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 훈/ 제주출신으로 제주일고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걷기는 우리 또래의, 특히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밥 먹듯이 날마다 해야 하는 일이었다. 자가용은 꿈조차도 못 꿀 50여 년 전이었으니 웬만한 거리는 다 걸어 다녔다. 나는 그래도 면 소재지에 살아서 해찰을 부려도 반 시간 정도면 학교에 갈 수 있지만, 면에 하나 있는 중학교(초등학교는 큰 마을마다 하나씩 있었다)에 다니려고 왕복 2시간 이상을 걸어야 되는 아이들도 꽤 되었다.

최근에 ‘올레’를 걷다가 빠져 나와 시험 삼아 중학교 친구들이 다녔던 길을 되밟아 봤다. 정말 멀었다. 내 어린 시절에도 일주도로를 따라 시외버스가 다니긴 했는데 용돈이란 건 개념조차가 없던 때라 차비가 없어서 못 타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노는 날이면 지네를 잡든지, 솜씨 좋은 아이들은 여러 개의 꿩코를 여기저기 설치해 놓고서는 꿩을 잡고 팔아서 돈이 주머니에 좀 있다고 해도 걷는 건 공짜였으므로 차 타는 대신 그 돈으로 풀빵이나 호떡 같은 군것질 하고 말지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토마토는 그래도 이해가 되지만 수박에까지도 설탕을 듬뿍 쳐서 먹던 시절이니 단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날마다 걸었다고는 해도 지금까지도 또렷이 생각나는 걸음이 있다. 우리 집에는 부모님 빼고는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여섯 살짜리 사내아이와 할머니를 두고 일본으로 돈 벌러 가 소식이 끊기고, 할머니는 어린 외아들을 증조부모님께 맡기고 재혼했다. 그런데 아버지마저도 초등학교 교사였으니 농사를 짓는 우리 집으로서는 어머니 혼자 그 일을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초등학생인 나도 큰아들이랍시고 틈나는 대로 일손을 거들어야 했다. 학교가 파하면, 어머니가 아기구덕에 지고 밭에 데리고 간 물애기보다 더 큰 동생들을 살필 뿐만 아니라 지금과는 달리 집마다 수도가 없었으므로 공동수도에 가서 물을 길어 와 큰 물항아리에 가득 채우고 나서, 마루에 걸레질도 하고 저녁이 가까워 오면 쌀에 섞을 보리를 미리 삶아 놓기도 했다. 부엌에서 보리짚으로 불을 때자면 그 연기 때문에 눈물깨나 흘려야 했다.

아무튼 그 시절 가장 큰 내 소원은 동생들 없는 데서, 거의 대부분이 부모가 농부여서 집안일에서 자유로운 동네 친구들과 마음껏 뛰노는 것이었다. 일요일이 오면 그렇게 지네를 잡으러 가고 싶었다. 동무들과 어울릴 수 있는데다가 돈까지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간절한 소원과는 정반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제야 내가 하고자 한 걷기 얘기가 시작된다.

농사를 지었으므로 농촌에서 소를 키우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소를 부려서 직접 짐을 싣거나 수레(그때는 ‘구루마’라고 했다)를 끌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목장이 있었는데 겨울을 빼면 거기서 소를 키우다가 일이 있으면 몰고 오고 끝나면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이 일은 내가 담당이었다. 캄캄한 이른 새벽 학교 가기 전에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부비며 목장으로 가는 초등학생 꼬마를 그려 보라. 집을 나서자면 혼자인 게 서러워서 눈물이 앞을 가리곤 했다. 무슨 문학적인 비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아마 가는 데만 한 시간이 좋이 걸렸을 것이다. 지금도 고향에 들르면, 왕복 시간도 재고 어린 시절을 추억할 겸 해서 한번 꼭 가 보자는 생각을 하면서도 목장을 팔아 버려서 그런지 여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소들을 몰고 내려오거나 올리는 것은 그래도 가족이나 친구와 다를 바 없는 소들과 함께하니까 그런대로 괜찮은데, 이른 새벽이나 농사일을 마친 저녁에 혼자 오가는 산길은 외로웠다. 나는 그때 왜 그리 착했는지 지금에 와서는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울면서 안 간다고 떼를 쓰면 아이를 어머니가 어쩌겠는가. 그 어린 나이에도 장남 의식 같은 것이 있었나 보다. 지금도 부모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평소의 내 무심과 불효를 어린 시절의 내 외로운 걷기를 강조하며 유치하게 벌충하곤 한다.

그런데, 이 나들이가 내 걷기의 원체험이 된 것 같다. 그토록 싫었던 일이 시간의 마모 작용으로 아름다운 데다가 행복하기까지 한 추억으로 바뀌기도 했겠지만, 그것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걸음이 받는 줄도 모르게 베풀었던 자연과의 교감이랄까 그런 것이 지금껏 날 걷게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어린 시절을 참 잘 보낸 것이다. 크게 내세울 것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내가 이만큼이나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된 데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만 같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책 공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 크나큰 행복이었다. 그 공부 대신에 늘 몸을 움직이고 자연과 접촉함으로써 의식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내가 자연의 일부라는 소중한 지혜를 몸으로 먼저 익힌 것이 아닌가 한다. 소는 외로운 길을 함께했던 내 형제였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이른 아침의 대지는 나를 감싸 주는 부모였던 셈이다. 부모님은 오래 전부터 소를 키우지 않게 되었지만, 내 어린 시절의 그 어미 소와, 그에서 태어나고 어미가 늙자 그 역할을 이어받은 암소는 지금 바로 그려 낼 듯싶게 선명하게 떠오른다. 요즘이었다면 여러 장의 사진으로 남았을 텐데 참 아쉽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얻은 깨달음이지만, 어린 시절의 걸음은 내 존재와 이 세계가 하나라는 근원적인 진실을 알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연속성과도 만나게 해 줬다. 진화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조상들은 늘 걸어 다녔다. 그러므로 우리 몸 안에도 이 흔적(유전자)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성인병은 이른바 문명의 이기를 편리하게 쓰게 되고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엄청나게 줄어듦으로써 이 유전자를 잠재운 결과로 생기는 것일 테다. 걸으면 우리는 조상과 만나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걸으면서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날 때마다 제주는 물론이고 서울에서 남도 지방까지 여기저기로 걸어서 돌아다녔던 것은 어린 시절의 뜻하지 않은 ‘연습’이 몸에 새겨 준 은혜로운 선물인 것만 같다. 환갑을 넘긴 지금까지도 운전 면허증을 갖지 않은 것은 겁이 많아서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다 따는 것을 내가 왜 똑같이 그래야 하느냐는 반발 심리도 조금은 작용했지만, 행복한 도보 여행이 그렇게 하도록 시킨 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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