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성추행 당했다”는 뜻으로 요약되는 이른바 ‘미투(Me Too)'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가히 태풍의 핵으로 커가고 있다.

지난 1월29일 현직 여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사실 폭로’가 촉발한 쓰나미 현상이다.

그동안 성적 피해를 당했으면서도 침묵 할 수밖에 없었던 성적 약자들이 들고 일어선 ‘성범죄, 성폭력 피해 고발운동’이다.

이를 폭로하여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관행적으로 구조화한 성적 권력을 추방하자는 뜻에서 출발했다,

반향은 넓고 크다. 확산 속도 역시 빠르다.

연극 영화계 등 문화예술계의 원로나 유명인사, 대학교수, 종교계, 체육계, 정치계와 언론계까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이로 인해 힘 있고 잘나가는 각계각층의 성적인 ‘마초 권력’들이 오금을 저리고 떨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런 추세라면 ‘대한민국은 성추행 공화국’이라는 더러운 별명을 들을지도 모른다.

사실 ‘성(性)‘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속한다. 인류역사와 함께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다.

‘성적 본능이 권력과 저항의 시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투 운동’의 현상과 본질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가해자’는 ‘성적 권력‘이고 ’피해자의 고발‘은 저항의 시작이다.

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인 미셸 푸코(1926~1984)는 그의 역작 ‘성의 역사’에서 ‘성의 모든 논의의 중심에는 인간의 신체가 있었고 신체야 말로 권력의 시발점인 동시에 저항의 시발점’이라고 말했다.

‘성’ 문제를 권력의 문제로 접근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을 권력의 도구나 수단으로 이용했었다’는 역사적 전언은 새롭지 않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중국의 독보적 여황제인 당나라 측천무후(測天武后)가 사로잡아 놀았던 ‘성적 권력’이 그 예일 수 있다.

지금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도 불의하고 무도한 ‘성적 권력’에 대한 고발이고 반란이다.

페미니스트들의 성 정체성 확립과 자강을 위한 여성 자각 운동으로 볼 수도 있다.

1940년대 페미니스트 시몬드 드 보봐르도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 진다’고 했다.

여성의 수동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미투’에서 나오는 ‘성 이야기’는 다르다. 음흉하고 역겹고 더럽다.

거세되지 않은 성적 욕망을 가진 구조적 권력 일방이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은 성적 약자에게 지저분하고 무자비하게 공격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얼굴을 한 늑대인간이 성적 약자를 유린하고 단지 성욕 배설의 도구나 수단으로 삼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거세되어야 한다. 잘못된 성적 문화 관행을 뿌리 뽑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타락한 ‘성적 권력’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투운동’에 대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시각도 많다.

‘미투 운동’을 남성과 여성의 성 대결이나 성 전쟁으로 보지 말고 원인과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

‘미투’문제를 어느 일방의 책임으로만 몰지 말자는 반론이다.

인간의 본능과 성적 유혹의 문제도 함께 논의하자는 주장인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 성욕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능이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진화론’에서 다윈은 ‘짝짓기의 신비’를 풀어내면서 ‘성적 유혹’의 문제를 설명했다.

‘숫공작새의 화려한 깃털과 인간의 풍만한 유방과 엉덩이는 모두상대방의 ’성적 선택(Sexual selection)'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남성의 체격은 공격적으로 발달했다. 사냥을 위해서다.

여성의 몸매는 둔부와 유방이 풍만하다. 임신과 출산을 위해서다.

남녀의 신체는 이렇게 ‘공격과 포용’의 구조로 돼 있다.

‘진화론’적 입장에서의 설명이 그렇다.

에둘러 표현하자면 ‘여자의 성적 선정성이나 유혹이 남성의 성적 욕구를 자극하고 공격의 빌미로 작용 할 수 있다’는 설명이 가능해 진다.

‘미친 소리’라고 힐난할 일만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미투’논의의 폭을 넓혀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론 자제력을 잃은 성적 공격이나 욕구 발산은 성범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본능의 억압이 문명의 기초를 이룬다’는 프로이드의 사유는 오늘에도 경청해야 할 유효한 금언(金言)이다.

성적 본능을 효과적으로 억압하여 성추행이나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미투 운동’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또 있다.

‘미투’를 인권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진영 논리로 희석 시키려는 일련의 시도가 그것이다.

“보수가 진보를 공격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투를 확산 시키고 있다”는 황당한 논리에는 미투운동의 본질을 흐리기 위한 악의가 숨어 있다.

‘혹여 나의 성추행 문제가 까발려 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서 논의를 세탁하는 저급한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두는 대목이다.

또 있다. 피해자에 대한 2차피해, 특정 세력에 의한 낙인찍기, 악의성 무고의 폐해와 미투 운동 본질 흐리기, 선의의 피해 확산 등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것이다.

미투 운동의 본질 흐리기로 남성을 잠재적 성추행이나 성폭행범으로 간주한다면 여성 기피현상과 여성 외면 정서가 확산 될 수도 있다.

또 다른 사회적 문제가 야기될 수 있는 부분이다.

여성과 남성이 편을 갈라 싸우는 ‘성 전쟁’으로 변질된다면 여간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미투’는 남성과 여성, 어느 일방의 문제만이 아니다.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사회문화적 어젠다인 것이다.

관행적 구조와 일상화 하는 젠더 폭력에 대한 사회적 변혁과 제도적 장치가 시급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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