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 훈/ 제주출신으로 제주일고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집을 떠나 일주일 넘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걷기만 한 적이 있습니다. 잠은 주로 여관에서 잤는데, 마땅한 곳이 없으면 일인용 텐트를 쳐서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두서없이 한 생각을 얘기해 볼까 합니다.

과거를 치르고자 제주도나 전라도에서 서울로 가는 가난한 선비를 그려 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웬만한 거리는 자동차 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의 감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길도 나쁜데 도대체 짐은 얼마나 져야 했을까요? 짚신은 몇 켤레나 갈아 신어야 할까요? 먹고 잘 곳도 흔하지 않았을 테니 서울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고생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배우는 것도 많았을 테니까요. 민가에 들러 자게 된다면 백성의 고단한 삶과 마주하는 기회가 생긴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합격하면 좋은 관리가 되었겠지요? 물론 이런 경험이 곧바로 양질의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보듯이, 높은 지위에 올라가 처지가 바뀌게 되면 지난날의 절절한 깨달음도 한때의 일로 그치고 마는 수가 있으니까요. 그래도, 긍정적인 쪽으로 작용했다고 믿고 싶어집니다.

백성의 삶을 보고 그들의 얘기를 들어서만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걸음이 가르쳐 주는 것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주 단순해집니다. 걷다 보면 여기저기 아픈 곳, 내 앞에 놓여 있는 길, 먹는 것, 요컨대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것만 남고, 다른 것은 차츰 사라지고 맙니다. 이 후자를 대표하는 것은 아마, 우리를 고해(苦海)로 내모는 과도한 욕망일 것입니다. 좀 웃자고 얘기하면, 쓸데없는 살도 여기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거운 분들에게 이 걷기를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가벼움과 자유는 대체로 같이 갑니다.

도를 닦으려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갑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인데, 단순해지기 위한 것도 그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속세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타인의 욕망을 따라 하게 됩니다. 꿈이나 이상이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대체로 남의 것을 추종한 것이기가 쉽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걸맞지 않은 일을 도모하다 보면 생각이 흐트러지고 괴로워지기 마련입니다.

혼자 걷는 것도 저 수도자의 행위와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혜초나 원효가 먼 외국으로 걸어서 갔다 온 것은 거기서 뭘 배우려고 한 것이겠지만, 내 짧은 경험으로 추측해 보건대, 걷는 일 자체에서 깨닫는 것도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를 닦는다’고 할 때의 ‘도(道)’는 길이기도 하니 억지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도보 여행이야말로 수행이라는 주장도 해 볼 만합니다.

무엇보다도 고통이 선물해 주는 지혜가 그 근거입니다. 이런 점은 걷기의 대가에게 직접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홀로 외로이 걷는 여행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들고, 육체의 제약에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안락하게 사고하던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순례자들은 아주 긴 도보 여행을 마친 후엔 거의 예외 없이 변모된 자신의 모습을 느낀다. 이는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스스로를 직면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발견할 수 없었을 자신의 일부를 만났기 때문이다.”(베르나르 올리비에, 임수현 옮김, 󰡔나는 걷는다 1󰡕, 효형출판, 2003, 189쪽.)

참고로, 이 책의 지은이는 예순두 살의 나이에 이스탄불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서안에 이르는 12,000킬로미터의 비단길을 1,099일 동안 걸었습니다. 4년 동안 봄부터 가을까지 걷고 겨울에는 쉬었다가 다시 계속했습니다. 한마디로, 몸과 마음이 다 자유의 경지에 올라선 사람입니다.

히말라야 등산에 대한 자전적 기록을 몇 권 읽으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지은이들이 겪은 고통의 의미였습니다. 저런 산에 오르자면 여러 가지 고난도의 기술은 물론이고 강인한 체력과 창조적인 상상력 같은 힘을 골고루 갖추어야 합니다. 내게는 생각조차 허용하지 않은 그런 차원의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것을 조금이나마 알고 싶었습니다.

왜 고통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걸까요? 극한 상황이 베풀어 주는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 아는 이육사의 시 「절정」(1939)이 적절한 예입니다. 배경은, 매섭게 추운 겨울인 데다 북쪽 지방의 아주 높은 고원 지대입니다. 이런 시공간으로도 모자라 시인은 “서릿발 칼날 위에 서”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극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지옥이라고 불러 마땅한 이런 가혹한 현실이 시인에게는 “강철로 된 무지개”로 바뀌어 날카롭고 단단하며 아름답게 보입니다. 주체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현실에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설 때만 얻을 수 있는 비극적 황홀경입니다. 체제에 저항하다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진 러시아 혁명가들이 몸과 마음의 칼날을 벼리면서 꿈꾼 이상 세계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서양 사람들은 비극을 아주 중요한 문학 갈래로 여깁니다. 유한한데도 그런 조건을 초월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극의 주인공은 패배하면서 승리하는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약하면서 동시에 위대합니다. 이들이 위대한 것은 열정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습니다. 적당히 눈감고 모른 척했으면 몰락이나 죽음만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치욕을 견디지 못합니다.

열정은 수난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영어 단어 passion을 사전에서 찾으면 두 가지 뜻이 다 들어 있습니다. 비극의 등장인물은 일부러 고통의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고 자신의 한계와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하게 됩니다. 용감해지면서 동시에 겸허해집니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을 달관이라든지 깨달음이라는 말로 바꿔도 되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관객에 미치는 영향을 카타르시스라고 했습니다. 원래 설사약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입니다. 우리 몸에 나쁜 것을 밖으로 내보내 깨끗하게 해 주지요. 관객은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여정에 동행하고 그의 깨달음에 공감하게 됨으로써 마음을 고양시키게 됩니다.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마음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부처가 말한 해탈과 비슷한 경지가 아닐까 합니다.

산소통 없이 히말라야를 오르는 사람이나 비극의 주인공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내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걸으면서 늘, 지치고 아프다는 타령만 늘어놓습니다. 쓰러질 것 같다고 하지만 좀 쉬거나 밥을 먹으면 다시 힘이 나는 것을 보면 실상은 엄살일 뿐이지요. 그래서일까요,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상상이 잘 되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죽음 직전의 것이라고 짐작해 볼 뿐입니다. 자신이 겪은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슬퍼할 일만은 아니지만, 그 세계를 곁눈질이나마 하고 싶은 바람은 여전합니다.

버스가 지나가면 타 버릴까 하는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차가 없는 길의 한적함과 사람의 손을 덜 탄 강의 아름다움이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는 내 결심을 거들어 줘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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