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성자/ 제주4.3연구소 이사, ‘육지사는 제주사람’ 회원

오랜만에 장례미사에서 성가대의 일원이 되어 진혼곡을 불렀다. 요즘 나는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이루는 느낌이다. 나의 미욱한 노래가 죽은 이를 위로할 수 있다니. 노래에 대한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간다.

카톨릭 장례미사를 처음 접한 것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의 첫 장면에서다. 유리 안드레아비치 지바고가 어릴 때, 아버지 장례식을 참관하는 장면으로 그 소설은 시작되었다. 오늘처럼 추운 날에 ‘고이 잠드소서’라는 진혼곡에 조객들이 발맞추고, 관이 조금씩 움직이며 진행되었다. '아이고' 곡소리가 아닌 나직한 성가를 부르는 검은 옷의 행렬들. 신부님이 땅에 입맞춤하며 고인을 보내는 그 장례 풍경은 제주도 전재민부락이 즐비한 남문통에 사는 한 소녀의 마음에 숭고한 제의의식, 문화충격을 일으켰고, 나는 기가 죽었다. 상위문화에 정복당하는 느낌이랄까. 카톨릭 제의는 내게 형식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 주었다. 노래를 부르면 저 영혼이 지상의 고단함을 털어내고 안식을 누리게 될 것 같아 내 마음도 정화된다.

내가 사는 곳의 장례문화는 어떠했나. 길가다 벼락맞아 죽은 시체위에 덮인 가마니짚, 그 끝으로 삐져나온 피묻은 맨발이 내가 처음 본 죽음이다. 동네 어른이 지게에 져서 송장처리를 했던 것 같다. 병문내창으로 떠내려오던 시신, 빌리호 태풍에 비바람에 휩쓸려 돌아가신 둑에 살던 ‘풍년이 아버지’도 기억난다.

아마 증조할머니 쯤 되는 장례식이었나 보다. 제주시 오라리에 있는 민오름 자락에 일가친척이 모여들었다. 그때 남자어른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지금 생각하면 으젓한 남자어른이 귀했던 것도 4.3항쟁의 휴유증이었다. 친척 할머니가 ‘동네에서 상여 맬 청년 다 없어지는구나' 통곡했다는 길고 긴 4.3 검속들.

여자어른들은 너나없이 앞에 작은 대바구니('떡구덕'이라 부르는)를 놓고 여기저기서 부조로 들어오는 상애떡(집에서 만든 밀가루빵)을 담아 구덕이 차올랐다. 여름이었나, 여자어른들은 모두 머리에 흰 광목수건을 쓰고 나무그늘 밑으로 도열해 있었다. 나는 여기저기 상애떡을 나르고 있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증조할머니의 죽음은 많은 조문객들에게 돼지고기국과 팥밥을 맛보게 했을 것이다. 그때의 장례풍경을 아름답게 떠올리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내 가슴에 새겨진 또 다른 장례는 친정어머니가 치른 외할머니 장례다. 제주4.3항쟁은 항쟁의 정신을 뒤덮은 가혹한 탄압과 학살로 많은 사람들이 ‘4.3사건’ 이라고 말한다. 이념의 싸움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무자년 겨울, 외가식구들은 열두 살 막내인 어머니만 남기고 학살되었다. 이웃 밭에 가매장한 시신을 어머니는 제대로 수습하고 싶었다고 한다. 몇 년 후 한라산에서 벌채한, 칠성판으로 쓸 무거운 나무판을 지고 끌며 목공소에 가서 할머니 관을 만들었다. 나무에 일곱 개의 구멍을 뚫을 수 없으니, 숯으로 북두칠성의 위치를 그려 넣고 관을 갖춰 민오름에 묻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 했다. 이승의 삶을 마쳤으니 원래 고향인 북두칠성 안으로 돌아가시라는 칠성판. 고흐의 말처럼 ‘우리는 여행을 위해 역으로 가듯 별을 향해 죽음의 정거장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장례풍습이 바뀌면 문화가 바뀌는 것이라고 한다. 이제는 장례문화도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지금 오름자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무덤자리들은 제주인들의 사후 세계관으로 장례문화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구슬프고 유장한 상두가를 들으며 고인에 대한 회한이나 자기 설움에 겨워 눈물을 훔치며, 아이고 곡소리로 상여를 따라가는 풍속은 15년 전 친할머니의 장례식이 마지막이지 싶다. 모두 죽음을 두렵지 않게 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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