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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영화 두 편과 함께 떠나는 스코틀랜드이영철/ 한솔제지 퇴직. 트레킹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완주
제주투데이 | 승인 2018.03.07 04:37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영철/ 한솔제지 퇴직. 트레킹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완주/ 저서 4권/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 동해안 해파랑길/ 영국을 걷다/ 투르 드 몽블랑

'난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신. 내 이름은 코너 맥클라우드, 500년 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오래 전에 개봉됐던 영화 《하이랜더Highlander》의 오프닝 자막이다. 늙지도 죽지도 않고 영원을 사는 불사신들의 이야기, 진부할 것 같지만 당시로선 신선한 소재였다. 시리즈 4편까지 이어졌으니 범작만은 아녔던 게다. 스코틀랜드 북부 산악지대에서 불노불사不老不死의 존재로 태어난 한 남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사랑하는 이는 세월과 함께 늙고 병들어 죽어가고, 주인공은 그 곁을 지켜보다 홀로 세상에 남겨진다. 다시 새로운 이들과 새 인연을 맺지만 결국은 운명대로 다시 혼자가 된다. 그룹 퀸Queen의 서정적 음악들이 함께 흘렀고, 영상은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오랜 세월 이 영화가 나에게 생생한 건, 그 영상들에 비친 풍광들 때문이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스코틀랜드 산악지대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됐었다. 주인공 부부가 사랑을 나누던 오두막집과 뒷산 폭포, 아름다운 계곡과 웅장한 해안 절벽들….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지세와 풍경은, 해외여행을 쉽게 할 수 없던 시절의 나에게 간절한 로망 하나를 심어 놨다.

'언젠가 꼭 한번 가야 할 곳,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영국은 북부의 스코틀랜드와 남부의 잉글랜드 그리고 웨일스와 북아일랜드라는 4개 지방으로 이뤄졌다.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3개 지방인 브리튼 섬은, 지형적으로 우리 한반도와 닮았다. 스코틀랜드는 휴전선 너머 북쪽을,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이남 땅을 연상시킨다.

스코틀랜드는 다시 북부의 험한 산악지대인 하이랜드Highland와 남부의 저지대 로우랜드Lowland로 나뉜다.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처럼 인구가 밀집된 도시들은 대부분 로우랜드에 속해 있다. 스코틀랜드의 대자연을 얘기할 때는 대개 하이랜드가 거론된다. 영화 《하이랜더》의 배경지가 하이랜드다. 그 중에서도 로우랜드가 끝나고 하이랜드가 막 시작되는 글렌코Glencoe 지역이 영화의 주 무대다.

에든버러에서 하이랜드로 올라가기 위해선 서부나 중부 또는 동부 해안을 통하는, 세 갈래 도로가 있다. 이들 중 서부 쪽을 따라 오르다가 하이랜드 초입에서 만나는 곳이 글렌코다. 북대서양과 이어진 이 호숫가 산악지대는 하이랜드 여행객들에겐 반드시 거쳐 가야 할 필수코스다. 영화 초반 하이랜드의 두 씨족 간에 벌어지는 대규모 전투의 배경도, 글렌코를 여행하면서 만날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 남녀가 살던 오두막집과 주변 터전도 글렌코였다. 산과 산이 이어지는 계곡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무너진 탑이 있는 산 중턱에 정겨운 보금자리가 있었다.

스코틀랜드는 영국 연방으로 통합되기 전에도 오랜 세월, 잉글랜드로부터의 침략에 시달려왔었다. 330년 전 어느 겨울날, 글렌코의 맥도날도 씨족이 잉글랜드 군에 대거 학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잉글랜드 왕에게 쉽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남녀노소 40여 명이 새벽 잠결에 방안에서 몰살되었다. 겨우 도망쳐 산속으로 숨어든 이들도 하이랜드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모두 얼어 죽었다. '글렌코 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은, 스코틀랜드 인들의 잉글랜드에 대한 적개심을 증폭시킨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글렌코에는 그 옛날 영화 속 불사신이나 무고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자취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자연의 모습은 그 옛날 보았던 영화 속 그대로이다. 낮은 구릉이 이어지고 헤더꽃 만발한 황야가 펼쳐졌다. 높고 낮은 산 사이로 흰색의 구름들이 산허리를 감싸 도는 아름다운 정경이다.

영국의 유니언잭Union Jack만큼 한 나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함축한 국기도 드물다. 빨간 십자가는 잉글랜드, 파란색 바탕에 흰색 엑스(X) 자는 스코틀랜드, 그리고 빨간 엑스 자는 아일랜드, 이런 세 개의 상징이 절묘하게 덧씌워져 지금의 영국 국기가 되었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통합된 건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이다. 그 이전 400년은 통합에 대한 저항의 역사였다. 13세기 인물 윌리엄 월리스는 스코틀랜드의 초기 독립 투쟁을 선도한 민족 영웅이었다. 멜 깁슨이 감독에 주연까지 겸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를 통해서 이 영웅의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브리튼 섬의 켈트족이 스코틀랜드 왕국을 세운 건 9세기 중반이다. 잉글랜드로부터의 첫 침공은 11세기 후반, 노르만의 정복왕 윌리엄 때였다. 이후 13세기 말, 귀족들 간의 왕권 경쟁 혼란을 틈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왕국을 본격 지배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인들의 착취와 억압이 심해지면서, 이에 대항한 독립 투쟁도 불같이 타올랐다. 1297년의 스털링 브릿지 전투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잉글랜드 군대에 맞서, 열세의 스코틀랜드 인들이 압승을 거둔 최초의 전투였다. 곧 이어진 1314년의 배녹번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여 주권국가로 갈 수 있었다. 모두가 무력감과 자포자기에 빠져 있던 당시에, 민족혼을 일깨우며 자유를 위한 투쟁을 결집시키고 성공시킨 인물이 바로 윌리엄 월리스다.

배우 멜 깁슨은 《매드 맥스》와 《리쎌 웨폰》 같은, 당시로선 꽤 신선한 소재의 액션 영화 주인공으로 유명해졌다. 그저 얼굴 잘 생긴 액션배우로만 여겨졌던 그가 어느 날, 서사적인 대작 영화를 직접 만들어 세상에 내놨고. 세상은 깜짝 놀랐다.

역사의 사실을 바탕으로 약간의 픽션을 더한 이야기 구조는 짜임새가 있었다. 전투 현장에서의 리얼하고 역동적인 장면묘사는 압권이었다. 아름다운 여주인공과의 로맨스 또한 남녀 관객들로 하여금 가슴 설레며 영화에 빠져들게 할 만 했다. 영웅의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온갖 요소들이, 스코틀랜드의 웅장한 자연에 합쳐져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영상을 만들어냈다. 최우수작품상과 최우수감독상 등 그해의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다. 영화로서의 완성도와 재미에 덧붙여, 스코틀랜드라는 먼 나라의 자연과 역사를 만나는 데에 영화 《브레이브 하트》만큼 재미있고 유익한 교재도 드물다.

에든버러와 글래스고를 연결하며 북부 하이랜드로 가는 길목에 스털링이 자리 잡고 있다. 로우랜드의 이들 세 도시는 정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이루며, 역사 지리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중추 역할을 해왔다. 스털링은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첫 전장이자, 윌리엄 월리스를 스코틀랜드 민족 영웅으로 단숨에 밀어올린 역사의 명소이기도 하다.

도피 중이던 윌리엄 월리스가 잉글랜드 군에 붙잡힌 곳은 글래스고였다. 사리에 눈 먼 동포 귀족의 배신으로 붙잡혀 런던으로 압송된 후 처형되었다. 민족 영웅을 적에게 넘긴 그 도시는, 700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 스코틀랜드 최대의 경제도시로 성장해 있다. 영웅을 보호하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지, 글래스고 사람들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의지는 현대에 이르러 더 강해진 듯하다.

2014년 9월, 스코틀랜드에서는 영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 찬반을 묻는 주민 투표가 있었다. 독립 찬성이 압도적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반대가 10%나 더 많이 나온 결과에 모두가 놀랐다. 이로써 스코틀랜드는 영국에 합병된 지 300여 년 만에 독립은 시도했으나, 주민들 반대로 계속 영국의 일원으로 남게 되었다.

32개 행정구역 대부분이 반대였고 에든버러조차 독립 반대표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글래스고는 달랐다. 독립에 찬성하는 의견이 훨씬 많았다. 윌리엄 월리스와 연계된 민족적 자존감일 수도 있고, 경제중심지로서의 타산적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글래스고는 옛 정취 물씬한 에든버러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에든버러를 먼저 보고 글래스고로 가면, 인사동 거리를 배회하다가 명동으로 들어설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에든버러가 역사, 문화, 중후함 같은 단어에 어울리는 중세형 도시라면, 글래스고는 경제, 윤택, 역동적 같은 단어가 생각나는 현대식 도시이다. 에너지와 영감이 흘러넘쳐 보인다는 점에서는 두 도시가 비슷하다.

잉글랜드와의 통합으로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에 속하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 왕국의 유서 깊은 수도였다. 중세부터 도도한 세월을 이어오면서 근대 도시로 성장하기까지 그 중심에는 에든버러캐슬이 있었다. 캐슬 록Castle Rock이라는 단단한 바위산에 우람하게 서 있는 이 고성은, 에든버러 시내 어디에서 보건 그 자태가 위압적이다.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서도 결코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함을 드러낸다.

아가일 탑Argyle Tower 아래에 있는 입구를 통하여 성에 오르면, 도열해 있는 대포와 함께 에든버러 시내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역시 이 성이 얼마나 난공불락이었을지 실감할 수 있다. 20여 년 세월을 엘리자베스 여왕의 감시 아래 살다 끝내 참수당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자취가 있고, 스코티시 민족이 겪어 온 수백 년 전쟁과 평화의 흔적들이 성 전체를 촘촘하게 메우고 있다.

역사가 있는 중세의 여느 도시가 그렇듯, 에든버러도 신시가와 구시가로 나뉜다. 에든버러 성에서 내려다 볼 때 북해 바다 쪽으로 넓게 펼쳐진 지역이 신시가이다. 성을 내려오면 동쪽으로 곧게 구시가, 올드타운이 펼쳐진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여름 휴양지라는 홀리루드 궁전까지 옛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은 옛날에 귀족들만 다닐 수 있다 해서 이름이 '로열마일Royal Mile'이다. 구시가의 도심으로서 총 길이가 1.6킬로미터이다. 서양의 길이 단위 ‘마일’의 근원이 된 거리이기도 하다.

길 양편으로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고 동양인 서양인들이 각기 저마다의 모습으로 거리를 누비거나 야외 카페에 앉아 중세 도심의 오후를 즐기고 있다. 옛길이지만 좁지 않고 묵직한 느낌을 자아내는 번화가이다. 옛 왕국 시절의 고풍스러운 중세 건물들이, 상가나 박물관 등의 명소로 탈바꿈하여 1마일 거리를 메꾸고 있다. 우리 서울의 인사동과 명동을 합쳐 놓은 듯한, 옛날과 오늘이 공존하는 분위기이다.

에든버러 시내 전체를 조망하기엔, 해발 133미터의 에든버러캐슬 보다는 낮지만 칼튼힐이 적격이다. 구시가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신시가라는, 별일도 아닌 일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칼튼힐은 신시가의 동쪽 끝에 자리한 높이 110미터의 드넓은 잔디 언덕이다. 서쪽으로 에든버러 성이 장엄하게 버티고 서 있고, 북쪽으로는 리스 항에 정박 중인 배들까지 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아더왕 의자 절벽과 홀리우드 궁전 건물들이 모두 우아하면서 육중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칼튼힐의 가장 높은 곳에 서있는 32미터 넬슨기념탑에 오르면 이런 정경들이 더 다이내믹하다.

시내 전체의 파노라마를 한 눈에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칼튼힐을 깊이 인상지우는 건 폐허의 잔재처럼 보이는 거대한 신전 기둥들이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네 개의 면 중에 한쪽 면 기둥들만을 옮겨다 놓은 형상과 똑 같다. 내셔널 모뉴먼트, 나폴레옹 전쟁에서 희생된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짓다가 예산 문제로 중단됐다 한다. 완공된 신전보다는 120여 년 세월을 버텨온 지금의 폐허의 모습 그대로도 장엄해 보인다.

칼튼힐을 내려와 웨이벌리 역 앞을 지나면 나폴레옹을 이긴 또 한사람의 영웅과 만난다. 엘바 섬을 탈출해 황제에 복귀한 나폴레옹을, 워털루에서 세인트 헬레나로 영원히 보내버린 웰링턴 장군이다. 태양이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있게 한, 바다와 육지의 두 영웅을 한 시간 간격으로 만난다.

에든버러 교통의 중심, 웨이벌리 역 바로 옆에 '아이반호'로 유명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월터 스콧 기념탑이 웅장하게 솟아 있다. 두 전쟁 영웅의 기념탑과 동상에 비해 문인 한 명을 위한 기념탑 규모가 대단한 데에 놀랄 수도 있다. 두 영웅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출신이고 기념탑의 주인공은 에든버러를 대표하는 문인이기 때문이다. 300여 개의 좁은 계단을 걸어, 61미터 높이의 탑을 오르면, 칼튼힐과는 또 다른 도심 정경이 드러난다. 탑의 서쪽으로 프린세스 스트리트 공원을 따라 길게 걸어본다. 오른쪽으로 에든버러 신시가의 활기를, 왼쪽으로는 구시가의 정취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를 처음 여행한다면 대개 런던 등 잉글랜드의 대도시에서 출발하여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온다. 스코틀랜드의 최대 도시 글래스고와 옛 수도였던 에든버러, 두 곳만을 둘러보는 최소 여정은 3,4일이다. 일주일 이상이라면 에든버러, 하이랜드, 스털링, 글래스고 순으로, 또는 그 역순으로 둘러볼 수 있다. 특히 하이랜드는 광활한 지역이지만 당일치기 10시간 버스 투어도 있고, 1~3일 투어 등 다양하다.

스코틀랜드 면적은 잉글랜드의 60% 수준이지만 인구는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황량하고 거친 환경조건임을 의미하지만, 하이랜드 같은 광활한 대지가 거의 오염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하룻만에 스코틀랜드의 모든 걸 느끼고 싶다면 어디를 가야 할까? 물론 하이랜드도 아니고 글래스고도 아니다. 누구나 예상하듯 수도 에든버러를 봐야 한다.

하루의 시간도 없고, 단 서너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에든버러 캐슬에 올라 세 시간 둘러보고 내려와 로얄마일 거리를 한 시간 정도 배회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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