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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훈] 내 고향 제주의 추억-나무 이야기이 훈/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
제주투데이 | 승인 2018.04.06 07:34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 훈/ 제주출신으로 제주일고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리가 다 아는 정지용의 「향수」는 고향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에게 절하기 전에 만나게 되는 주위의 풍경에서부터 노래를 시작한다. 나도 그런 수법을 응용해서, 반갑게 나를 맞아 줬던 고향 집과 그 주위의 나무부터 살피고 싶다.

먼저 비파나무. 남해안 지방에도 이 나무가 보이는데 제주도의 것은 그 종이 다르다고 해도 좋을 만큼 알이 굵고, 껍질을 벗기면 단물이 질질 흐를 정도로 달았다. 이 과일은 보리를 거둘 즈음에 붉은 기운이 연하게 감돌면서 노랗게 익는다. 그 색깔이 참 아름답다. 이렇게 쓰고 나면 이 시기의 별미인 자리물회가 저절로 떠올라 침이 고이지만, 여기는 이 음식을 얘기할 자리가 아니므로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 집 비파나무는 그 모양이 옆으로 좍 펴진 데다가 잘 휘어지는 가지가 워낙 빽빽해서 높이 올라가 열매를 따다 발을 헛디뎌도 괜찮았다. 놀이터로서 안성맞춤이었다. 거기다가 멀리서도 보기가 참 좋았다.

그런데 이 나무를 오래 전에 베고 말았다. 외할머니가 어디서 들었는지 울타리 안에 있으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무 하나 죽이는 일이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 나무가 없어지니까 많이 속상했다. 보기 좋은 모습도 모습이지만 다디단 비파를 더는 먹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기는 이 나무만 없앤 건 아니다. 울타리가 꽤 넓어서 토종 감나무도 많았는데 여러 채의 초가집을 헐어 집을 새로 짓고 나머지 땅에는 귤을 심는 바람에 다 자르고 말았다. 지금이었다면 적극적으로 반대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소중한 줄을 미처 몰랐다.

쭉쭉 하늘로 높게 뻗어가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느티나무 두 그루는 귤나무에 그늘을 만든다고 가지를 잘리는 통에 키만 훌쩍 커서 볼품이 없는 채로 지금도 서 있어, 다행이기는 하지만 마음이 안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나무 앞에 서면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겠다고 다짐하지만 행하기가 쉽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 위주로 자연을 대하는 행태가 싫고 무섭다. 4대강 사업도 이런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왜 강을 구불구불 흘러가게 그대로 두지 못하는가. 이제라도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나무를 얘기하자면 팽나무(폭낭)를 빼서는 안 된다. 느티나무처럼 키가 크고, 품이 넓어서 정자나무로 그만이다. 느티나무는 이제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어서 아는 사람이 많은데, 팽나무는 육지에서는 남쪽 지방에서만 자라서 그런지, 잘 모른다. 사전을 찾아봤더니 둘은 같은 과다.

팽나무는 느티나무보다 훨씬 더 친숙하다. 동네 삼거리라고 할 만한 동산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나무 밑이나 주위가 어렸을 적의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작지만 좁쌀보다는 큰, 전체적으로 노란 데다 붉은 기가 도는 그 열매(‘폭’)를 따서 먹었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어린아이 특유의 호기심이나 그에서 말미암은 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소한 그 맛을 보려면 나무에 올라가야 했다. 나무를 잘 타는 아이들은, 워낙 커서 하늘 끝에 닿을 것 같은 꼭대기까지 오르곤 했다. 겁쟁이라 낮은 데서만 놀았던 나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다리가 다 떨려서 위는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물속은 내 세상 같은데 공중은 지금도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다.

아마 요즘 아이들은 그 열매를 먹기는커녕 입에 대 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짐작대로였다. 고향에 가 보면 손이 닿는 가지에도 열매가 그대로 있다.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 있어서 맛도 못 느끼거니와 워낙 먹을 게 널린 세상이라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그 조그만 열매에는 눈이 갈 리가 없다.

더구나 나무에 오르는 일은 생각도 못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과보호하는 것이 버릇이 된 부모들이 위험한 짓을 한다며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떨어지고 상처를 입고 하면서 크는 건데, 그런 세계는 이제 영영 과거의 일로만 남아 있게 되어 버렸다. 대신에 안전한 놀이터에서만 놀게 되었다. 아니, 밖에서 놀리기만 해도 다행이다. 그러려고 해도 같이 놀 아이가 없다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부모들은, “놀지 않고 공부만 하는 아이는 바보가 된다”는 외국의 그럴듯한 격언을 못 들은 척하고 있다.

밤에도 저 팽나무 아래에서 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안된 일이지만, 어른들이 그늘이 지는 자리를 아예 시멘트로 발라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여름에는 거기서 자는 어른도 있었다. 덩달아서 우리도 늦게까지 놀 수 있었다.

다 자기 시절을 아름다운 시간으로 기억하고 또 그래야 할 권리도 있겠지만, 요즘 아이들에 비해서 우리 어린 시절이 아주 행복했다는 것이 낡은 세대 위주의 생각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무엇보다도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마음껏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들르면 이 나무를 꼭 둘러보곤 하는데 해마다 늙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몇 백 살을 먹었으니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버팀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에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게 작아졌다는 느낌도 사람을 쓸쓸하게 만든다.

내가 그만큼 컸다는 이야기도 되겠지만 아끼는 것이 거쳐야 할 필연의 길, 죽음을 예감하도록 이끌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와 더불어 오래된 것들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인다. 나무 아래서 밤늦도록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더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팽나무는 우리 동네의 상징이다. 저 나무가 죽으면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내가 고향을 떠나 있어서 언젠지는 모르지만 시멘트를 걷어 내서 나무가 숨을 쉴 수 있도록 해 놨다는 것이다. 나무가 얼마나 시원해했을까!

지난번에 도보로 여행하면서 나무 그늘에서 쉬거나 한낮에는 나무로 지은 정자에서 낮잠을 달게 자기도 했다. 위와 아래, 사방으로 통하는 바람을 맞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싶었다. 이런 데서 자는 잠이야말로 휴식(休息)의 본질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느낌일 것이다.

‘쉬다’라는 ‘休’' 자는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나무의 그늘 아래서 편안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 나무를 통하여 나의 몸은 대지와 그리고 하늘에 연결된다. 휴식이란 이처럼 대우주와 통하는 일이다.(츠지 신이치, 권희정 옮김, 󰡔슬로우 이즈 뷰티플󰡕, 빛무리, 2003, 168쪽.)

이렇게 지극한 행복을 느꼈던 것은 공간적으로 나무가 나를 하늘과 사방에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팽나무 밑에서 즐겁게 놀았던 내 어린 시절로 나도 모르게 데려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나무가 내 다음 세대보다도 훨씬 오래 살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마지막으로 귤나무. 이제 제주 사람에게는 이 나무를 빼면 추억이 완성되지 않는다. 꼴밭(촐왓)을 개간하여 일본에서 수입해 온 나무를 심고 물을 주고자 소가 끄는 수레에 드럼통으로 물을 나르곤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참 많다. 그렇지만 다 아는 나무라 여기서는 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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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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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백나무 2018-04-15 20:53:42

    과거에는 참 많은 종류의 나무가 주위에 있었는데 도시에 사는 요즘에는 나무 보기가 쉽지 않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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