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길현 교수/제주대학교 윤리교육과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고 제주미래담론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 가톨릭과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성녀이다. 그 분의 미묘한 위상과 평가 때문에도 구설수에도 많이 오른 성녀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는데, 엊그제 가까스로 시간 내어 영화를 보았다. 영화관에서 받은 홍보물에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로서의 막달라 마리아를 그리는 영화라고 했다. 그래서 새로운 무엇을 담아내고 있는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사뭇 궁금하기도 했다.

우선 영화를 보기 전에 선입관을 갖지 않기 위해 평론을 보지 않기로 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기 위해서도 그렇고, 또 영화 본 이후에 논평을 보아야, 필자 나름의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16년 교황청에 의해 ‘사도 중의 사도’로 공식 인정됨으로써 세속적으로도 다시 복권된 분이 막달라 마리아인 듯하다.

영화를 보고 나니, 새삼 큰 의문이 들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 부활 이후 처음 만남 분이 막달라 마리아라면, 예수님은 그녀를 높이 평가한 게 틀림이 없을 터이다. 그런데 근 2천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될 정도로, 그녀에게는 어떤 개인적 흠결이 있었던 것일까? 591년 교황에 의해 창녀로 언급된 것 외에 다름 문제가 없는 것이라면, 막달라 마리아의 복권은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필자 역시도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종교사회적 배척의 이유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보지 않은 데 대해 부끄러움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이 영화는 기성 종교사회에 대한 비판이 주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기성 종교사회에도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과 윤리관이 그리고 혹 내면에는 남성 기득권의 이해관계가 깔려있어서, 막달라 마리아의 복권이 늦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점에서는 예수님의 살아계셨던 당시 유대인사회 이후 세상은 얼마나 크게 변화했을까, 의구심이 크다. 늦게나마 막달라 마리아의 복권을 우리 모두 축하드리면서, 동시에 이 번 기회에 이 영화를 통해 다시금 여성의 제자리 찾기에 동참하는 다양한 장이 마련되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막달라 마리아가 여성 사도로서 예수 생존 당시 베드로나 유다 못지않은 절친이자 사도인 게 맞다면, 21세기 그리스도 종교사회에 주는 함의는 크다. 그래서일까, 앞으로 특히 가톨릭에서 여성도 사제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이 수녀만이 아니라 사제도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류사회도 한 단계 높은 양성평등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화는 막달라 마리아가 오히려 예수님을 옆에서 가장 잘 이해하고 호흡을 같이 하는 사도로서 그리고 있기에, 더욱 그러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종교의 핵심 주제의 하나인 천국이 무엇인지에 대해 시작과 끝에서 반복적으로 비유적으로 얘기해 주고 있다. 갈릴리 지방에서 잘 자라는 겨자 나무를 비유로 해서, 지극히 작은 겨자씨가 땅에 묻혔다가 자라나 키가 4-5미터가 되는 나무로 성장하여 공중의 새들에게 평안을 제공해 주는 둥지 역할을 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보잘 것 없고 흔하디흔한 겨자씨처럼 평범한 우리들이 자라서 어느날 ‘누군가에게 유용한 무엇이 되는 현세의 삶’ 자체가 천국이라는 것이다.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것인 만큼, 천국은 가까이도 멀리도 있지 않고, 각자 하기 나름으로 ‘바로 여기에’ 존재함을 보여준 영화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대사에서 지적한 바. 천국은 구원받은 시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우리의 마음’에 존재할 터이다. 이렇듯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하나로 연결된다. 일상의 삶 속에서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와 평화를 실처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예수님은 소박하게 가난한 집 인간으로 태어난 것 못지않게 십자가라는 처절한 극형에 처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극적인 삶에서, 남다른 경외와 칭송을 받는 분이시다. 특히 부활이 그리스도교에서 갖는 함의를 연두에 두고 본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확인해 준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은 그리스도교에서 남다른 위상과 대우를 받아야 할 터였다. 영화 제목이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부활의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를 재조명하면서,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자는 것일 게다.

영화는 예수님의 숱한 고뇌를 주로 묵언으로 그려내고 있다. 말이 없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무언가 한 마디 할 듯한 데도, 한 마디도 없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말을 굳이 넣을 필요를 못 느꼈을 만도 하다. 메시아로 의탁하고자 열망하는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줄 수 있는 것이 지상의 부귀영화가 아님을 어떻게 일일이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혹 무장봉기를 일으키면, 강력한 로마군단으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눈에 뻔하게 보이는데, 어떻게 지상의 새 세상을 힘으로 쟁취하자고 약속할 수 있었겠는가. 문제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실망하고 등을 돌릴 것이 뻔하다.

남은 건 죽음뿐이다. 죽어야 산다. 실제로 예수님은 죽어서 살았고, 또 영적으로 부활하면서 영원히 우리의 마음에 살아 있다. 사랑하고 아끼는 사도들과 절친들을 놔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하는 그 아픔을 어떻게 사도들에게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피눈물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다 흘렸다. 굳이 무슨 말을 십자가에서 더 하겠는가. 그래도 한가지만은 꼭 기억해 주었으면 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새 세상은 사랑이며 자비이고, 평화이고 용서임을. 그걸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길이요 생명이며 부활이고 천국임을 영화는 무언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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