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평화기념관에 20년 가까이 누워있는 백비를 세워야 한다.”

1947년 3월 1일. 북초등학교에 해방 이후 최대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들은 남북이 분리되지 않는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며 미군정이 몰려나라고 소리쳤다. 이날 한 어린이가 경찰의 기마 발굽에 치였다. 이에 분개하며 경찰에 항의하던 도민을 향해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사망했다. 이날 사건은 이듬해 발생한 4·3항쟁의 불씨가 되었다.

바로 그 북초등학교에서 오늘(4일) 오후 4시, 뜻 깊은 자리가 마련됐다. '김석범을 만나다, 4·3 70년을 말한다'. 평생을 문학을 통해 4·3을 증언한 김석범 소설가는 이날 4·3의 원인과 경과, ‘4·3의 완전한 해결’의 의미를 짚었다. 김석범 작가는 짧은 시간 동안 줄곧 4·3의 원인과 경과를 되짚어보고자 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4·3해결’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를 맡은 김동현 문학평론가의 말대로 오늘 강연은 김석범 작가 하고 싶은 얘기, 70년 동안 못해왔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대담자로 나선 이석문 교육감도 김석범 작가의 얘기에 가만 귀를 기울였다. 깊은 통찰이 담긴 노작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귀 기울여 듣던 청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작가 특유의 결기가 서려있는 발언에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회자는 김석범 작가가 전날 저녁 백비에 ‘4·3민중항쟁’이라는 글귀를 새겨 정명비로 세운 퍼포먼스를 보면서 통곡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물었다. 김석범 작가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눈물이 쏟아졌다.”며 “과격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옛날부터 혁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석범 작가는 4·3평화기념관에 놓여진 백비를 세우지 않으면 한국을 찾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4·3 정명은 작가의 숙원이다.

“4·3평화기념관의 백비는 세워야 한다. 20년 가까이 누워 있다. 비석은 실내에 안치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을 맞고 햇볕에 쪼여야 한다. 4·3이 죽었나? 살아났다면 살아난 증거로 비석을 세워야 한다. 이번 퍼포먼스로 여하간 실현됐다. 역사적인 일이다.”

4·3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白)

김석범 작가는 더 이상 백비가 아닌 ‘정명비’라 불리길 바란다고 밝혔다. 4·3의 정명은 이제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후세대가 당면한 과제로 던져졌다. 이는 시민사회에서도 제기해오고 있는 요구다. 4·3희생자유가족회도 4·3민중항쟁으로 정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학계 등 4·3 관계기관 들은 아직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4·3의 정명을 위한 논의가 보이지 않는다.

 

○ "4·3은 ‘기억의 말살’로 인해 말도 못하고 들을 수도 없었던 세계에 없는 역사"

김석범 작가는 제주4·3이 70년이 지나도록 해결이 되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 ‘기억의 말살’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억의 말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막강한 권력에 의한 기억의 말살. 기억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들의 이름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다. ‘산죽음’ 그것이 제주도 도민이요, 그리고 기억말살의 방법이 두려워서 도민 스스로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 나는 그것을 기억의 자살이라고 부른다. 우선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자연히 제주도민은 (4·3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 세계에 이런 역사가 없다.”

친일·친미 세력을 기반으로 들어선 이승만 정권, 군부정권이 ‘기억의 말살’하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제주도민 스스로가 당시 기억을 묻어두려고 하는 ‘기억의 자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김동현 문학평론가는 “김석범 선생은 소설을 통해서 그 기억의 말살에 저항해왔다.”고 그의 삶과 작품의 의미를 전했다.

 

○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이 말을 하면 눈물이 나”

김석범 작가는 4·3의 원인과 경과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4·3 해결’이라는 말의 뜻은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사과와 보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는 ‘4·3 해결’을 넘어 ‘4·3해방’, ‘4·3역사의 자리매김’을 말했다. 그리고 4·3은 제주도 내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바깥에서 온 이들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미국과 이승만 정부를 직접 겨냥한 것이다.

“4·3 해결을 포함해서 4·3의 ‘해방’은 4·3역사의 자리매김이다. 4·3 원인이 제주도에 있는 것은 아니다. 1948년 4·3이 일어나던 당시 수립된 이승만 정부(1948년 8월 15일 수립)는 정통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이승만은 대통령을 참칭했다.”

“친일파의 문제다. 이승만 정부는 정통 정부가 아니다. 이승만이 거짓 헌법을 만들었다. 중경의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 것이 무엇이 있나. 앞으로 역사가들도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부재)에 대해 언급할 때가 있을 것이다.”

김석범 작가는 극심한 국론분열을 뒤로 하고 친일세력이 남한 단독선거를 강행해 4·3 직후 들어서게 된 대한민국 1공화국 자체의 정통성을 부정했다. 당시의 대통령 선거가 과연 공정했다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이와 같은 역사적 문제들을 정리하고 제대로 자리매김토록 해야 4·3해결, 4·3해방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그는 “민주주의조선임시정부. 이 말을 하면 눈물이 난다.”고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김석범 작가가 말한 ‘민주주의조선임시정부’의 정확한 명칭은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다.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는 실제로 존재한 적은 없다. 1945년 발표된 영국, 소련, 미국 외상의 모스크바 회의(3상회의)의 결정서 상에만 존재한다.

회의 결과에 대해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의 오보를 낸다.(오히려 미국이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반탁운동이 벌어졌고 해방공간에서 권력을 놓지 않으려던 친일세력들이 반탁 운동에 가세하며 반소련, 반공산주의 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친일세력이 ‘친미’로 그리고 ‘반공주의 애국자’로 가면을 바꾸게 된 것이다.

문자로만 존재하는 남북이 하나가 된 정부. 김석범 작가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석범 작가는 북한을 배제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운동에 전면으로 나선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미국의 앞잡이”라고 줄곧 비판해 왔다.

모스크바3국 외상회의 결정서

Ⅲ .한국

1. 조선을 독립국으로 부흥시키고 조선이 민주주의 원칙 위에서 발전하게 하며 장기간에 걸친 일본 통치의 악독한 결과를 신속히 청산할 조건들을 창조할 목적으로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창설한다. 임시 정부는 조선의 산업, 운수, 농촌경제 및 조선 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필요한 방책을 강구할 것이다.

2. 조선 임시 정부 조직에 협력하며 이에 적응한 방책들을 예비 작성하기 위하여 남조선 미군 사령부 대표들과 북조선 소련군 사령부 대표들로써 공동 위원회를 조직한다. 위원회는 자기의 제안을 작성할 때에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들, 사회단체들과 반드시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문은 공동 위원회 대표로 되어 있는 양국 정부의 최종적 결정이 있기 전에 미⋅소⋅영⋅중 각국 정부의 심의를 받아야 된다.

3. 공동 위원회는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참가시키고 조선 민주주의 단체들을 끌어들여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또는 조선국가 독립의 확립을 원조 협력(후견)하는 방책들도 작성할 것이다. 공동 위원회의 제안은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 후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조선에 대한 4개국 신탁 통치(후견)의 협정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소⋅영⋅중 각국 정부의 공동 심의를 받아야 한다.

4.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여러 문제를 심의하기 위하여 또는 남조선 미군 사령부와 북조선 소련군 사령부의 행정⋅경제 부문에 있어서의 일상적 조정을 확립하는 제방안을 작성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 양국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출처: 김남식 외, 『한국현대사 자료 총서』 : 1945-1948. 10-15(단행본 편 제3부, 제1-6권 v.13, 돌베개,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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