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다시 우리를 부르는 고명철(문학평론가)

 

고명철 문학평론가(사진=강봉수)

바오닌은 그의 '전쟁의 슬픔'에서 베트남전쟁의 전선 바로 그 격전지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채 유령으로 배회하고 있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너무나 허망하게 끔찍이 죽어간 민간인들의 유령을 베트남의 자연(흙, 숲, 나무, 바람, 계곡, 샘물, 늪, 정글 등)에 겹쳐놓는다. 왜냐하면 이들 유령은 베트남의 대자연 속에서 느닷없이 출몰하는 공포감을 동반하는 괴기스런 존재가 아니라 대자연 속에서 유령의 존재형식으로 살고 있는, 그래서 목숨이 붙어 있는 것과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자연의 이러저러한 현상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베트남전쟁의 유령은 베트남의 대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살고 있는 말 그대로 리얼한 존재의 가치를 얻는다. 이렇듯이 󰡔전쟁의 슬픔󰡕에서 작가 바오닌은 작중 인물 끼엔의 글쓰기 과정에서 베트남전쟁의 대자연 속에 살고 있는 베트남전쟁의 유령을 만나 현실 세계에서 그들의 존재를 영원히 추방하기 위한 퇴마사의 역할이 아니라 귀신의 상처마저 어루만져야 하는 흡사 영매(靈媒)의 몫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면서 끼엔은 베트남전쟁에서 모든 것이 현상적으로 처절히 파괴되었을지라도 베트남의 아름다운 고갱이는 훼손되어서는 안 될 에로스의 현현으로 영원히 남아 있어야 한다는, 베트남전쟁 종전 후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희망을 실현시켜야 할 정동(情動)의 표상으로 작중 인물 프엉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품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반레 역시 바오닌처럼 서사적 주체로서 베트남전쟁의 유령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베트남전쟁의 유령은 이 전쟁이 종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전쟁에 연루된 곳이면 어디든지 전쟁과 관련한 유산이 남아 있고, 그것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시나브로 망각하든지 추방시켜서는 곤란하다는 문제의식을 상기시킨다. 다시 강조하건대, 베트남전쟁의 유령은 베트남의 대자연과 더불어 베트남 사람들의 삶 속에서 살고 있다.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에서도 이것은 중심 서사로 작용한다. 그러면서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끔찍하고 참혹한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베트남 병사들을 지탱하게 하는 어떤 삶의 힘이다. 이것을 비약하여 이해한다면, 세계 초강국 미국의 파상공격에 맞서 결국 승전을 일궈낸 베트남의 원천으로 인식해도 무방할 터이다. 우리는 유령 빈의 시선에 의해 재조명된 베트남 전사들이 길러온 인간의 고매한 품격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기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의 식민주의 지배는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언어절(言語絶)의 참혹한 폭력 및 전쟁을 제주, 오키나와, 중국의 난징, 베트남 등지에서 자행해왔다. 그리고 그 끔찍한 전쟁의 고통과 상처, 반인류적 전쟁의 유산은 아직도 이들의 삶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일까.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과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은 베트남전쟁의 복판을 살아온 작가들이 끊임없는 반성과 비판적 성찰이 육화 및 실천되고 있는, 기존 구미중심주의 세계문학에 균열을 내는 새로운 세계문학을 구성해내고 있다.

 

1. 미국중심의 동아시아 냉전체제 속 한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신동엽 시인의 유작시 「조국」(󰡔월간문학󰡕, 1969년 6월호)에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녹아들어 있다.

 

신록 피는 五月

서붓사람들의 銀行소리에 홀려

조국의 이름 들고 眞珠코거리 얻으러 다닌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꿋꿋한 雪嶽처럼 하늘을 보며 누워 있지 않은가.

 

무더운 여름

불쌍한 原住民에게 銃쏘러 간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쓸쓸한 簡易驛 신문을 들추며

悲痛 삼키고 있지 않은가.

 

그 멀고 어두운 겨울날

異邦人들이 대포 끌고 와

江山의 이마 금그어 놓았을 때도

그 壁 핑계삼아 딴 나라 차렸던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꽃 피는 南北平野에서

주림 참으며 말없이

밭을 갈고 있지 않은가.

― 신동엽의 「조국」 부분

 

신동엽에게 베트남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희생양으로 전락하여 분단의 고통을 살고 있는 한국이 이른바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누리기 위해 “불쌍한 원주민에게 총쏘러 간” “비통”으로 다가온다. 신동엽은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한국을 매섭게 응시하고 있다. 한반도 분단의 고통과 비극이 “이방인들이 대포 끌고” 온 것과 무관하지 않듯이, 한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함으로써 베트남 사람들에게 이방의 군대로 인식되고 한반도처럼 혹시 베트남이 냉전체제의 또 다른 희생양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냉철한 이해를 신동엽은 하고 있다. 그러면서 신동엽은 무엇보다 베트남전에 개입한 한국의 경우 표면상 정치적 이념의 명분으로는 한반도처럼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정작 그러한 정치적 이념은 미국중심의 동아시아의 냉전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한 포장에 불과할 뿐 “서붓사람들의 은행소리에 홀려/조국의 이름 들고 진주코거리 얻으러 다닌”, 즉 전쟁을 이용하여 달러를 벌기 위한, 달리 말해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체제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전쟁에 흡사 용병으로서 참전한 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그렇게 신동엽은 미국중심의 동아시아 냉전체제에 한국이 옴쭉달싹할 수 없도록 흡수된, 그래서 그 경제적 대가로서 ‘베트남전 특수’에 매달려야 하는 분단조국의 현실을 준열히 들여다본다.

신동엽의 「조국」이 발표된 지 반 세기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베트남전쟁은 베트남민족해방군의 승리와 미국의 패배, 그리고 베트남의 통일공화국 수립(1976) 이후 세계인들에게 베트남전쟁의 안팎을 성찰하도록 한다. “베트남전은 아직 확실하게 끝났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단순히 기억되는 전쟁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살아 있는 전쟁”으로 베트남전쟁 해당시기뿐만 아니라 종전 이후에도 이 전쟁에 연루된 모든 존재들이 응당 마주해야 할 난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무엇보다 베트남전쟁을 일으켰고, 베트남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미국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전쟁 수행 도중 일어난 반인류적 참상에 대한 잘못을 표명한 적이 없다. 여기에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미국중심의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분단된 한국은 베트남전쟁에서 ‘베트남전 특수’로 경제적 반사이익을 추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반공병영국가를 공고화하였으며 1970년대 군부독재정권의 정치경제적 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들어와 베트남전쟁은 한국과 베트남, 그리고 동아시아에 어떤 물음을 던지고 있을까. 우리는 이 물음을 새로운 지평에서 어떻게 탐문할 수 있을까. 베트남전쟁을 다룬 소설들 중 이 글에서는 베트남의 대표적 두 작가의 장편소설―바오닌의 󰡔전쟁의 슬픔󰡕과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생각을 다듬어본다.

 

2. 베트남전쟁의 유령과 에로스의 정동(情動)―바오닌의 󰡔전쟁의 슬픔󰡕

196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 살에 베트남인민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전선에 투입된 후 1975년 베트남전 최후 작전인 사이공진공작전에 참여하여 마침내 승리를 만끽한 바오닌은 자신의 첫 장편소설 󰡔전쟁의 슬픔󰡕(1991)이란 제명(題名)이 단적으로 말하듯, “전쟁의 슬픔에 질질 끌려 다녔다.”(40쪽) 이 소설이 세계문학계에 던진 충격의 파장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아무리 베트남전쟁의 참상이 끔찍하더라도 작가 바오닌은 숱한 전장(戰場)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베트남전쟁의 승자로서 베트남민족해방의 열정과 세계 초강국 미국의 막강한 현대전의 화력에도 절대 꺾이지 않는 베트남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데 애오라지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대신 바오닌은 그의 분신인 작중 인물 끼엔을 통해 “인간에게 가장 끔찍한 단절과 무감각을 강요하는 비탄의 세계”(47쪽), “전쟁 속으로 뛰어들어” “외롭게, 비현실적으로, 처절하게,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숱한 장애와 오류에 맞닥뜨리며”(70쪽) 글을 쓰도록 한다. 끼엔이 목도한 베트남전의 모든 것은 기억되며 글로 옮겨진다. “글을 쓰는 것이 마치 머리로 바위를 들이받는 것 같고, 자신의 심장을 손으로 도려내는 것 같고, 몸뚱이를 스스로 내동댕이치는 것 같아 힘들고 어렵지만” “더는 쓸 수 없을 때까지 글을 써야 한다.”(197쪽) 바오닌은 고통스러운 글을 씀으로써 베트남전쟁에서 황폐화된 자신의 영혼은 물론, 숱한 전장에서 죽어간 동료 병사들과 베트남 민간인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살아 남은 자들의 영육에 깊이 새겨진 전쟁의 상처와 고통을 씻겨주는 일종의 씻김굿을 수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에서 가장 주목하고 싶은 것은 소설 곳곳에서 마주하는 “외로이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23쪽)을 “산 귀신의 것”(45쪽)으로 재현하고 있는 서사적 노력이다. 바오닌의 이러한 글쓰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가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세계를 엄격히 분리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바오닌에게 베트남전쟁과 연루돼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와 확연히 나뉘어짐으로써 삶과 죽음이 공존할 수 없는, 삶을 초월한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유령이 아니다. 때문에 󰡔전쟁의 슬픔󰡕에서 그려지는 각종 전쟁의 혼령 및 정령, 바꿔 말해 유령으로 포괄적으로 호명되는 존재는 살아 있는 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베트남의 “전쟁유령 현상은 역사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인간의 조건을 반영하고, 때로 헤겔의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 즉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으로 묘사되는 것과 긴밀한 친화성을 가진다.”는 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바오닌이 끼엔의 글쓰기를 통해 마주하고 있는 유령은 바오닌의 과거 속에서 자리하여 잊혀지고 있는 존재들을 추념하기 위해 소환되는, 살아 있는 존재와 구분되는 삶의 세계 바깥의 낯선 존재가 아니다. 끼엔은 “이미 죽은 자들을 불러 모으는 과정이 소설 속 페이지마다의 삶을 형성”(116쪽)함으로써 “이제 땅속에 살지 않고, 꿈속에서 소리 높여 삶과 죽음에 대해, 죽음의 순간에 대해, 심지어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병사와도 같았다.”(117쪽)

그리하여 바오닌은 베트남전쟁의 전선 바로 그 격전지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채 유령으로 배회하고 있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너무나 허망하게 끔찍이 죽어간 민간인들의 유령을 베트남의 자연(흙, 숲, 나무, 바람, 계곡, 샘물, 늪, 정글 등)에 겹쳐놓는다. 왜냐하면 이들 유령은 베트남의 대자연 속에서 느닷없이 출몰하는 공포감을 동반하는 괴기스런 존재가 아니라 대자연 속에서 유령의 존재형식으로 살고 있는, 그래서 목숨이 붙어 있는 것과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자연의 이러저러한 현상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베트남전쟁의 유령은 베트남의 대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살고 있는 말 그대로 리얼한 존재의 가치를 얻는다. 대단히 흥미롭게도,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에서 재현되는 이러한 베트남전쟁의 유령은 비록 그것이 수반하는 구체적 서사와 개별적 사건의 양상은 다르지만 베트남전쟁처럼 서구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주의 경영으로 전대미문의 죽음과 파괴 및 절멸이 엄습한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오키나와의 문제적 공간에서 살고 있는 유령의 존재형식과 어떤 공유성을 갖는바, 우리는 이것을 두고 ‘경이로운 현실’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의식을 가다듬자. 󰡔전쟁의 슬픔󰡕에서 작가 바오닌은 작중 인물 끼엔의 글쓰기 과정에서 베트남전쟁의 대자연 속에 살고 있는 베트남전쟁의 유령을 만나 현실 세계에서 그들의 존재를 영원히 추방하기 위한 퇴마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산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는 바로 병사들의 황폐한 영혼이 내는 목소리”로서 “이승에 사는 우리들은 수시로 그 소리를 듣게 되고 때로는 소리의 의미까지 이해”(17쪽)해야 하는, 심지어 “끔찍한 질병과 끝없는 굶주림이 이곳의 모든 생명을 완전 궤멸시킨 것”(18쪽)과 연관된 귀신의 상처마저 어루만져야 하는 흡사 영매(靈媒)의 몫을 수행해야 한다. 󰡔전쟁의 슬픔󰡕에서 끼엔이 종전 후 전사자들의 발굴유해단원으로 일하면서 그 자신은 살아났지만 동료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처참히 죽은 곳에서 만난 유령으로부터 “암흑 같은 시절을 견디게 해주었고 그에게 믿음과 삶에 대한 욕망과 사랑을 심어 주었다”(71쪽)고 생각하게 된 것은 영매로서 끼엔을 ‘자기발견’한 게 아닐까.

이렇듯이, 베트남전쟁 종전 후 바오닌은 그만의 방식으로 ‘전쟁의 슬픔’을 정직하게 아파하면서 진솔히 기억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견디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여기에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전쟁을 겪을수록 파멸의 힘보다 더욱 강한 것이 존재”(317쪽)하는, 그것은 “영원히 어리고, 영원히 시간 밖에 있고, 영원히 모든 시대 바깥에 있”(317쪽)는 끼엔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간절히 사랑해온 여인 프엉의 존재다. 전쟁의 와중에 헤어져 생사를 도통 알 수 없었던 프엉이 베트남 어디에서 혹 생존해 있을지 모른다는 전우의 편지 한 통은 끼엔으로 하여금 “지난 삶에서 절대로 잃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신비로운 희망을 갖”(316쪽)도록 한 것이다. 만일 끼엔이 베트남전쟁의 복판에서 황폐화된 “자기 자신을 놓아 버리려던 마지막 순간에 지난 옛날 쓰디쓴 황혼녘에 프엉이 부르던 그 소리”(317쪽)를 못들었다면, 끼엔의 삶이 지탱되길 힘들었을 터이다. “그녀의 세월을 거쳐 간 죄업의 강산, 추악한 악명, 미친 이야기들을 전혀 개의지 않는 끼엔에게 프엉은 영원히 시간 밖에서, 영원히 해맑은, 영원한 청춘이었다.”(241쪽) 말하자면, 프엉은 󰡔전쟁의 슬픔󰡕에서 참혹한 전쟁의 피해 당사자이되 끼엔에게는 지옥도(地獄圖)의 전쟁이 그녀를 집어삼켜 파괴할 수 없는, 어쩌면 베트남전쟁에서 모든 것이 현상적으로 처절히 파괴되었을지라도 베트남의 아름다운 고갱이는 훼손되어서는 안 될 에로스의 현현으로 영원히 남아 있어야 한다는, 베트남전쟁 종전 후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희망을 실현시켜야 할 정동(情動)의 표상으로 그려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3. 베트남전쟁의 안팎, 순결한 영혼의 존재형식―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반레는 필명으로, 시인이 되기 전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한 친구의 이름이다. 반레 역시 바오닌처럼 1966년 고등학교 졸업 이후 자원 입대한 후 1975년 종전까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반레의 장편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은 베트남전쟁에서 죽은 병사 빈의 유령이 저승으로 갈 노자가 없어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를 배회하면서 살아 있을 적 “과거의 숨결을 쫓아가는 오랜 추억여행”(101쪽)을 거친다. 그러나 그 추억여행은 말이 추억이지 “세상, 인류 전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괴물과 같은”(29쪽) 전쟁에 깊숙이 연루된 것으로,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하나의 극형이 되어갔다.”(101쪽) 무엇보다 “‘베트남을 구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는 미국의 엄포는 수많은 폭탄 구덩이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약 연기로 선연하게 메아리쳤”고, 베트남의 “마을은 풀벌레조차 모두 숨을 멎은 죽음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완전히 영혼을 잃어버린 폐허의 세계가 된 것이다.”(192-193쪽) 그리하여 유령의 존재형식으로서 빈은 이처럼 미국에 의해 자행된 반문명적 절멸의 폭력으로 변해버린 “참혹한 풍경”(207쪽)의 곳곳을 또렷이 응시한다.

이러한 일종의 증언과 고발의 서사는 베트남전쟁 참전 1세대 작가가 공유하고 있는 매우 소중한 서사적 노력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반레 역시 바오닌처럼 이 서사를 전개시키는 서사적 주체로서 베트남전쟁의 유령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베트남전쟁의 유령은 이 전쟁이 종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전쟁에 연루된 곳이면 어디든지 전쟁과 관련한 유산이 남아 있고, 그것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시나브로 망각하든지 추방시켜서는 곤란하다는 문제의식을 상기시킨다. 다시 강조하건대, 베트남전쟁의 유령은 베트남의 대자연과 더불어 베트남 사람들의 삶 속에서 살고 있다.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에서도 이것은 중심 서사로 작용한다. 그러면서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끔찍하고 참혹한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베트남 병사들을 지탱하게 하는 어떤 삶의 힘이다. 이것을 비약하여 이해한다면, 세계 초강국 미국의 파상공격에 맞서 결국 승전을 일궈낸 베트남의 원천으로 인식해도 무방할 터이다. 그것은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의 곳곳에 등장한다. 반레가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항미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베트남 인민의 군대 내부에 대한 치열한 자기비판의 과정이다. 적군을 상대로 사투하고 있는 전장에서, 그것도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는 세계 초강국과 맞대면한 전선에서 절대적 상명하복이 군의 기율임을 생각해볼 때 자칫 군 내부 조직의 분열과 사기 저하로 이어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베트남 인민의 군대는 “부대 안에서 민주주의를 실현”(95쪽)하기 위해 상관의 부당하고 황당한 억지스런 명령 조치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를 한다. 그리고 부대원들은 치열한 내부 토론과 자기비판의 과정 속에서 한층 공고해진 전우애와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군 내부 조직으로 갱신한다. 이러한 군의 자기비판의 엄격성과 윤리적 염결성은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베트남인민해방군 내부에서 자행된 반윤리적 범죄――가령, 한 견습의가 부대의 기율을 어긴 채 부대의 여성을 사랑하여 그 여성은 임신을 하는데, 자신의 출세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견습의는 그 여성에게 독약을 주사하여 죽인다.――를 유령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낱낱이 그 실상을 증언하고 파렴치한 반윤리성을 비판한다. 반레는 “인민의 군대 안에 그렇게 무지막지하고 악마같은 인간”(125쪽)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전쟁 속에서 저질러진 괴물과 같은 인간의 온갖 폭력의 실체를 추문화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령 빈의 시선에 의해 재조명된 베트남 전사들이 길러온 인간의 고매한 품격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하하, 맞아, 그래, 그 누구도 폭탄에 익숙해질 수는 없는 거야. 나도 자네와 똑같아.”

사령관이 말했다.

“어떻게 익숙해질 수 있겠나!”

사령관은 자신의 팔꿈치로 옆에 앉아 있는 장교를 장난스럽게 툭치며 말했다.

“중요한 건, 해방전사로서 절대로 적들이 우리의 명예와 기세를 우습게 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다들 내 말에 동의하지?”

빈은 사령관의 언행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에게서는 관료적인 모습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아랫사람을 다그치려 들지 않았다. ‘이건 반드시 이렇게 해야 돼…… 저건 반드시 저렇게 하도록 해’ 하며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런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병사들에게 깊은 감화력으로 핵심을 짚어주었다. 그분은 단지 병사들이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할 수 있도록 마음을 북돋워줄 뿐이었다.

소대를 떠나기 전, 그분은 빈의 어깨를 감싸주며 말했다.

“내가 입대했던 당시에는 감히 지휘관에게 동지처럼 어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있었어야지. 나는 자네의 그 솔직한 기백에 깊은 감명을 받았네.”

사령관은 정치국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현재, 정치국원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병사들이 솔직한 자세로 살고 사실대로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걸세. 병사들이 거짓된 삶을 살게 되면 그 폐해가 아주 커. 작전에 실패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거짓말 때문이지. 하급자가 거짓말을 하게 되면, 상급에서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방법이 없어지는 거 아니겠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면 설정한 계획이 어그러질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은가, 정치국원 동지?”(198-199쪽)

 

사령관의 말의 핵심은 거짓 없는 진실이 전쟁을 수행하는 가운데 매우 중요한 덕목이며, 그래야만 “병사들이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할 수 있”는 마음과 용기가 생기고, 그것이 곧 베트남 해방전사의 명예와 자기존중을 드높이는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정직’, ‘진실’, ‘양심’ 등을 베트남 해방전사의 마음가짐과 실천으로 벼리고 있는 베트남 병사들이므로 “부대원들은 서로의 몸을 마치 자신의 몸과 똑같이 여겼고, 서로를 믿고 의지했으며, 때로는 남을 대신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했다.”(142쪽) 이것이 바로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일어난 지리한 일련의 전쟁 속에서도 적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고 항전하여 마침내 승전을 일군 힘의 원천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에서 주목하는 것은 베트남인민해방군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고, 또한 참혹한 전쟁이었으나 이 전쟁을 치러낸 전사로서 전쟁 영웅의 숭고미에 감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유령 빈이 아직 저승으로 가지 않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배회하면서 베트남전쟁의 안팎을 여전히 살고 있는 것은 종전 이후 분명,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으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사회 내부에 발아하면서 사회 기반의 본질이 변화”(293쪽)함으로써, 악무한의 전쟁을 치르면서도 “가슴속 귀퉁이에 변함없이 순결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292쪽)던 그 무엇을 잃고 있다는 간절함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반레는 작품의 말미에서 유령 빈으로 하여금 저승으로 가지 않고 “니윽투이 강변을 따라 계속 황천에서 방황하며 살래요.”(295쪽)라고 말하도록 하며, 다음과 같은 빈의 의미심장한 전언을 들려준다.

 

환생을 해서 더 나은 삶을 누리게 되는 걸 더는 바라지 않게 되었어요. 저는 결코 망각의 죽을 먹지 않을 거에요. 가족과 고향, 절친한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제가 살아온 날들을 잊고, 인간의 삶에서 제가 받았던 그 아름다운 정감들을 모두 잊으면서까지 얻고 싶은 것은 없어요.(295쪽)

 

그렇다. 유령 빈도 다른 베트남전쟁 유령들처럼 베트남의 대자연과 함께 베트남전쟁 안팎의 ‘경이로운 현실’을 살고 싶다. 그 ‘경이로운 현실’ 속에서 베트남의 해방전사들과 민간인들이 훼손되지 않고 순결한 영혼의 존재형식으로 “인류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특별한 호의”(279쪽)인 ‘삶’을 평화롭게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절망의 끝에서 새 희망을

2018년 4·3 70주년을 맞은 올해 제주작가회의는 ‘그 역사, 다시 우릴 부른다면’이란 화두를 전 세계에 내놓았다. 비록 때와 장소는 다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일어난 베트남전쟁은 베트남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해 ‘그 역사, 다시 우릴 부른다면’의 화두와 맞닿아 있는 래디컬한 물음을 던진다. 여기서, 󰡔제주작가󰡕(2014년 겨울호)에 발표된 다음과 같은 시를 음미해보자.

 

일찍이 어느 시인이 말했지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일본 군부가 오키나와를 조선의 성노예를 반성하지 않고

우리 군부가 제주4·3을 강정마을을 반성하지 않고

반성을 모르는 일본은 그래서 절망이다

반성을 모르는 우리는 그래서 절망이다

 

(중략)

 

오키나와가 그랬고 제주4·3이 그랬지

중국 난징이 그랬고

베트남 중부 썬미가 그랬고 빈호아가 그랬지

 

하지만 우리는 알지

제 자신을 반성하는 사람은 절망의 끝에서

새로운 희망을 본다는 것을

 

그리하여 학살에 대한 성찰은 생명을 낳고

생명에 대한 성찰은 아름다운 평화를 낳고

평화가 낳은 더 큰 평화는 화해를 낳고

화해가 낳은 더 큰 화해는 참된 진실을 낳고

진실이 낳은 더 큰 진실만이 사랑과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 김수열의 「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부분

 

돌이켜보면, 지난 세기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의 식민주의 지배는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언어절(言語絶)의 참혹한 폭력 및 전쟁을 제주, 오키나와, 중국의 난징, 베트남 등지에서 자행해왔다. 그리고 그 끔찍한 전쟁의 고통과 상처, 반인류적 전쟁의 유산은 아직도 이들의 삶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시인은 간절히 희구한다. “절망의 끝에서/새로운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죽는 날까지 자신을 돌아보고 돌아보는 거라고”.

그래서일까.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과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은 베트남전쟁의 복판을 살아온 작가들이 끊임없는 반성과 비판적 성찰이 육화 및 실천되고 있는, 기존 구미중심주의 세계문학에 균열을 내는 새로운 세계문학을 구성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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