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제주4.3 진실규명을 위한 도민연대를 만들겠다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를 필두로 한 준비위원회가 그 얼굴을 드러냈다. 이들은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이 편향적이라고 주장할 예정이다. ‘박근혜 탄핵 촛불정국’ 당시 ‘탄핵 반대’를 외치며 집회를 열었던 그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가 앞장서는 모양새다.

전쟁 직후 공포에 시달리며 절대악을 상정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저들의 세대가 가련하다. 국정원이 조장하는 간첩놀이가 오래도록 이어졌으니 명민한 이들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데 대한 면죄부를 얻는 것은 아니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보수를 결집시키는 데 꽤 효과적인 흑마술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수인번호 503번)은 박정희 신화를 끝장냈다. 반공•안보 이데올로기의 입지도 줄어들었다. 촛불혁명 당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국민들을 그런 흑마술로 기만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준비위원회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그 고루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반성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들이 역사를 주제로 세계를 향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평면적이다. 반공인가 아닌가. 그것은 절개보다는 역사 인식에 대한 공부 부족 탓으로 보인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사고를 게으르게 만든다. 명령만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이들에게 주입한 명령은 단순하다. 제주4.3을 폭동이라고 규정토록 하는 것. 결국 그것일 뿐이다.

제주4.3에 대한 규정을 둘러싼 논란은 비단 최근의 일 아니다. 제주4.3‘사건’이라고 축소해 불리던 비극적 역사가 '제주4.3'이라 불리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쓰이고 있는 ‘제주4.3’ 역시 그 의미가 불분명해 이 역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두고 학계와 관련 단체와 시민 들은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제주4.3을 학살로 정의하기도 한다. 역사적 사실의 규모를 통해 역사를 정의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민 10분의 1이 죽어나간 제주4.3을 학살이라고 부르는 데 아무런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책임 규명에 있어 다른 정의들보다 유리하다는 의견들이 있다.

제주4.3을 학살로 보는 대표적인 학자는 미국 시카고대학교 석좌교수 브루스 커밍스다. 그는 2017년 6월 9일 제2회 제주4.3평화상 시상식에서 제주4.3을 “미군정의 통제 하에 자행된 학살”로 규정하며 “미국인으로서 많은 죄책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그는 “누가 소요사태를 일으켰고 봉기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며 “진압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에 초점을 뒀다.

그리고 제주4.3에 바른 이름(正名)을 부여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제주4.3을 ‘제주4.3항쟁’으로 부르자는 것이다. 이는 제주도민을 역사를 이끌어가는 능동적 주체로 바라보겠다는 뜻이다. 제주도민을 중심에 두고 역사를 살피며, 제주도민이 주도하는 미래-역사의 문을 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역사의 주체에 대한 고민으로 이데올로기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시민사회는 '항쟁'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한편, 제주4.3 진실규명을 위한 도민연대 준비위원회는 반공 이데올로기 및 국가주의적 관점을 고수한다. 제주4.3을 남로당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 익숙한 ‘빨갱이 타령’으로 ‘빨갱이’들이 국가 전복을 목적으로 벌인 일이 제주4.3이라는 주장의 연속이다.

어느 이데올로기 쪽이냐를 따지는 사상검증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대상으로 한 사상검증이 아직 이렇게 진행중이다. 본인들의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 이데올로기 광풍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이들을 불러내 한 번 더 죽이려는 저 주술이 공포스럽다. 역사적 이단에서 서둘러 빠져나오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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