨닫도록 하는 일에 평생을 헌신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대화편을 읽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만,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하여 대화 상대방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일 뿐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깨우쳐주고 나서 제대로 된 앎을 찾기 위한 대화를 시작합니다. 또한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주의 깊게 읽으신 분이라면 잘 알고 있으실 것입니다만, 대화는 언제나 답을 찾는 도중에 끝이 나고 맙니다. 즉 질문은 있지만 완전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대화가 끝이 납니다. 이런 상태는 바로 “나는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답을 알고 있습니까?”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공자의 말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논어에 의하면 공자는 “인간의 앎은 항상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함께 섞여 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 알고 있으며 어디서부터는 모르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라. 그럴 경우에야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앎은 항상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하여 곧바로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간단히 생각해도, 예를 들면 건국의 연대나 사람의 이름이나 나이와 같은 단편적 사실에는 정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단히 사실을 확인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조금이라도 사고를 요하는 것, 예를 들면 ‘내가 누구인가? 또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가?’와 같은 문제만 해도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흔히 말하듯이 평생을 같이 산 배우자나 십수 년을 사귀어 온 친구도 알다가도 모를 구석이 있는 법입니다. 하물며 현재 한국사회가 당면한 정치적 문제, 한국사회의 지역간 계층간 갈등을 해소하는 문제, 또는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는 문제, 지진과 같은 재해의 원인이나 해결책, 심지어 수학능력고사의 방법 등등에 대한 답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나아가 진정한 정의, 자유, 평등, 사랑 등등에 대한 문제 역시 아무리 탐구해도 완전한 답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언제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섞여 있을 뿐입니다.

사실 공부를 뜻하는 한자어 학문(學問)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학문은 ‘배운다’는 뜻을 가진 學과 ‘묻다’라는 뜻을 가진 問의 합성어이다. 學問이라는 말의 뜻은 몇 가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오늘의 논의와 관련하여 보면 공부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통합된 상태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學과 問이 함께 있는 學問이라는 단어는 學에서 출발하여 問으로 끝나야 하며 學과 問이 함께 뒤섞여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學을 ‘배우다’는 동사로 보며, 問을 ‘질문’이라는 명사이면서 學이라는 단어의 목적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學問은 ‘질문을 배우는 것’이 됩니다.

‘정답을 위한 공부’에 몰두하는 한국교육을 보면서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습은 한쪽 발을 침대위에 올려 놓은 채, 한손에는 톱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침대위에 눕혀 있는 어린 아이를 움켜주고 있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캐리커처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 교외에 있는 캐피소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옆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쇠 침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모든 사람의 키가 쇠 침대의 길이와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리를 지나가는 행인들을 집으로 잡아와서 쇠 침대에 눕히고 키가 침대보다 크면 다리를 잘라 죽이고, 침대보다 짧으면 늘여 죽였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은 ‘프로쿠르스테스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특징을 규정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유롭게 사고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일정한 길이를 가진 쇠 침대라는 정해진 잣대에 모든 사람의 키를 맞추겠다는 것과 같이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생각을 갖도록 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고의 발달을 저해하는 행위이며 그런 점에서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소년기는 정신적인 면에서 보면 제2의 탄생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하여 진지하게 질문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하여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고 남은 인생을 살아갈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기입니다. 이처럼 자유로운 사고를 통하여 세상을 자유롭게 탐색해야 할 청소년들에게 시험에 나오는 정답을 암기시키는 교육은 청소년들의 영혼의 건전한 발달을 저해하는 일이며, 심하게 말하면 영혼의 말살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4차 산업혁명이 몰고 올 앞으로의 삶을 진단하면서 캐빈 켈리(Kevin Kelly)는 “기계〔또는 인공지능체〕는 답을 하기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질문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은 빅데이터를 내장하고 있는 컴퓨터에 비해 보잘것없는 정보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해결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의 면에서 보거나 탐구된 답의 질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인공지능보다 현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보다 중요하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에 의미있는 질문들을 찾아내는 것이며, 이 질문에 대하여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인공지능이 찾아낸 대답들을 다시 삶과 관련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검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시대의 교육적 과제는 현재 잘못된 교육 즉 ‘정답을 얻기 위한 교육’에서 하루 빨리 탈피해서 ‘질문하기 위한 공부’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수학능력고사의 평가방법을 절대평가로 바꾸는 정도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지식을 보는 근본적인 관점이 변화를 포함하여 교육 실제를 완전히 재구성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제주 교육이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교육적 방향과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교사교육과 실험학교의 운영에 앞장서고 나아가 이러한 교육이 전체 학교에 정착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교육 개혁의 선봉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제주도가 자연 경관의 관광지를 넘어서서 대한민국 교육개혁의 수도이면서 교육관광의 중심지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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