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 훈/ 제주출신으로 제주일고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서만 현실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육감은 이 구체적인 세계에 대한 정보와 그 느낌을 전달해 주는 통로다. 그러므로 이 감각을 이용한, 외부와의 소통이 없으면 삶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이나 행복은 이 감각의 활용과 깊은 관계에 있다.

아름다운 풍경과 예술이 선물해 주는 감동을 생각하면 얼른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애인들의 포옹을 떠올려도 좋다. 존 레논이 노래했듯이, “사랑은 접촉이다(Love is touch).”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 않으면 멀어지는 법이다. 이런 이치를 잘 알려 주는 영어 속담으로 “Out of sight, out of mind.”가 있는데, 감각이 마음(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한눈에 보여 준다.

그런데 문명이 발전할수록 이 감각의 직접적인 소통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기계는 몸의 움직임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우리 몸과 감각 기관을 확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톱을 쓰면 굵은 나무를 잘 자를 수 있다. 전에는 직접 등에 지고 날라야 할 무거운 짐도 이제는 손가락 하나로 단추만 누르는 수고를 거치면 기계가 알아서 한다. 이제는 인공 지능이 등장하여 사람이 차를 직접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눈앞에 두고 있다.

놀이의 변화에도 이런 현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놀이야말로 몸과 직결되는 운동이다. 어떻게 보면 외부 세계와의 감각적인 소통을 즐겁게 연습하기 위해서 놀이가 생겼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온몸을 골고루 쓴다. 고무줄놀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다리는 물론이고 몸까지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 여름에 물가에서 날마다 놀다 보면 몸이 물에 뜰뿐더러 헤엄까지 치게 되는 신기한 경험도 하게 된다. 이 놀이의 되풀이가 없었다면 몸의 기관들이 역할을 제대로 하기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사람 구실도 못 했을 것이다. 흔하디흔했던 제기차기라든지 줄넘기를 하면서 우리는 저절로 건강해지고 덤으로 친구들과도 우정을 쌓았다.

그런데 이제 이런 놀이들을 주위에서 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져 버렸다. 공부하기 바빠서 같이 놀 동무가 없기도 하지만, 혼자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놀이의 특징은 몸의 일부분만 쓰고, 현실의 인간들과의 생생한 교류나 어울림이 없어도 된다는 데 있다. 가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몸은 편하게 가만히 있으면서 눈만 움직여도 되는 놀이도 있다. 좀 과장하면, 남이 노는 것을 보기만 한다. 시각 매체를 통한 스포츠 관람이 그 예다. 그래도 텔레비전은 식구와 얘기를 나누면서 함께라도 보았다. 스마트폰은 이런 분위기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스마트폰은 일인용 장난감이자 놀이터며 애인이다. 심지어 친구나 애인과 만나고서도 이 만능 기계하고만 노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도 이렇게 눈으로 즐기는 구경거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의 운동회처럼 어디까지나 이례적이었고 그 현장감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놀이의 일상화는, 몸을 활기차게 움직여서 땀을 흘리고 인간을 포함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 익숙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다. 우리 조상들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스포츠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매체가 있다는 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요컨대, 문제는 삶이 편해지는 것과 비례해서 무언가 많이 잃어버린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자동차를 타기 때문에 우리 발은 땅과 직접적으로 맞닿지 않게 된다. 웬만한 길은 다 포장돼 있어, 걸으면서 흙이 지니고 있는 생명을 키우는 힘을 맛보지 못한다. 어린 시절에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사람의 불안과 불만족은 이런 감각의 간접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에서도 오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 몸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자연 세계로부터 퇴각하고 소외되어 가고 있다. 당연히 감각도 싱싱하게 자랄 수 없다. 이러므로 축구 선수가 되고자 하는 아이가 아닌데도 이 운동을 학원에서 배우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감각의 간접화가, 뒤로 돌리기는 아예 불가능하다는 무력감을 가지게 할 정도로 대세가 되고 있다. 그 해결 방법도 덩달아서 자연에 대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현실에서 감각의 직접적인 소통은 아주 소중하다. 그러므로, 좀 거창하게 말하면, 흙을 밟고 풀 냄새를 맡으며 우리 감각을 자연에 열어 걷는 일은 우리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산에 올랐을 때의 뿌듯함을 상상해 보자. 자동차로 짧은 시간에 멀리 가고, 에어컨이 있는 방에서 하는 일이 잘되면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도 자꾸 물어 보아야 한다. 걷지 않고 자연의 공기와 절연해서 잃어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그 효율성이라든지 경제적인 효과는 사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돈도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자연과 멀어짐으로써 우리 안의 자연마저도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되어 버렸다. 우리가 과도하게 건강을 걱정하여 약과 음식을 챙기는 것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게 된 결과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살아 있는 것들의 궁극적인 도달점인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죽음 자체는 그렇게 무섭거나 더러운 것일 수가 없다. 생명의 순환 과정에서 거쳐야 할 한 단계일 뿐이다. 옛날에 어른들이, 죽어서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하고 자기가 묻힐 곳을 정하고 틈나면 찾아가 눈에 익히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삶이 뜻을 가진다면 바로 이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부여하는 생물학적인 필연성, 다시 말하면 한 번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유한성과 일회성이야말로 삶을 진지하고 엄숙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종교도 이 필연성과 깊은 관계에 있다.

우리가 자연에 속하며, 따라서 자연과 직접적으로 교감해야 지극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우리의 존재 조건을 깊이 생각해야 할 때다.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 예를 들어 최신 의술에 기대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는 목숨을 연장하는 것은 겉보기와는 반대로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인지 모른다. 이런 걸 생각하다 보면, 바닷가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마구 해치며 들어선 건물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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