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고부자/ 전 단국대 교수

제주 섬[濟州島]사람들 저승 옷. 우리 할머니시절까지 재산목록 1호였다.

제주사람들. 태어나선 핏덩이인 채 아버지가 입던 헌 ‘갈중이’에 둘둘 말아서 방 ‘웃묵(웃목)’신세로, 사흘[三日] 아침에야 목욕시켜주고는 강인과 인내심을 기르고 피부병에 걸리지 않는 거라고 어른들의 의지(意志)대로 거친 삼베[麻布]로 만든 ‘봇뒤창옷’을 세이레(三 ‧ 七日)동안 입고 컸다.

한국 사람들. 인생(人生)치레 “일생(一生) 두 번 한다”했다. 첫 번째는 혼인(婚姻)때요, 두 번째는 죽어서다. 그래서 “살아 한번, 죽어 한번 치레”라 했다. 첫 치레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요, 이성지합백복지원(二姓之合百福之源)이라 하여 일반 사람들도 양반(兩班)들만의 특권으로 입었던 사모관대(紗帽冠帶), 족두리(簇頭里) 원삼(圓衫)차림을 할 수 있었다. 이 옷들을 육지에서는 가문(家門)것이나 이웃 양반들에게 빌려 입었다. 제주는 달랐다. 양반층이 많지 않아 빌려 입을 옷이 귀했으니 일생 한 번하던 치레도 물 건너간 셈이었다. 새서방[新郞]들은 그런대로 제주에 현직(現職) 남자 양반들이 있어 덕(德)을 볼 수도 있었지만, 새각씨[新婦]것은 귀했다. 그러니 제주 여자들 일생한번 양반치레도 해보지 못 한 거다.

제주사람 평생 ‘입성(옷)’ 어쨌는가. 죽는 날까지도 ‘갈옷’ 신세를 면치 못했다. “개날 [豚]날 갱이(호미) 놓는 날 어시 높드 단 보난(애쓰며 살다 보니) 저승이 앞이라라”면서 살았단다. 모자람을 탓하지 않으며, 자신의 분수에 맞게 말이다. 오죽했으면 육지사람들 글에 “추워도 옷이 없어 거적대기 쓰고 산다”고 했을라고.

그러나 마지막 길. 제주사람에게도 생애(生涯) 두 번이자 마지막 치레. 가장 큰 소망을 담은 ‘호상옷’이 있었다. 죽어서 입는 옷을 육지에서는 “수의(壽衣), 저승 옷, 머능 옷, 죽음에 옷, 시집갈 옷…”이라 하고, “호상옷”이란 말은 제주에서만 썼다. 상(喪)이 났을 때 요즘도 돌아가신 이가 오래 살고, 복(福)이 좋으면 “호상(好喪)”이라고들 한다. 저승은 이승의 삶이 힘든 제주사람들에겐 맹목적인 피안(彼岸)의 세계로 부각되고, 이에 ‘호상옷’은 이승에서 바르게 살면 죽어서는 “영생불사(永生不死)한다”는 내세(來世)에 큰 기대를 갖기에 마땅한 상징물이었을 것이다. 한술 더 떠 제주사람에게 내세 즉, 저승은 “이승에서 풀지 못한 한을 풀 수 있는 곳”이라는 신념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갈 수 있었던 하나의 버팀목이었을 게다. 오죽했으면 가 본 적도, 보도 못한 저승을 그리며 살았겠는가? 그래서 그 세대 어른들에게 호상옷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고, 귀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나 물애기 때.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났다[解放] 나 클 때 제주에서도 부모님 호상옷 장만은 효(孝)의 덕목(德目)중 하나였다. 환갑이 가까워지는 윤년(閏年) 윤달에 만들었다. 옷감이야 색(色)좋고 무늬있는 비단이 으뜸이지만, 제주에서야 언감생심(焉敢生心). “맹지[明紬]가 비단”이었다. “아명(아무리) 어서도(없어도) 호상옷은 잘 ᄎᆞ려야 ᄒᆞᆫ다(마련해야 한다). 죽은 사름(람) 호상옷 잘 해 입혀야 죽은 이도 좋고, 산 사람도 잘 된다”고. ‘미영[木棉]’에 갈옷이나 입고 살았던 사람들이라 마지막 옷에 나마 그런 기대(期待)를 걸만도 한 일 아닌가?

바느질도 정성이었다. 좋은 날[吉日]에, 사람들도 복 많고 솜씨 좋은 친척과 동네어른들이 모였다. 주로 수눌음(품앗이)이었으며, 재간에 따라 맡는데 특히 복 좋고 솜씨 좋은 어른들은 단골이었다. 시간은 좋은 기운[陽氣]받으라고 아침 해 뜨면 시작하고, 해가 지면 마쳤다. 호상거리는 관(棺)안에 담고, 땅 속에 묻을 것이라 조금 복잡했다. 입을 입성[옷. 服飾]들이 첫째이고, 둘째 시신(屍身)을 싸고 묶을 것[殮襲], 셋째 보공물(補空物)이다. 다 해봐야 ‘여남은(십 여 가지)’ 밖에 안 된다.

호상옷은 살아 한번 호사했던 시집 장가갈 때 입었던 것과 같았다. 남자 옷은 바지 저고리가 각기 홑과 겹 2벌씩에, 도포 한 벌이다. 여자 것도 치마 저고리와, 속곳 두어 가지에 ‘장옷’이 전부다. 남녀공통으로 엽습거리로는 머리의 모자, 얼굴가리개, 손싸개, 신, 버선, 손발톱과 머리카락 이빨을 담은 주머니 다섯개[五囊]이다. 거기에 이불[天衾] 요[地褥] 베개[枕], 마지막 묶을 거리로 긴 것[長布]과 짧은 것[短布]도 마련한다. 색(色)은 남자 것들은 모자 외에 거의 흰[白]것들로 했다. 여자들은 ‘새각씨’ 입었던 것처럼 했다. 저고리는 연두에 옷고름이나 끝동은 치마와 같이 빨강으로 하는데, 제일 큰 치레는 장옷이다. 장옷은 안은 흰색 명주로, 겉은 초록이나 연두로, 옷고름이나 깃은 빨강으로 했다.

이 날 자식들은 오신 분들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 옷이 다 되면 주인공은 입고 자랑했고, 서로 덕담을 주고 받았다. 이렇게 좋은 날에는 꼭 꺼리는 일[禁忌]이 따르게 마련이다. 사람과 바느질법이다. 정신 나간 사람이나, 허튼사람 출입은 금물이다. 바느질에선 “뒷바느질과, 매듭을 짓지 않는다”했다. 뒷바느질을 하면 “죽은 이가 이승을 잊지 못하여 허공에 맴 돈다”하고, 매듭은 “이승에서 맺힌 한(恨)을 풀지 못하고 가기 때문”이라 했다. 다 된 것들은 행여 좀 쓸까 걱정되어 마른 담뱃잎 놓고, 쥐가 쏠세라 보따리에 싸서 잘 보이는 곳에 두거나 궤(櫃)속에 보관했다. 볕 좋은 오월단오(五月端午)날 거풍도 필수다. 옛날 난리 때 집 비울 때면 항아리나, 땅속에 파묻었다. 특히 맏며느리는 제 자식 두고라도 조상의 호상옷과, 족보(族譜)를 먼저 챙겼다지 않는가. 동네 누구 ‘메(며)누리’도, 나 외가(外家) 남평문씨(南平文氏) 큰 ‘삼촌[外叔母]’이 하셨던 일이다.

입성은 입은 자의 얼굴이요, 시대를 반영한다. 한(恨) 많은 애환과 근면함이 서리고 베인 그 것들. 얼과 혼들을 담은 제주입성거리들. 힘들게 살아왔던 조상들의 생활거리들이 박물관 진열장에 들어있다. 아기들의 ‘봇뒤창옷’, 노동복인 ‘갈옷’, 녀[潛嫂. 潛女]들의 ‘물소중이’, 쇠태우리[牧者]들 ‘가죽옷’ …. 이것들과 좀 더 친해져 보자. 올바른 정신과 넋들을 바르게 이어받고, 또 살려가야 함이 옳지 않겠는가? 제주 조상들이 아기들에게 왜 거친 삼베옷을 입혔는지도 새겨 둘 일이다 .

요즘 할머니들, 이 옷 얘기 꺼내는 것 꺼려한다. 자식 눈치 보인단다. “알아서 해 줄 건데, 집도 좁은데. 장례식장에서 돈만 내면 되는데. 에이구 그 거… “. 시중(市中)에, 장례식장에서 파는 삼베로 만든 것들. 삼베는 중국과 국산 두 가지다. 값은 한국 것이 비싸다. 특히 ‘00포’로 했다는 것이 더 비싸다. 비싸지만 국산 삼베 그 값으론 안 된다. 더 비 싸야 되는 건데. 왜? 삼베에 금박(金箔)을 했다는 ‘황금수의’라는 것도 보인다. 우리 조상님들 것이라는데.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장례식 때 가는 곳마다 듣는 소리 “천당, 극락, 영생불사, 극락왕생…. 또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는 노래까지. 정말 죽으면 다시 하늘인가 어디에 가서 죽은 사람들과 다시 만날건가? 저 옷들 입고서? 얼마 전 장례식 때 이것저것 안타까워하는 내 꼴 보고 양반집 후손이라고 자부하는 품위와 교양과 학덕을 갖춘 분 말씀. “세상이 다 그런걸요. 화장 시키는데요 뭘.”

2018년 3월 1일. 일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외침이 터진 99년 전 오늘. 제주 어머님 할머님께 듣고, 보고, 느꼈던 고리타분한 옛적 일을 들춰 봤다. 어쩌다 조상님 부모님 값이, 사람값이 여기까지 이렇게까지 추락 한 걸까? 앞으로 얼마나 더 할까?

오늘 내 고향 제주. 그 곳 ‘호상 옷’은 어떤 그림일까? 외롭고, 괴롭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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