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 그리고 개발-제주 4·3문학의 현재성 김동현(문학평론가)

 

김동현 문학평론가(사진=강봉수)

1. 무고한 희생, 박제된 기억

201년 4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 4·3 추념식에 참석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두 번째였다. 이명박·박근혜가 집권하는 동안 제주 4·3은 ‘불편한 역사’였다. 2008년의 일이었다.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은 제주 4·3위원회를 폐지하자는 제주 4·3특별법 개정안(신지호 의원 대표발의, 2008년 11월 20일)을 제출했다. 정부에서 운영 중인 과거사 관련 위원회 운영의 효율성이 필요하다는 명분이었다. 그해 9월에는 국방부가 제주 4·3을 “남로당의 지시에 의한 좌익세력의 반란”이라고 규정하고 교육과학기술부에 제주 4·3 관련한 교과서 내용을 수정하도록 요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식 참석은 후보 시절 약속이었다. 보수 정권에서 계속된 4·3 폄훼와 왜곡을 겪으면서 제주에서는 대통령의 추념식 참석 자체를 정권교체의 상징으로 인식했다. 70주년이 주는 무게감만큼 대통령 참석이 던질 메시지에 대한 기대도 컸다. 2017년 69주년 추념식에 참석했던 황교안 대통령 권한 대행은 추도사 대부분을 영어교육도시, 첨단과학기술단지 조성 , 제주 신항만, 제2공항 건설 등을 언급했었다.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다”고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의 추도사는 4·3의 전개와 피해,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억압의 세월을 차례로 언급했다. 제주 4·3 진상규명 운동에 매진해온 제주 공동체의 노력도 언급했다. 제주 4·3연구소, 제주민예총, 제주 4·3도민연대 등을 일일이 언급했고 현기영, 김석범, 강요배, 조성봉, 오멸, 임흥순, 고(故) 김경률 감독이 이뤄냈던 예술적 성취도 거론했다.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서 제주도민들과 제주 4·3 유족들에게 사과했다.

2017년 황교안 대통령 권한 대행의 추도사에 실망했던 유족들과 제주도민들은 문재인 대통령 추도사를 들으며 감격했다. 언론들의 보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8년 한승수 국무총리가 4·3위령제에 불참하고 서울모터쇼에 참석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도민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했다. ‘선언’이라는 수사는 최고 통수권자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수사의 강도는 컸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추도사는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발표문을 관통하는 ‘무고한 희생’이라는 한계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발표문은 가해의 주체인 군과 경찰은 은폐된 채 남로당 무장봉기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무력충돌에 의한 희생이라는 수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가해의 구체적 책임을 추상적 상징체계로 수렴하는 이러한 정치적 수사는 이후 제주지역에서 ‘희생담론’이 본격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제주, 오키나와, 대만에서 자행된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이 법적 제도로 수렴되는 과정에서 ‘희생의 정치학’이 대두되었다. 이는 국가폭력 진상규명과 추념 의례가 가해의 주체였던 국가의 승인을 받는 순간 기억의 안전한 삭제가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주 4·3 항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완전한 독립, 통일정부를 갈망했던 항쟁의 기억이 제도권으로 들어서는 순간, 국가는 항쟁의 주체성을 소거했다. 제주 4·3 평화공원이라는 추념의 상징물 안에서 항쟁은 위험하고 관리되지 않는 기억이었다. 이를 대신한 것이 ‘무고한 희생’이라는 안전한 기억이었다. 평화공원 개원 당시 일부 전시물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념 논쟁이나 속칭 ‘불량위패’ 논란을 상기해보자. 제도적 의례가 정착될수록 저항, 자치, 통일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상실되었다는 지적은 ‘희생담론’의 한계를 잘 말해준다.

문재인 대통령의 추도사는 제주 4·3특별법 제정 이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이원화 속에서 ‘희생자’라는 균질적 존재로 호명하는 정치적 수사의 한계를 보여준다.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다면서 “이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도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는 여전히 ‘양민’만을 추념의 대상으로 호명한다. ‘양민’은 죄 없고, 선량한, 안전하게 관리 가능한 몸이다. 권력이 부를 수 있는 몸이며, 권력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몸이다. 몸이되, 몸이 아닌 몸. 신체 없는 신체성 혹은 신체성 없는 신체. 어느 경우가 되었든 몸은 이념의 순수지대일 때 위령과 위무의 대상이 된다.

제주 4·3항쟁은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의례의 대상이 되었다. 제주 4·3특별법 제정, 그리고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 확정까지 ‘항쟁’, ‘폭동’, ‘학살’의 기억들은 서로 투쟁했다. 억압은 저항을 낳았고 저항은 또 다른 억압의 빌미가 되었다. 진상규명 운동 초기 중요한 과제는 ‘공산주의자들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는 반공 편향성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제주 4·3항쟁을 해방 이후 미군의 동아시아 정책과 경찰과 서청의 가혹행위, 그리고 당시 제주의 사회적·경제적 상황의 이해에서 출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제주 4·3 진상규명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제민일보의 연재 ‘4·3은 말한다’에서도 이와 관련한 부분은 비중 있게 서술되고 있다.

‘빨갱이’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한 기억 투쟁이 원래부터 이념의 순수 지대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군인, 경찰의 ‘위법한’ 폭력성을 담론의 장에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 점에서 기억 투쟁은 권력의 아카이브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내셔널 히스토리의 폭력에 대한 투쟁이었다. 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 「간수 박서방」을 이어 4·3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인 「순이삼촌」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기억에 관한 한 아카이비스트의 역할을 자임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죽음을 기억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기록의 증언자로서 4·3문학이 이룩한 성과는 지대하다.

하지만 4·3이 제도적 의례로 자리매김하면서 구체적 죽음과 비극의 양상들은 ‘희생’이라는 추상으로 수렴되었다. 이는 제주 4·3을 ‘희생’이라는 단일한 추상으로 획일화하는 또 하나의 폭력이었다. 4·3진상규명 운동이 극우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추도사에 등장하는 ‘무고한 희생’이라는 발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지금-여기 제주 4·3문학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2. 실증의 뫼비우스를 넘어서는 문학적 진실의 추구

제주 4·3문학의 성취 중 하나가 내셔널 히스토리에 대항하는 로컬 히스토리의 구축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억압된 기억의 분출은 문학적 진실의 추구였다. 현상으로서의 4·3을 거부하고 본질로서의 4·3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는 제주 4·3 진상규명 운동사에 하나의 성과로 기입됐다. 하지만 문학적 진실의 추구와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언급되어야 한다. 문학은 역사적 실증의 동어 반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4·3 정명의 필요성이 제기될 때마다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추가 진상 조사의 필요성은 정명이 실증적 역사의 단계에서 구현되기에는 어렵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학살의 책임자로서 미국의 문제를 따져 묻는 작업 역시 마찬가지일 터이다. 제주 4·3이 실증의 뫼비우스에서 무한 순환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동안 4·3 문학의 성취를 반성적으로 점검하고, 4·3문학의 현재성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 지를 살펴봐야 한다.

현기영이 수난사적 입장에서 출발한 「순이삼촌」에서 「목마른 신들」과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거치면서 “관권의 불의에 저항하던 제주 섬 공동체의 신화”에 주목해 갔던 과정은 그 자체로 제주 4·3문학의 자기 갱신 과정을 보여준다. 「순이삼촌」에서 현기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고발이나 보복이 아니었다. 다만 합동 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억울한 죽음을 신원(伸冤)하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마저 차단당하 시대를 대변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빨갱이’라는 낙인을 벗기 위한 무죄 증명의 방식으로 발현될 때 항쟁의 주체성은 쉽게 소멸된다. 「우리들의 조부님」에서 현길언이 보여준 ‘무죄증명’의 방식은 제주 4·3문학, 나아가 제주 4·3 진상규명 운동이 이념의 순수지대로서의 희생을 강조할 때 빠질 수 있는 오류를 보여준다.

현길언은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된 이후 4·3이 정치 논리가 됐다면서 제주 4·3사건은 의로운 저항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일으킨 반란이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4·3에 대한 그의 입장은 4·3 체험 세대라는 경험의 소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을 단순히 극우적 발언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쩌면 ‘희생의 순수성’만을 강조할 때 도달할 목적지인지도 모른다. 이념도 모르는 억울한 죽음만이 계속적으로 추념의 대상이 된다면 우리는 표백된 역사만을 기리게 될 것이다.

‘이념도 모르는 양민들의 무고한 죽음’으로 4·3을 추념할 때 생기는 문제는 국가 공권력의 폭력 행사를 분절적으로 사유하게 된다는 점이다. 제주 4·3특별법 제2조는 4·3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다.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서 4·3을 규정하고 있는 이 대목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에서 국가 폭력을 대하는 이중적 입장을 보여준다. 진상규명 과정에서 국가폭력의 진상이 밝혀졌다면 명예회복은 이와 달리 국가폭력을 ‘희생’이라는 추상으로 획일화하면서 국가 폭력의 주체를 지워버렸다.

이는 남로당 무장봉기에 대한 진압은 정당했지만 이 과정에서 발생한 ‘양민 학살’은 문제였다는 폭력에 대한 양가적 태도로 나타난다. 남로당 무장 봉기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에서 일어난 ‘반란’이라고 바라보는 극우적 시각은 이러한 태도의 극단에 놓여있다. 그런데 그동안 극우적 시각에서 제주 4·3을 ‘반란’, ‘폭동’이라고 규정할 때 마다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4·3을 이념적 잣대로 바라보지 말라’는 식의 논리를 펴왔다. ‘4·3’의 탈이념화에 내재된 논리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는 현길언의 ‘4·3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보다 정직할 필요가 있다. 국가가 승인하는 한에서 ‘4·3’을 추념할수록 항쟁의 기억은 퇴색되고 희생의 기억만이 남게 된다. 제주 4·3 문학이 이룩해 놓은 빛나는 성취들은 국가가 강요하고 승인한 기억들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억압의 구조에 저항하고 로컬 기억을 문학적 방식으로 재구해 왔던 것이 4·3문학이 걸어왔던 길이었다.

제주 4·3은 반공국가 대한민국을 지역에 폭력적으로 이식하려는 시도였다. “전도에 휘발유를 뿌려서라도 공산주의자를 섬멸”할 것을 주문했던 권력의 발화는 반공국가 대한민국의 식민지적 차별을 증언하는 상징이다. 학살이 현상으로서의 4·3이라고 한다면 반공국가의 이식이야말로 본질로서의 4·3이라고 할 수 있다. 4·3을 항쟁으로서 기억하는 것은 본질로서의 4·3을 환기하는 일이다. 4·3을 “서울정권의 지역에 대한 차별”이라고 규정하는 󰡔화산도󰡕의 해석이야말로 본질의 과녁을 겨냥한다.

항쟁은 정당했고 탄압은 가혹했다. 절멸의 공포는 오랫동안 항쟁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항쟁의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는 비극의 비명이 자리잡았다. 비극의 비명에 귀 기울이고 그것의 참혹을 증언하는 것도 문학의 몫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항쟁의 언어이며, 항쟁의 몸짓이다. 반공국가 대한민국의 식민지적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서 4·3을 바라볼 때 항쟁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적 신체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실증의 뫼비우스를 넘어서는 문학적 응전의 방식, 그것이 제주 4·3 문학이 끊임없이 현재성을 지닐 수 있는 길이다.

 

3. 개발, 은폐된 폭력

‘절멸’이 휩쓸고 간 제주에는 ‘관광 개발’이라는 근대화 기획이 이식되기 시작한다. ‘성공적 토벌’을 확인하기 위해 제주를 찾은 이승만의 일성은 ‘재건’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첫 지방 초도 순시 방문지로 제주를 선택했다. 1964년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이 수립은 근대적 기획으로 지역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화 기획은 90년대 제주개발특별법, 2000년대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지역 개발’은 역설적으로 4·3이라는 지역의 기억을 억압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기억이 억압된 자리를 차지한 것은 환상이었다. ‘제2의 하와이’, ‘제주국제자유도시’가 바로 그것이었다. 반공과 개발의 이식은 제주 4·3이 역사적으로 종결된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경찰 정보원 노릇을 했던 마을 주민 강씨가 죽기 전에 유언을 하겠다는 전갈을 받고 고향 새밋드르에서 벌어졌던 과거를 상기하는 현기영의 「아스팔트」는 4·3의 기억이 근대화 프로젝트에 저항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음 장면을 살펴보자.

우르르 솔숲이 또 한번 흔들리면서 음산한 냉기를 후욱 끼친다. 창주는 쫓기듯 얼른 숲을 지나쳐 고개를 내려간다. 눈은 연상 내려 창주의 몸을 너울처럼 감싼다. 부드럽게 뺨을 핥는 감촉. 자정이 넘은 시간 어둠속에 붐비는 이 눈송이들은 필경 사자들의 혼령이리라. 두런두런 뭐라고 저희끼리 속삭이는 소리. 산야 여기저기 풍우에 곱게 닦인 흰 백골과 삭은 고무신들…… 그러나 눈송이들은 아스팔트를 뚫지도 못하고 덮어싸지도 못한다. 눈송이들은 다만 견고한 아스팔트 위에 부딪혀 허망하게 바스라지고 녹아버릴 뿐이다. 아스팔트는 물샐틈없이 치밀하다. 삼십육년 전의 애닯은 과거를 깔아 봉해버린 아스팔트. 관문인 공항에서 시작하여 비극의 산야를 종횡으로 질주하는 아스팔트의 관광도로……

작중 인물 창주는 자정을 넘겨 내리는 눈송이들이 사자들의 혼령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의 현존인 눈송이는 36년 전의 과거를 은폐한 아스팔트를 뚫지도 덮어 싸지도 못한다. 기억을 완강히 거부하는 ‘견고한 아스팔트’는 4·3의 기억을 은폐하는 권력의 억압과 지역민들의 기억의 환기가 근대성의 이식을 둘러싼 지역의 저항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은폐된 폭력’으로 다가온 개발을 대하는 지역의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에서는 ‘근대화 프로젝트’에 열광하면서도 한편에서는 ‘향토의 상실’에 대한 우려가 싹텄다.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이 발표된 즈음 제주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제주민속학회의 출범은 이러한 이중적 태도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향토의 상실’에 대한 우려는 민속적 차원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제주 4·3문학은 승인받지 못했던 기억들을 지역의 신체에 새겨놓았다. 윌터 미뇰로는 “식민성 없는 근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근대 그 자체가 식민적 위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그의 발언에 주목해보자. 제주 4·3이 이념 대결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라는 김석범의 인식은 제주 4·3의 현재적 가능성, 근대의 폭력적 위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상의 지렛대로 사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제주 4·3은 단순히 단선단정 반대를 외치며 일어났던 좌파모험주의자들의 극렬 행동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국가 권력에 의한 무고한 희생도 아니다. 어쩌면 제주 4·3은 근대가 필연적으로 배태할 수밖에 없던 폭력의 문제를 지역의 시각에서 스스로 선택하고자 했던 반근대적 운동이었다. 제주 4·3을 이렇게 해석할 때 근대가 만들어 놓은 중앙과 지역의 지리학은 비로소 새롭게 편성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내부 식민지를 생산해내는, 그렇게 함으로써 일상적 악의 시대를 유지하는, 근대의 내부에 숨어 있는 저항의 힘들이 제주 4·3의 역사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제주 4·3을 이렇게 해석할 때 박정희식 근대가 새겨놓은 지역의 식민성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한 저항은 자본주의의 외부를 상상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근대의 내부에 있는 저항의 지대를 발견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 내부적 저항의 지대로서 제주 4·3을 해석하는 일은 야만의 일상이 지배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지역의 응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