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제주도민 가수 이효리씨가 나레이션을 맡아 세 편의 추모시, ‘바람의 집’, '생은 아물지 않는다',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를 낭송했다.(사진=제주특별자치도청 제공)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제주도민 가수 이효리씨가 나레이션을 맡아 세 편의 추모시 ‘바람의 집’, '생은 아물지 않는다',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를 낭송했다.

'바람의 집'은 이종형 시인의 작품으로 4월 제주에 부는 바람의 기원을 뼈아픈 역사인 제주4·3에서 찾는다. 봄철 아름다운 섬 제주의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고통스런 역사를 오래된 신음 같은 바람에 빗대 형상화했다.

이산하 시인의 시 '생은 아물지 않는다'는 세상과의 대결을 통한 상처를 우선 드러낸다. 그리고 세상과의 대결이 이뤄지지 않고 타성에 젖게 될 때 결국 자기 자신을 '베는' 민감한 화자의 진술로 이뤄진 작품이다. 무엇에 민감하달 수 있을까. 생에 대한 감각이 아닐까.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는 김수열 시인의 작품이다. 선흘리 불칸낭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에서 화자는 견디기 어려운 상처들을 이겨내고 삶을 이어가는 강인한 생명력을 갈구한다. '불칸낭'은 불에 탄 나무를 일컫는 제주어다. 4·3 당시 군경이 초토화작전으로 선흘리에 불을 질렀을 때 불에 타고도 살아 남은, 수령 500년이 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후박나무다.

 

바람의 집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 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生은 아물지 않는다

-이산하

 

평지의 꽃

느긋하게 피고

벼랑의 꽃

쫓기듯

늘 먼저 핀다

 

어느 생이든

내 마음은

늘 먼저 베인다

 

베인 자리

아물면,

내가 다시 벤다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김수열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천둥 번개에 놀라 이리 휘어지고

눈보라 비바람에 쓸려 저리 휘어진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나이테마다 그날의 상처를 촘촘히 새긴

나무 한 그루 여기 심고 싶다

머리부터 어깨까지 불벼락을 뒤집어쓰고도

모질게 살아 여린 생명 키워내는 선흘리 불칸낭

한때 소와 말과 사람이 살았던,

지금은 대숲 사이로 스산한 바람만 지나는

동광리 무등이왓 초입에 서서

등에 지고 가슴에 안고 어깨에 올려

푸르른 것들을 어르고 달래는 팽나무 같은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허리에 박혀 살점이 되어버린 총탄마저 보듬어 안고

대창에 찔려 옹이가 되어버린 상처마저 혀로 핥고

바람이 가라앉으면 바람을 부추기고

바람이 거칠면 바람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봄이면 어김없이 새순 틔워 뭇새들 부르고

여름이면 늙수그레한 어른들에게 서늘한 그늘이 되는

그런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푸르고 푸른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내일의 바람을 열려 맞는 항쟁의 마을 어귀에

아득한 별의 마음을 노래하는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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