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실시간뉴스
편집시간  2018.10.16 화 18:39
상단여백
HOME 칼럼 제주담론
[이 훈] 걸으면 좋은 것들이 훈/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
제주투데이 | 승인 2018.02.06 09:31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 훈/ 제주출신으로 제주일고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천천히 걸어, 희망으로'(쿠르트 파이페, 송소민 옮김, 서해문집, 2010)를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얘기를 들으면서 함께 걸은 듯한 기분이 들어서 행복했습니다. 인상 깊은 내용을 소개하면서 걸으면 어떤 것이 좋은지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66세의 대장암 말기 환자가 수술을 받은 지 3주 만에 인공항문 기구를 갖고 독일 최북단 지방에서 이탈리아 로마까지 166일 동안,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숙소를 잡지 않고 텐트에서 자며 3,350킬로미터(길을 잃어서 우회한 것은 포함하지 않은 거리,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64킬로미터는 버스와 기차를 탔"음)를 걸은 기록입니다. 성치 않은 몸으로 "포기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웠던 모든 순간들, 체력의 쇠약, 육체의 통증, 길을 잘못 들어선 일, 낙상한 일"을 다 견뎌 낸 것입니다. 이 대기록은 저런 어려운 몸의 상태에다 여려운 경제 사정을 견뎌 내고 이룬 것이어서 더욱 뜻이 깊습니다. 아내는 그의 도보 여행을 충분히 이해하고 지지하기까지 하지만 돈을 많이 쓴다고 걱정하고, 여행하는 동안에 은행 계좌가 텅 비어 전에 일하던 회사 사장에게 돈을 빌려야 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 승리의 기록이라고 해야 할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지만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환대의 문화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 사람 사이의 이런 따뜻한 정이 없었다면 목표를 이루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설사 로마까지 갔다고 해도 그 감동은 지금보다 많이 줄어들었겠지요. 사람들은 여행자에게 따뜻한 손을 내밉니다. 처음에 그는 이 호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며칠 동안 동행하게 된 부부가 어느 집 주인의 허락을 받아 그 집 울타리 안에 텐트를 칩니다. 호기심덩어리인 그 집의 아이들 다섯이 모여듭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그들이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자 아이들의 엄마는 이 부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합니다. 그런데 보답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맙니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에도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나는 점차 생각을 바꾸었다. 여행을 하면서 내게 뭔가 주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거절하는 행동은 상대방의 주는 기쁨을 망가뜨린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좀 더 일이 쉬웠으리라. 하지만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늦어도 하는 게 백배는 낫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도 바로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정류장에서 스쿨버스를 타고 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부인을 만났는데 말을 나누다 그녀는 즉석에서 그를 점심 식사에 초대합니다. "나는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고, 피곤하기까지 했"는데 "그녀가 성가실까봐 그리고 내가 보답할 게 없었기 때문에 초대를 거절하"고 맙니다.

“나는 그때껏 누가 나에게 뭔가를 주면 나도 반드시 뭔가를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주고받는 교환은 물질만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혹시 그 부인은 단순히 내 여행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외롭다고 느꼈을까? 어쩌면 나에게 조금 친절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어쩌면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들에게 걸어서 이탈리아까지 가겠다는 정신 나간 노인네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저 마음의 충동에 따랐을 수도 있다. 뭔가 주고 싶은 충동.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러고 싶어서 한 친절인데 내가 그걸 망가뜨린 것이다. 아들이 버스에서 뛰어내리자, 내게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는 부인의 실망한 목소리와 눈빛을 본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실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런 일이 있은 다음에도 다른 곳에서도 집에 들어와 자라는 것을 사양하고 마니까요. 그러나 이걸로 이제는 끝입니다. 이른바 삼세 번입니다. 읽는 사람도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나는 이때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버스 정류장에서 여성과 만난 후에야 비로소 타인의 진심 어린 도움을 거절하는 행위는 뺨을 때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라는 사실를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데 도대체 나이가 몇이나 되어서야 가능했는가! 이제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으리라. 앞으로는 타인에게 뭔가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즐거움을 수용하리라. 또한 선물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바로 보답이라는 것도 모르고, 몇 푼 안 되는 돈푼으로 보답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나의 보잘것없는 결벽증을 완전히 버리겠다.”

맞습니다. 어디 돈으로만 은혜를 갚나요? 얼마든지, 낯선 여행객이 주인과 같이 밥을 먹으며 들려 주는 여행담이 보답일 수 있지요. 얼마나 멋진 깨달음인가요! 이 책의 곳곳에는 사람들 사이에 따뜻하게 흐르는 정이 보석처럼 박혀 은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래서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됩니다. 이런 게 없다면 무슨 맛으로 살까요? 그런데 글쓴이는 따뜻한 마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고 얘기합니다.

“내가 여행을 하면서 자주 겪었던 것은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베푼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가난하거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게 어떤 건지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귀를 더 많이 기울이고, 더 쉽게 마음을 나눈다. 한편 부유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거나 조금밖에 가진 게 없다는 게 도무지 어떤 것인지를 아예 상상할 수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은 인색하다기보다는 생각이 미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환대의 문화와 더불어 이 책의 또 한 가지 특징으로 자연과의 교감도 꼭 들어야 합니다. 자연과의 일치감이 있으니까 사람들을 더 따뜻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내 부연 설명이 사족인 것이 분명해질 테니까 옮기기만 할게요. 좀 길기는 하지만 충분히 읽을 만합니다.

“나는 누워 검은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저리로 서둘러 몰려가는 구름을 쳐다보았다. 이러다 보면 어느 결에 잠이 찾아와 밤 세상을 귀 기울이며 엿보는 나를 덮치겠지.

잠결에 깨어보니 칠흑같은 어둠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방 어디에도 불빛이라곤 하나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시도, 마을도, 농장도, 자동차도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나와 바람과 나무와 저 멀리에 바다만 있었다. 주위에 자작나무 둥치들이 하얀 요정처럼 둘러서서 자는 동안 나를 지켜주는 파수꾼이자 밤의 비밀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어주었다. 조금 으스스하기도 했지만 아름다운 분위기였고, 내가 잠에서 깨어날수록 시야도 점점 밝아져 어슴푸레 요정들로 보이던 게 다시금 자작나무가 되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 위협적으로 보이던 시커먼 구름이 말끔히 사라졌으니 분명히 마법이 일어났었나 보다. 하늘이 깨끗하게 청소를 한 것처럼 머리 위에 높이 떠 있었다.

하늘 높은 곳에 있는 강한 기류 탓에 별빛은 여느 때처럼 찬찬한 빛을 발하지 못하고 흔들리듯 깜박거렸다. 아마 하늘이 언제나 반짝이기만 하는 별들에게 싫증이 난 모양이었다. 마치 거인이 자기가 얼마나 부유한지 자랑할 심산으로 보석 상자에서 다이아몬드를 한 줌 집어 밤 하늘에 휙 던져 흩뿌려놓은 것만 같았다. 이 순간에 말할 수 없이 부유한 마음이 된 나처럼, 밝은 별동별이 창공에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긴 꼬리를 끌고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보다 작은 두 개의 별똥별이 느릿하게 꼬리를 끌며 사라졌다. (중략)

이날 밤, 나는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전 우주와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생물과 물질세계의 한 부분이다. 나는 광활한 하늘 아래에 있으면서 집에서처럼 편안했고, 이 순간의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숭고함 때문인지 어느 결에 흐르는 눈물이 부끄럽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는 아쉬우니까 사람의 따뜻한 마음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함께 어우러진 대목도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스위스에서 여인숙에 들렀는데 안주인이 일 년에 한 번 여행자나 순례자에게 무료로 식사와 하룻밤 숙박을 제공해 기쁘게 해 주자고 남편과 합의를 보았다며 글쓴이를 그 손님으로 고릅니다. 그래서 통나무집에 자게 됩니다.

“밤에 통나무집의 아름다운 방에 누웠다. 도끼로 자른 나무둥치를 끼워 맞춘 집이었다. 통나무집이 지어진 지 2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중략)

통나무집이 숨을 쉰다. 집이 살아 있다. 여기서 삐걱거리고, 저기서 신음소리를 내고, 투두둑, 탁탁하는 소리를 낸다. 나는 밤의 마법에 완전히 나를 맡겼다. 불현듯, 통나무집이 내는 목소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벽에 있는 거대한 들보, 기둥과 지붕, 이 모든 게 살아서 밤공기가 서늘해져 생기는 온도 차이에 의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마치 깊고도 편안한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물론 나는 그런 현상이 집이 숨을 쉬는 동작이 아니고, 과학적 이유를 댈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왠지 비밀스러움이 훨씬 더 아름답지 않은가?

나는 이 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준 많은 나무들을 생각했다. 산악의 척박한 땅에서도 야무지고 튼튼하게 자란 나무들의 이야기가 집 안에서 계속 속삭이고, 나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차가운 달빛 속에 칼바람이 살을 에는 겨울밤에, 도끼를 든 건장한 남자들의 얼굴에서 펄펄 나는 뜨거운 김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잘린 나무들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집을 이루어주었다. 나무가 지붕과 안전을 선사한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읽는 시간 내내 글쓴이와 같이 걸은 기분입니다. 끝나는 줄 모르게 다 읽고 나니 너무 빨리 여행을 마쳤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자연과 교감하는 아주 뜻깊은 여행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책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렸으면 합니다.

7
2
이 기사에 대해

제주투데이  webmaster@ijejutoday.com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주투데이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제주투데이 소개기사제보광고안내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청소년보호정책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무로 1길 5 정도빌딩 3층  |  대표전화 : 064-751-9521~3  |  팩스 : 064-751-9524  |  사업자등록번호 616-81-44535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제주 아 01001  |  등록일 : 2005년 09월 20일  |  창간일 : 2003년 07월 23일  |  발행·편집인 : 김태윤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태윤
제주투데이의 모든 콘텐츠(기사)에 관한,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18 제주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ijejutoday.com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