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으로서의 문학 현기영(소설가)

 

현기영 소설가가 27일 한화리조트 제주 세미나실에서 개최된 제주4·3항쟁 70주년 전국문학인대회 국제문학심포지엄에서 발제를 하고 있다.

올해로 우리는 4.3항쟁 70주년을 맞는다.

4.3의 희생자 3만의 죽음은 오랜 세월 동안 한국 현대사에서 배제된 채, 그래서 진혼이 안 된 채 허공중에 떠돌았다. 역대 독재정권들이 대물림하며 그것을 강압적으로 은폐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피해자 집단 기억의 말살을 집요하게 시도해 왔다. 가해세력이 저지른 제노사이드의 범죄들은 철저한 금기의 영역이어서, 거기에 도전하는 시민들의 희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용공분자로 낙인찍힌 채,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투옥되었다.

그들은 그 사건을 공식 역사에서 지워 버리고, 그 사건들에 대한 민중의 기억도 말살하려고 했다. 이른바 ‘망각의 정치’였다. 피해 당사자들의 맺힌 한을 해원(解寃)해 주기는커녕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민중의 기억이 철저히 부정되고, 그 기억에 대한 사소한 언급도 용납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중은 어쨌든 살기 위해서 스스로 그 기억을 지워야 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왜 그러한 수난을 당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도무지 이해불능이었다.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모른 채 죽어갔던 것이다. 살아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그들은 죽어서 공산주의자가 된 셈이다. 빨갱이가 아니면 왜 죽였겠느냐, 라고 그들은 강변했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억제할 수 없는 분노만 가지고 봉기한 2백 혹은 3백 명의 젊은이들을 무찌르기 위해 무고한 양민 약 3만 명을 소탕한 것이 바로 4․3사건의 골자이다. 그 당시에 백살일비(百殺一厞)라는 말이 있었는데, 양민 백을 죽이면 그 중에 게릴라 한 명쯤은 끼어있게 마련이라는 것. 그래서 게릴라 2백 혹은 3백 명을 죽이기 위해서 양민 3만을 소탕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색으로 칠하여, ‘RED ISLAND’라고 명명했다. 당시에 그 붉은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내가 군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당할 때도 ‘빨갱이 작가’라고 불렸다. 고문으로 용공 조작하려고 했던 그들이 내게서 발견한 붉은색이라곤 고문에 짓이겨진 중지 손가락에 엉긴 끈끈한 피 뿐이었다.)

사건 이후에도 독재정권들은 대물림되고, 공포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무서운 금기였으므로, 그 사태의 진상이 무엇인지 알려는 노력은 위험한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4.3의 생존자는 4.3을 역사화 할 능력이 거의 없었다. 4.3의 트라우마는 그들의 자식, 손자에게도 미쳐 있어서 그들 역시 그 기억을 되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수많은 젊은 인재를 그 사태에 잃어버린 도민 대다수에겐 자신을 보호해 줄 언어도, 학벌도, 재력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4.3문학이 어렵사리 탄생했다. 극심한 탄압이 왔고, 체포· 고문·투옥이 잇따랐다. 4.3문학은 기억운동의 한 형태로 나타났다. 4.3에 대한 민중의 기억이 철저히 부정되고, 사소한 언급도 용납되지 않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왜곡된 공식 기억을 부인하고, 민중의 망가진 집단 기억을 복원해 내는 작업이 기억운동인데, 그 운동의 선두에 문학인들이 포진해 있었던 것이다. 가슴을 짓누르는 두려움 속에서 진행된 4.3문학은 대지 밑으로 파묻힌 한 시대의 전설을 발굴하는 문학이었고, 타버린 마을들과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문학이었다.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4.3문학이 독자를 쟁취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독재정권이 공포와 함께 유포한 허위의식은 대중의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마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그랬다. 지난 40년 동안 나의 소설 <순이 삼촌>은 독자들에게 다소 읽히긴 했지만, 그 반응이 꼭 호의적인 것만 아니었다. 작품 속에 묘사된 참상들은 극히 일부일 뿐인데도 너무 충격적이어서 읽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기는 그렇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슬픔과 불행은 그 양에 한계가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참사인 경우,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그 진상이 무엇이든 간에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덮어 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4.3의 참사는 국가폭력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민중을 보호하는 대신, 도리어 민중을 파괴해 버린다면,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의문을 자신이 품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4.3문학은 지배권력이 행사한 망각의 정치, 즉 은폐․부정(不定)․왜곡에 대한 저항이어야 했고, 일반인들의 무관심과 냉소에 대한 투쟁이어야 했다.

오래고 지난한 싸움이었던 민주화운동은 다행스럽게도 1987년의 6월항쟁을 통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데, 그에 따라 4․3의 기억운동도 어느 정도 그 열매를 딸 수 있었다. 2000년 김대중 정권 시절에 국회에서 통과된 4․3특별법과 2006년의 노무현 대통령 사과가 그것이다. 불가능을 꿈꾸었던 제주도민에게 그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만시지탄이나마, 최근에 4.3국가추념일도 지정되었다.

국가추념일, 그것으로 4․3의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물론 아니다. 아직도 진상의 많은 부분은 어둠 속에 묻혀있고, 그동안 쌓아온 4.3진상규명의 성과들을 부정하고 뒤엎으려는 세력이 건재해 있다. 게다가 범람하는 현란한 상품소비문화, 즉 엔터테인먼트 문화 역시 그 기억을 희석시키고 있다. 이러한 적대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4.3문학이 더 많은 독자를 획득할 수 있을까?

순수예술은 슬픔과 불행을 다루더라도, 전반적으로 그 슬픔이 행복한 분위기 속에 포용되었을 때만 용납된다. 그러나 전쟁과 민중수난의 슬픔은 순수예술에 나타나는 감미롭기조차 한 애잔한 슬픔이 아니라, 비참한 떼주검과 피․비명․울음소리와 무서운 고통의 슬픔이다. 오죽하면,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아도르노의 절망적인 탄식이 나왔을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노사이드사건을 다루는 문학은 그러한 익숙한 도식을 거부하고 일상의 논리는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편스러워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작가로서, 지식인으로서 공동체의 참혹한 경험들에 대해 발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일 것이다.

지금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경구가 쓰여 있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한 가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 이 경구에 아우슈비츠 대신에 4.3을 바꿔 넣어보자. 불행한 과거를 망각하는 자는 개인이든 사회이든 간에 그 과거를 다시 반복할 운명이 된다는 말이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는 유대인의 슬로건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잊어버림으로써 용서하자” 가 아닌가. 잊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반복해서 새롭게 재기억(rememory)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체험세대들이 대물림하면서 그 기억을 계승하는 일, 즉 재기억이 그것이 바로 기억운동인 것이다.

해마다 수십 편씩 미학적 완성도 높은, 문학 작품, 영상 작품들을 창작해 냄으로써, 자신의 민중수난사를 세계화하고 있는 유대 민족에 견주어 생각할 때 우리의 처지가 참 안쓰럽다. 문학의 기억운동이 소비향락주의 사회에서 설득력을 가지려면 정교한 창작 전략이 있어야 하겠다. 시장의 용어로 말해서, 유통되고 소비되려면, 매력적인 디자인의 상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상투적인 스토리텔링만으로는 안 되고 창의적인 형식이 필수적이다. 상투어에 저항하는 예술이 되어야 한다.

작품소재로서 진부하게 생각되는 150년 전 노예 시절의 흑인 문제를 다룬,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가 고전적 위엄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창의적인 형식미의 덕분이었음을 명심하자. 유대 수난의 참혹한 서사에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코미디를 도입하여 놀라운 성공을 거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사례도 염두에 두자. 가해집단 속에도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영화 <신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처럼, 예컨대 ‘양심적인 서청’을 주인공 삼을 수 있고, 그 사건에 희생된 순경의 아내와 이른바 ‘산폭도’의 아내가 쌍나란히 앉아 김매는 모습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

요컨대, 이제는 정통 리얼리즘만 고집할 게 아니라, 환상, 코미디도 아우를 수 있고, 모더니즘의 방법론도 차용하는 새로운 리얼리즘도 찾아내야 하겠다. 분노의 둔탁한 표현인 종전의 슬로건 예술, 포스터 예술을 성큼 넘어서는 절실한 예술적 언어의 발견을 기대한다. 탄식하고 분노하고 외치는 글이라 할지라도 시(詩)를 잃지 않는 리얼리즘의 예술을.

기억운동이야말로 4.3의 원혼을 제대로 진혼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고 진혼굿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죽은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마땅한 도리이거늘, 3만 조상의 통한의 죽음을 어찌 공동체가 무심할 수 있겠는가. 원혼은 섬기면 보살펴 주고, 푸대접하면 해코지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작가는 그 진혼굿을 주재하는 무당이어야 할 것이다.

4.3의 참사 속에 희생된 3만 원혼들이 아직도 어둠에 갇힌 채 우리를 향해 애원의 손을 흔들고 있다. 인정받지 못하고 죄인의 누명을 쓴 채 버려진 수많은 죽음들, 그 억울한 죽음들과 상처들을 망각과 무명의 어둠에서 불러내어 진혼하는 일, 무의미한 그 죽음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그리고 죽은 자들뿐만 아니라 고문과 옥살이로 육체와 정신이 망가진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위무하는 일, 다시 말해서 민중 수난의 말살된 기억을 되살리고, 그리고 그것이 다시는 망각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재기억시키는 일을 문학이 감당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레퀴엠으로서 4.3문학

4.3 Literature as a Requiem

This year marks the 70th anniversary of the April 3 Uprising.

The 30,000 deaths of the 4.3 massacre have been forgotten and left out of modern Korean history, which has left the souls of the victims wandering around, not being able to rest in peace. The successive generations of dictatorship have been concealing the facts with a high hand. They have been persistently trying to wipe out collective memory. The crimes of genocide executed by the offensive forces were complete taboo, causing endless sacrifice of the citizenry and anyone who showed signs of opposition. Branded as pro-Communists, they were arrested, tortured, and jailed.

Even after the incident, the dictatorship was passed on to the next generation, and a climate of fear didn't fade. As it was fearful taboo, the endeavors to investigate the truth was a risky challenge. So those who knew the facts of the case did not utter a word and the people who were not aware of it didn't try to educate themselves. The survivors of the 4.3 massacre were not able to historicize it. They didn't want to bring back their memory because the trauma of April 3rd had already influenced their children and even their grandchildren. With the loss of millions of young talents, most of the islanders were left without education, resources, and means to protect their own people.

Under this difficult circumstance, the 4.3 literature was born arduously. Excruciating suppression had begun, followed by arrests, tortures, and imprisonment. The 4.3 literature appeared as a form of remembrance. The people's memory of the 4.3 massacre was downright denied, and even a mention was also unacceptable. Despite this kind of situation, writers were present at the forefront of the movement of remembrance, which repudiated the official memory and helped recover the collective memory that had been destroyed. The 4.3 literature, which advanced amidst the fear of oppression, is a literature which excavated a legend of an era under the ground beneath our feet, rehabilitated the burned-down villages, and raised the dead from the grave. Fortunately, the pro-democracy movement, which was long and tortuous, finally won a victory through the June Struggle in 1987. The movement of remembrance for the 4.3 massacre also accordingly gained practical results, even though it was a tiny one. Recently, April 3rd was designated as The 4.3 National Memorial Day. This was accepted as a huge accomplishment and a miracle to the islanders, who made the impossible possible.

Although it was an adequate achievement, much more yet remains to be done to fight injustice. Unfortunately, a large part of the fact is still buried in darkness. The truth is being covered up, and the results and outcomes of the April 3rd investigations are still being denied and subverted by the opposing forces. In addition, an overflow of a dazzling consumer culture, dominated by the entertainment industry has also been diluting the memory. So then how can we attract more readers to the 4.3 literature in such a hostile enviro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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