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로부터 임형묵, 엄문희, 이지윤 씨.

 '이주민'들은 제주4·3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제주를 사랑해서 삶의 터를 제주로 옮긴 이들이 있다. 요새는 '이주민'이라는 말을 쓴다. 이 표현은 '이주민' 입장에선 때론 또 하나의 벽을 세우는 딱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제주 말고는 국내 타지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그러나 딱히 다른 적절한 용어가 없는 것도 현실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성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조금 다른 위치에서 현상을 관찰할 때 새로운 문제가 발견되기도 하는 법이다. 사랑해서 찾아온 제주. 그러나 그 어느 지역보다 큰 고통을 겪었던 제주를 알고 느낀 이주민 세 사람에게 4·3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강정마을에서 ‘갤러리 살롱 드 문’을 운영하는 엄문희 씨

엄문희 씨

제주로 주소를 옮긴 지 만 2년 됐다. 2016년 3월초에 왔다. 4·3이라는 중요한 역사를 학교 교과서가 아닌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알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 후 대학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언뜻언뜻 마주 칠 때가 있었다. 제주에 가면 언젠간 4·3평화기념관에 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14년 여름 제주에 여행 왔을 때 4·3평화기념관에 갔다. 처음엔 두 시간만 있다 나올 생각이었다. 문을 열 무렵에 들어갔는데 오후 문 닫을 때가 되어서 나왔다. 해설사에게 혼자여도 해설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 분이 정말 성실하게 이야기 해줘서 놀랐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하나도 빼지 않고 정말 열심히. 태풍 끝 무렵이어서 비가 많이 왔지만 묘역 등도 돌아다녔다. 각명비, 행불자묘역 등을 보면서 혼자 엉엉 울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깊은 잠에 들었다.

그 후로 내게 제주는 이전의 제주일 수가 없었다. 다음엔 어딜 가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주 어디든 아픔이 서려있단 실감이 들어서 함부로 아름다움만 소비할 수는 없었다. 제주를 대하는 전과 다른 태도를 갖게 되었다.

4·3을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70년간 지속된 일이다. 물론 4·3 당시 희생된 분들과 그 가족의 고통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얼 했던가 생각하게 된다. 제주도민들이 기어이 국가의 책임을 묻고 물어서 사과를 받아낸 것을 정말 대단하게 생각한다.

4·3이 일어난 이유가 전율스럽다. 그 이유를 꾸준히 이야기 하면 좋겠다. 어쩌면 국가는 그냥 ‘학살’로 보는 쪽이 좋을지 모른다. 4·3을 통해 제주의 현재를 얘기해야 하는데 그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그런 논의를 본 기억이 없다.

눈 밝히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가폭력을 바라보며 ‘지금 여기’를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제주를 평화의 섬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으로 4·3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곳에서 군사기지가 확대하려는 것은 분열적이고 이율배반이다. 이름뿐인 평화의 섬. 그게 제주의 진짜 비극이고, ‘지금 여기’의 4·3이다. ‘강정은 4·3이다’라는 말은 그래서 옳다.

 

―다큐멘터리 감독 임형묵 씨

임형묵 씨 

2009년 1월 제주로 이사 왔다. 4·3은 그저 막연히 해방직후 좌우익의 충돌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민간인을 많이 죽인 사건 정도로만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관심도 별로 없었다. 관련 뉴스나 기사를 보게 될 때 그저 “이승만 나쁜 놈”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2008년 제주에 머물 때 마침 ‘지슬’의 원작 격인 ‘끝나지 않은 세월’을 만든 고 김경률 감독 3주기를 맞아 상영회를 했는데 그 때 그 영화를 보고 제주인에게 4·3이 갖는 무게감을 느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예술인들이 그 이야기를 표현해야 한다는 의지와 의무감을 갖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또 제주의 삶이 해를 거듭하며 자연스럽게 4·3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됐다. 그 당시 있었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면서 매년 거듭되는 ‘화해와 상생’이란 말이 허망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 가장 큰 적폐는 이념 논쟁이었다. 그것에 종지부를 찍을 가장 확실한 방법은 통일이라고 생각한다. 4·3 70주년에 즈음하여 남북 간 획기적인 화해무드를 바라볼 때 가슴이 벅차다. 진정한 화해와 상생은 제주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가 함께해야 이뤄지지는 것이다.

4·3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 또는 집단 모두 반성은커녕 상대에게 책임을 떠밀 뿐인 현실에서는 화해와 상생이 이루어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함에도 일본이 전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4·3이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선 제주도의 차원이 아닌 민족적 관점에서 냉정하게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아볼 수 있는 탈이념적 관점이 필요하다. 여전히 4·3이 공산주의자의 폭동이다 아니다 논쟁하는 것을 보며 우리 사회는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진 이념의 망령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 한 것 같아 안타깝다.

촛불로 세워진 정부에서 4·3 70주년의 의미는 여느 해보다 크다. 지금이야말로 4·3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원인과 과정을 규명하고 그 성격을 규정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다양한 행사와 홍보로 인해 4·3의 인지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고 그 안에서 자연스레 여러 목소리가 나오게 된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올해 많은 행사를 치르다보니 이후에 혹여 텅 빈 상태가 되면 어쩌나 우려도 된다. 아무쪼록 70주년이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닌 더 많은 논의와 연구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제주도민들에게 말로 할 수 없는 많은 고통과 트라우마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젠 하나의 민족으로 또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주민이나 타 지역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뭘 알겠냐?”는 식으로 벽을 만들지 말고 더 알도록 가르치고 이해시켜주면 좋겠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듯 4·3은 아직 진행 중이다. 도정은 4·3을 도정홍보나 선거운동의 기회로 여겨선 안 된다. 오로지 희생자와 유가족 및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듬고 유해발굴 등 진상 규명에 힘쓰길 바란다.

 

―남원 위미리에서 독채민박 '스테이 마중'을 운영하는 이지윤 

이지윤 씨

제주엔 2012년에 왔다, 4·3은 교과서 한 줄 내용만으로 기억되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제주로 이주해 온 무렵 '지슬'이란 영화를 보았다. 그때 4·3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 후 4·3평화공원에 가고 올레길을 걸으면서 4·3 유적지를 지나면서 4·3을 더 알게 되었다. 많이 아팠다. 친구들과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4·3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게 되었다. 제주도민으로서 4·3을 인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제주에 와서 꾸준히 4·3에 관심을 갖고 아파하고 4·3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개인적인 노력을 했다. 제주가 좋아서 제주에 살다보니 제주가 아파서 제주의 아픔을 같이 느끼고 치유하는 데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올레길에 있는 4·3유적지는 다 가봤다. 위미리와 남원에 있는 유적지, 의귀리 송령이골 등도 가봤다. 살고 있는 동네 유적지는 군경, 서북청년단 등 토벌대에 의한 곳이 아니라 무장대에 의한 피해가 있었던 곳이었다. 또 다른 아픔이었다.

4·3에 무관심한 도민들이 많은 것 같다.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쉬쉬하는 분위기도 여전한 것 같다.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이제는 아픈 역사를 직면하고 제주를 치유와 평화의 공간으로 만들어 상생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모색했으면 좋겠다.

70주년을 맞이해 많은 행사들이 진행되며 많은 사람들에게 4·3을 알리는 계기가 된 것 같다. 하지만 도에서 그 의미와 진상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기보다는 하나의 축제나 상품처럼 소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다.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