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슬픔을 아는지 젖어 있는 아침

비와 바람, 진눈깨비를 동반한 매서운 겨울추위를 느끼게 하지만

제주4.3사건의 어둡고 추웠던 기억만큼이나 할까?

학살과 강요된 침묵, 그리고 울음마저도 죄가 되었던 암울한 시대

고문 휴유증으로 감옥에서 죽어 나가고

70여 년이 지났지만 살아 남은 사람들은 4.3의 기억으로 북촌리를 살고 있다.

 

널찍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지형을 뜻하는 '너븐숭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너븐숭이 4.3기념관은

제주4.3사건 당시 하루에 가장 많은 희생이 있었던 북촌리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4.3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영상물을 관람하고

위령비, 희생자 각명비, 순이삼촌비, 애기무덤, 방사탑 등

4.3사건 유적지와 관련 장소들을 둘러 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활동할 수 있는 젊은 남자,

어머니를 따라 나선 어린아이와 집에 있다 불에 타 죽은 노인들까지

마을 인구 천여 명 중 1/3 가량이 희생된 북촌마을

제주4.3이 70주년을 앞두고 있다.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4.3관련 영상물 관람 후 4.3해설사 이상언선생님의 해설을 시작으로

북촌마을 4.3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본다.

북촌 해동마을 서쪽편에 가로누운 서모오름

서모오름(서산)은 봉우리를 기점으로 동쪽은 북촌리, 서쪽은 함덕리이다.

에머랄드빛 바다와 어우러져 해안가에 자리잡은 서모오름은

조선시대 서산봉수대가 있었고 일제의 상처인 진지동굴 20여 개가 있다.

다려도와 너븐숭이 4.3기념관, 마을 전경 등이

4.3의 아픈 역사와 북촌리의 희로애락을 한아름에 보듬어 안은

우리에 어머니의 품과 같은 오름이다.

북촌마을 주민들은 이 오름이 본래의 이름을 찾아서 서산이나  

서모오름, 서모봉으로 불려지길 기대한다.

몬주기알 절벽 아래에는 입구는 작지만 내부가 비교적 넓은 천연동굴이 있는데

4.3당시 북촌주민들과 함덕주민들이 숨었던 장소로

썰물일 때 해안가로 접근이 가능하다.

 

서모오름 정상에서 바닷가로 향한 해안절벽에는

세찬 바닷바람을 이겨내며 강한 생명력으로 잘 버텨내는

상록의 도톰한 잎사귀를 달고 한쪽으로 쏠린 우묵사스레피나무가

숲터널을 이루고 있어 어둡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태평양전쟁 말기(1945년) 일본군이 결7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북촌리 서모봉 등사면에 인근 마을주민들을 동원하여 만든 대장굴, 탄약고, 왕(王)자형 진지동굴과

어뢰정용 진지동굴 등 20여 개가 있으며 상태가 양호하다.

가장 접근하기 좋은 진지동굴은 굴 입구가 3개인데 내부가 연결된 왕(王)자형으로

마을사람들은 '삼형제굴'이라고 부른다.

비취빛 물결 영롱이는 해동마을

해동은 북촌리 설촌의 원류이며 서모오름 기슭에

삶의 터전을 이룬 전형적인 반농반어 마을이다.

서북풍을 막아주는 서모오름과 풍부한 수산자원의 보고인 다려도가 있어

천혜의 자연조건을 지닌 곳으로 자연적인 포구가 발달하였다.

 

오랜 설촌 역사와 수려한 자연과 문화를 지닌 북촌마을

동쪽은 동복리, 서쪽은 함덕리, 남쪽은 선흘리와 인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해안을 끼고 해동, 본동, 한사동, 억수동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바위섬 '다려도'를 품은 유서 깊은 마을이다.

명절처럼 제사를 한 날 한 시에 지내는 북촌마을은

4.3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간다.

마을 뒤, 또는 북쪽에 있는 포구라는 의미로

뒷개라 불렀으며 한자로 표기하며 북포(北浦), 북촌(北村)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신석기시대의 바위그늘 유적지인 고두기엉덕,

해안가의 환해장성, 마을 포제와 영등굿의 세시풍속을 보존 계승하고 있는

전통있는 마을로 용천수가 풍부한 반농반어의 마을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앙상한 나뭇가지와 벽화 속 동백꽃이

4.3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듯 뭉클해진다.

예전에는 용출량이 많아 해동 주민들이

식수 및 빨래터로 이용하였지만 주변 영향 등으로 인해 용출량이 현저히 줄었다.

일제진지동굴 구축 시 일본군 대장이 먹었다 하여 '장군물' 이라고도 불린다.

북촌 본동과 해동 사이 바닷가에 있는 개(포구)를 말한다.

북촌 환해장성은 고려시대부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계속 축성하였으며

왜구 등 바다로부터 오는 적의 침범을 막기 위한 시설이었다.

북촌 본동 서쪽에 있는 용천수로 용출량은 많지 않지만

꾸준히 솟는 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집수, 보호시설이 되어 있어

식수와 생활용수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바다가 그리웠을까?

손바닥선인장의 보라빛 열매가 잠시 쉬어가게 한다.

가릿당은 북촌마을의 본향당으로

이곳의 신들은 북촌마을 사람들의 삶과 죽음, 호적과 피부병,

육아, 해녀, 어선 등을 관장한다.

다려도를 품은 북촌마을

다려도는 3~4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무인도로

마을 해안에서 400여 미터 거리에 있으며  

풍부한 해산물을 제공해 주고, 다양한 철새들의 월하, 월동지로

북촌리 마을 자원을 대표하는 보물섬이다.

고지도에는 많을 '다', 올 '래', 돌이름 '여' 를 사용하여

'다래여(多來礖)'로 표기했다.

북촌마을 포구 서쪽 구짓머루 동산에 위치한 옛 등대로

이 곳 포구에 세워진 등명대는 속칭 '도대불'이라 한다.

바다에 나간 고기잡이배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1915년에 마을사람들이 세웠다. 

처음에는 솔칵으로 나중에는 석유 등으로 불을 밝혔다.

도대불 위에 세워진 비석에서 4.3의 흔적 총탄자국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무장대에 의해 경찰 2명이 희생되었던 4.3역사현장이다.

용출량이 풍부한 용천수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집수, 보호시설이 되어 있어 식수와 생활용수로 이용하였다.

조그만 용천수로 생이(참새)가 먹을 만큼 용출량이 적어 붙여진 이름이다.

중동 해안가에 있는 용천수로

용출량이 풍부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집수, 보호시설이 되어 있어서 생활용수, 여름에는 여자전용으로 이용되었다.

1949년 1월 17일 북촌학살 때 북촌초등학교에 모인 북촌주민들은

군인들에 의해 이 곳 '당팟'으로 끌려와 곧바로 총살 당했다.

당시 북촌학살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동쪽의 '당팟'과

서쪽의 '너븐숭이'로 나누어 이루어졌고

이곳 '당팟'에서는 10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마침 지나가시던 노인회장님...

대대장 차가 도착하여 총살 직전에 중지명령이 내려져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적으로 살아남으셨다는 얘기를 하셨다.

워낙 남자들이 귀한 탓에 노인회장님도 여자분이시라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신다.

정지퐁낭과 연못이 있어 조선시대 때 관리들이 쉬어가던 장소였다.

수령 약 800년 된 팽나무가 마을의 정자 역할을 하였지만

1958년 9월 태풍 '사라호'에 의해 쓰러져 다시 심었다.

제주목사 선정비에는 4.3사건 당시 총탄자국들이 선명히 남아 있다.

1947년 3.1사건이 발생한지 얼마 후

8월 13일 유인물을 붙이던 주민들을 향해 경찰이 발포하여

3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을 시작으로 1949년 1월 17일 너븐숭이 인근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의 습격으로 숨지자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북촌주민 3백여 명이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주변 들과 밭에서 집단 학살당하였으며

북촌리는 4.3사건의 최대 피해 마을 중 하나로

4.3사건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진 마을이다.

북촌리는 국제법상 전쟁 중일지라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집단학살의 대표적 사례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제주4.3의 최대 희생지인 북촌리민 대참사의 현장이다.

1949년 1월 17일 새벽....

너븐숭이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희생되면서 보복은 시작되었고

군인들은 집에 불을 지르고 군경가족과 민보단가족을 제외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한 사격으로

하루만에 300여 명의 아까운 목숨을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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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제주도민 3만여 명이 희생당하고 2천 5백여 명이 군사재판정에 섰던 사건이다.

그 날의 뼈아픈 고통을 생생하게 몸으로 기억하는 생존자들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70여 년이 되어가지만 애기들이 잠들어 있는 이름없는 '애기무덤'

장난감과 양말, 그리고 과자봉지...

애기무덤 주위로 활짝 핀 금잔옥대가 차갑고 어두운 땅 속을

밝혀주는 듯 잠시나마 위안이 되어준다.

1978년 가을~

4.3을 소재로 한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하면서

고초를 겪었던 제주출신 작가 현기영

 

조용한 대낮일수록 콩 볶는 듯한 총소리의 환청은 자주 일어난다.

너븐숭이 일대는 1949년 4.3사건 당시 443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

4.3의 아픔을 알리는 소설 '순이삼촌' 배경의 장소이기도 하다.

붉은 피로 상징되는 송이 위에 눕혀져 있는 비석들은 당시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 비석에는 사실에 바탕을 둔 소설 '순이삼촌' 구절들이 새겨져 있다.

'그 당시 일주도로변에 있는 순이삼촌네 밭처럼

옴팡진 밭 다섯 개에는 죽은 시체들이 허옇게 널려 있었다.

밭담에도, 지붕에도, 듬북눌에도, 먹구슬나무에도 어디에나 앉아 있던 까마귀들

까마귀들만이 시체를 파먹은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도 시체를 뜯어먹고 다리토막을 입에 물고 다녔다.

사람 시체를 파먹어 미쳐버린 이 개들은 나중에 경찰 총에 맞아 죽었지만

그 많던 까마귀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비문이 없는 비석에 비문이 새겨지고

누워 있는 비석도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해진다.

'옴팡밭'은 '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이라는 뜻이다.

4.3사건 당시 최대 인명피해로

기록되고 있는 1949년 1월 17일 북촌대학살 현장의 한 곳으로 

당시 이 일대에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작은 봉분은 당시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마을길을 걷는 내내 목이 메이도록 가슴 먹먹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아픈 고향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사진 한 장 없어 기억조차 없는 외가댁

'편가르지 말앙 살암시믄 살아진다.'

잃어버린 마을의 현재이면서 4.3의 잔상 퐁낭(팽나무)

차가운 바닥에서 붉은피를 토해내 듯 한번 더 피어나는 동백꽃

4.3의 영혼들은 붉은 동백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없이 스러져가고

젖먹이는 숨이 끊어진 어미의 피젖을 빨며 자지러지게 우는 잔상까지

시체로 산을 만들고 붉은 피로 바다를 이루며

북촌주민들의 처참한 학살과 처절한 삶, 그리고 비극적인 운명

시간이 지나도 맺힌 한은 쉽게 풀리지 않는 진실

그 연장선상에 아직까지 머물러 있는 듯 제주4.3사건은

제주지역의 문제이기 보다 양민 학살이라는 성격으로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어둡던 과거와 역사를 넘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상생의 길로 

수십년 동안 겪은 고통과 아픔을 풀어드리는 숙제가 남아 있다.

 

제주4.3길은 제주안덕 동광마을, 제주남원 의귀마을, 제주조천 북촌마을

제주표선 가시마을, 그리고 제주한림 금악마을에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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