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강광일/ 前 서울제주도민회 상근부회장

제주도는 ‘바람, 돌, 여자’가 많은 삼다(三多)의 섬이라고 하는데, 오래 전 제주도 구석구석을 탐방했던 어떤 유명 인사가 또 다른 삼다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뭐냐고 했더니, 제주도에는 학교가 많고, 비석이 많고, 노래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면적이나 인구에 비해 제주도는 육지의 어느 지역 보다 학교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육지에서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가 리(里) 단위에서는 거의 없었고, 면(面) 단위로 가야 겨우 1개교 있을 정도인데 비해 제주도에는 리에도 초등학교가 있었습니다. 그 뿐인가요. 중학교까지 있는 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정부에서 특별히 제주도에 학교를 많이 세워 준 덕분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향학열이 대단히 높았던 제주인의 특성과 출향인, 특히 제주 출신 재일교포들의 애향심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제주의 선조들은 타향에 나가 돈을 벌고, 일가를 이룬 후에 고향을 위해서 하는 일 중에 가장 보람있는 일로 여겼던 것이 후학 양성이었습니다. 장학회를 만든다든가 학교를 세워 기증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독지가(篤志家)들이 세운 학교가 제주에는 유독 많았습니다. 옛 제주 출신들이 비교적 학력이 높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할 것입니다.

또, 제주도의 어느 마을에서는 해마다 특정 공유 해역을 할당하여 그 곳에서 채취하는 일체의 어획물 수입을 학교 운영비로 충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열악했던 중앙 정부나 지역 공공 기관의 지원에 의지하기 보다는 마을 공동체가 나서서 어린 후진들의 장학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당연히 학생 수와 학교 수가 늘어날 수 밖에 없지요.

제주도에는 비석이 정말 많습니다. 길거리(路) 이름으로 ‘비석거리’가 있을 정도이고, 묘지에는 웬만하면 비석을 세웠습니다.

조상의 묘지에 비석을 세우는 것은 끼니를 거르는 곤궁 속에서도 집안의 지상(至上) 과제였으니까요.

학교라든가 공공시설 주위에는 그 시설을 만드는데 기여한 사람을 기리는 공덕비나 송덕비, 또는 추념비를 꼭 세웠습니다. 이는 제주인의 수준 높은 역사 인식과 기록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도에는 노래가 참 많습니다. 대부분의 노래는 다름 아닌 노동요(勞動謠)를 말합니다.

그 옛날 제주의 세찬 바람과 거친 바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려면 손발이 닳고 어깨가 짓무르도록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배를 띄워 노를 저으면서 부르는 ‘이어도 사나’, 소나 말을 몰면서 부르는 말테우리 노래, 애기구덕을 흔들면서 부르는 노래, 조밭 밟으며 부르는 노래 등 우리 선조들은 노동의 고단함을 잊으려고, 시름을 달래려고 수없이 많은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그 질박한 노랫말과 간결한 곡조 속에 신세를 한탄하면서 질곡의 세월을 표현하는가 하면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과 꿈, 희원(希願)을 담았습니다.

이제 세상이 너무 변해서 안타깝게도 ‘학교, 비석, 노래’의 삼다뿐만 아니라 ‘바람, 돌, 여자’의 삼다나 ‘대문, 거지, 도둑’ 삼무(三無)가 날이 갈수록 무색해지고, 퇴색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삼다삼무 정신은 제주의 역사와 함께 정체성으로서 제주인의 가슴깊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제주에는 또 다른 삼다가 있다고 누군가 말합니다. 눈 많고, 관광객 많고, 인물이 많다고.

제주에는 아직도 많은 것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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