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228항쟁과 관련소설의 역사화 양상 최말순(대만 국립 정치대학 대만문학연구소 부교수)

 

1. 228사건과 전후초기 대만상황

1947년 2월 27일에 시작되어 5월 16일까지 두 달여간 지속된 228항쟁은 대만의 전후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비극적이며 오랜 기간 대만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 2월 27일 정부기관인 專賣局의 단속반원이 담배 밀수품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폭력을 행사한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台北에서는 담배와 술의 밀매가 성행했는데 한 중년여성이 조사를 받던 도중 가지고 있던 담배 뿐 아니라 지폐도 같이 몰수당하자 돌려달라는 실랑이가 벌어졌고 단속반원이 내리친 총부리에 다쳐 선혈이 낭자했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민중들이 사과를 요구하며 단속반원을 뒤쫓았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 단속반이 쏜 총에 무고한 젊은이가 사망하게 되면서 민중들의 항의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대규모의 官民충돌로 확대된 것이다. 밀매행위의 단속과 민중에 대한 정부관원의 과격한 폭력에서 발단되었다는 점에서 228사건은 해방 직후 대만사회의 현실을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대만은 51년간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만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대국에 의한 전후 세계질서 재편 협약인 카이로선언(1943)과 이를 재차 확인한 포츠담선언(1945)의 내용에 의거해 中華民國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3년부터 중화민국정부는 여러 단계를 거쳐 각종 조사와 거점 확보를 통해 대만접수를 위한 준비를 진행했고 일본 패망 후 일제시기부터 대만과 접점을 가지고 있던 陳儀를 수반으로 하는 행정기구를 대만으로 파견했다.

종전 후 국민정부의 중국영토에 대한 복원계획에서 대만은 만주국이 있던 동북지역과 함께 光復區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전시 일본 점령 지역이었던 收復區, 국민당 통치 지역이었던 後方區와는 달리 台灣省行政長官公署라는 특별행정기구가 설치되었는데 이 기구의 행정장관인 陳儀는 警備總司令도 겸직하여 대만의 행정과 군사권을 장악했다. 기존연구에 의하면 陳儀는 국민당 내에서 중도 좌익에 가까운 정치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福建省 주석 기간의 통치에서도 三民主義 이념 중 民生主義의 실현을 경제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통해 달성하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이념의 실천수단으로 이용한 專賣局과 貿易局이 전후 대만의 경제를 부흥시키기보다는 관료들의 부정부패 온상이 되어 민중들의 원성을 샀으며 각종 산업에 대한 통제로 인민의 생계가 위협받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는 228항쟁이 일어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되어 왔는데 당시 신문에는 거의 매일 관료들의 부패행태가 적나라하게 실리고 있었다. 전매제도는 일제시기부터 시행된 것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인데 술과 담배 등에 대한 제조와 판매권을 정부가 장악하고 관료들이 중간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했으며 그 결과 대만 민간상인들의 생계에 위협을 초래했고 나아가 열악한 품질의 담배, 술 등을 유통시켜 외국제품의 밀매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앞서 본 228항쟁의 도화선이 된 밀수품 담배 단속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발단된 것이다.

당시 소위 四兇으로 불린 관료들의 부패를 포함하여 접수정권의 광범위한 부정행위와 이를 방관한 陳儀에 대해 광복과 더불어 조국으로의 회귀를 열렬히 환영했던 대만 민중들은 실망을 넘어 분노하였다. 뿐만 아니라 접수정권은 중국어에 대한 사용 미숙을 들어 각종 기관에서 대만인을 배제하거나 설령 기용하더라도 보수에 차이를 두었고 일부 관료들은 일본의 식민통치로 인해 노예근성을 가졌다며 대만인을 비하했다. 이에 맞서 대만인들은 준법정신이 결여되고 여전히 봉건적이며 부패가 만연하다고 접수정권과 外省人을 비난하면서 省籍갈등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후 대만의 산업은 피폐하고 민생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일제시기 대만인에게 생계를 보장했던 각종 공장은 거의 대부분이 도산했고 어렵게 재개되었다고 해도 기술 인력과 행정직의 8할 이상이 중국에서 온 외성인이 차지해 대만인의 실업이 증가했으며 접수정권은 이에 대해 효과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내전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한 경제통제는 오히려 대만인들의 생계를 끊어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일제시기에는 가능했던 석탄 등 민간 채광업은 정부가 연료조절위원회를 내세워 통제하면서 대만 자본가의 이익을 가로챘고, 민간 인쇄업과 糖業도 정부가 일괄 통제했으며 심지어 붓, 종이 등 문구와 교과서도 교육처가 주관하는 대만서점이 전횡하여 개인의 경영을 막았다. 특히 쌀의 대량 생산으로 유명한 대만에서 관료들에 의한 미곡 밀반출로 인해 양식이 부족한 상황이 초래되자 민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한 마디로 조국에서 파견한 접수정권의 전횡으로 야기된 경기침체와 통화팽창은 대만경제를 초토화시켰고 해방이 된지 미처 2년도 되지 않아 민심은 陳儀의 접수정권으로부터 완전히 이반되었다.

1947년 2월 27일 밀담배 단속에서 발단되어 대규모 희생으로 이어진 228항쟁은 바로 이러한 전후초기 접수정권의 실책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심각한 민생문제로 陳儀정권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고 외성인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어가던 차에 발생한 專賣局 직원의 과도한 단속과 곧 이어진 우발적 발포에 무고한 학생이 쓰러지자 마치 불붙은 나무에 기름을 끼얹은 모양새로 하루도 되지 않아 민중들의 항의와 처벌 요구가 타이베이시 전체로 확산되었다. 228항쟁 관련문서와 기록을 종합해 재구성해 보면, 27일 저녁부터 민중들은 주요 시가를 행진하며 「살인자는 목숨으로 갚으라」, 「살인자를 내 놓으라」 등 구호를 외치고 징을 울리며 장관공서로 몰려들었고 《新生報》사의 편집실로 들어와 발포사건의 전말을 보도하는 號外발행을 약속받고 해산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28일 台北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상점들은 거의 문을 닫았고 학생들도 수업을 거부했으며 사방팔방에서 민중들이 경찰서, 전매국, 무역국 앞으로 몰려들어 발포한 직원을 내놓으라고 외치며 담배, 술, 가구, 자전거, 트럭, 심지어 지폐까지 도로 한가운데 쌓고 불을 질렀다. 또한 발포사건에 대한 진상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대오도 행진을 할수록 인원수가 증가하여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장관공서 광장에 도착했을 때 더 이상의 진전을 막기 위한 발포가 또 있었는데 이로 인해 두 명의 민중이 희생되었고 수명이 다쳤다. 이어 사망수와 시위규모에 대해 정확하지 않은 소식이 퍼져나갔고 급기야 3월 2일 台北에 공전의 대유혈사태가 발생하여 이틀간 적어도 3,4천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당일 오후 민중들은 新公園 내 방송국으로 진입해 대만 각지에 이 사건의 경과를 알리고 台北 시민의 항쟁을 지원해 줄 것을 전국민에게 호소했다. 이렇게 하여 항쟁사건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치달았다.

특히 2월 28일 오후의 타이베이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 들었다. 장관공서 광장에서 울린 총성으로 흩어진 민중들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관원이나 외성인으로 보이는 制服, 中山裝, 旗袍 등을 입은 사람들과 閩南語나 일본어를 못하는 이들을 구타했고 외성인의 직원 숙사나 상점도 파괴하는 등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런 상황은 3월 1일까지 지속되었고 민간에서 주도한 228處理委員會가 조직되어 항쟁의 목표가 탐관오리의 숙청과 정치개혁에 있는 것이지 외성인 동포를 배척하는데 있지 않다고 호소했다.

외성인에 대한 폭행은 228항쟁의 면모를 族群 간의 대립으로 변화시킨 주요 요인으로 本省人과 外省人의 칭호는 이때부터 적대적으로 인식되었고 省籍모순과 분리의식으로 발전하여 지금까지 대만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건 초에 발생한 외성인 배척과 구타는 주로 두 부류의 민중들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하나는 전후 중국대륙, 남양 각지에서 돌아온 대만인 일본군 지원병, 軍伕와 軍屬등이고 다른 한 부류는 福建省 일대와 火燒島(綠島)에서 돌아온 부랑자와 깡패였다고 한다. 전자는 일본군에 의해 자의, 혹은 강제로 이차대전에 참전한 군인들로 종전 후 패전국 포로와 동등하게 취급되었고 심지어 대만인이란 특수신분으로 인해 더욱 가혹한 차별을 받은 사람들로 특히 海南島에서 비참한 경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중국의 上海, 福建, 廣東 일대를 유랑하다 대만동포의 후원으로 겨우 고향에 돌아온 경우가 많았지만 전후 대만의 경제악화로 대부분 실업상태였고 228 직전 물가폭등과 쌀 부족 상황 등이 발생하여 생활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후자인 부랑자들은 과거 일본 식민당국이 체포하여 綠島나 중국의 각 지역으로 보내 일본 앞잡이로 활용했는데 종전 후 일부가 대만으로 들어왔고 228 당시 專賣局 台北지부를 부수고 장관공서를 공격했으며 외성인을 구타하는 등 행동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다. 사건의 진전에 따라 이들 부랑자들 중에는 국민당의 특무요인으로 편입되어 복잡한 국민당내 파벌과 권력싸움에 휘말리기도 하고 치안유지를 내세우며 외성인 숙사를 공격하고 선량한 상인을 위협하는 등 만행을 저질러 결국은 중앙정부의 파병에 빌미를 제공했고 향후 진압과정에서 잔혹한 보복행위가 행해지는 심리적 요인을 제공했다. 사건이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무정부 상태에서 각지에 민간 처리위원회가 성립되어 사후처리를 논의했지만 대만인의 정치참여 확대 등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내놓은 지방자치 요구조항이 대만을 조국으로부터 분리하려는 기도로 해석되어 반란의 구실이 되었고 잔혹한 무력진압의 빌미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대만 각지에서는 크고 작은 군민충돌이 일어났다. 台北의 경우 민중들이 경찰서와 파출소에서 탈취한 무기를 소지하고 저항하기는 했지만 조직적인 무장대오가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3월 2일에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中山堂에서 대회를 열고 學生聯盟을 결성해 공격을 진행했고 원주민 등도 하산하여 회합했지만 세가 불리해 해산했다. 그러나 台北의 치안을 유지하던 학생조직은 무기탈취의 폭도로 지목되어 3월 8일 중앙군대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한편 중부지역인 台中과 彰化 등지에서는 3월 1일 참의원들이 연석회의를 통해 시민항쟁을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대정부 정치개혁을 요구했고 동시에 경찰국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과거 台灣共産黨의 당원이었던 謝雪紅(1901-1970)은 방송을 통해 청년들에게 台中으로 집결하여 항거하라고 호소했으며 林獻堂(1881-1956)과 지방의 유력인사들은 공산주의자인 그녀가 무장병력을 갖는 것을 꺼려하여 힘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등 저항 세력 간의 알력도 있었다. 3월 8일 중앙정부가 파견한 21사단이 基隆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謝雪紅이 이끄는 27부대는 외곽지역인 埔里로 이동하여 항거했지만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참가한 지도자와 학생들이 도중에 이탈하기도 했다. 따라서 3월 13일 군대가 台中에 진입했을 때는 예상보다 과격한 진압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한 민중들의 희생은 3월 8일 대규모 군대가 대만 각지로 진입하면서 생겨났다. 요새지역인 基隆과 高雄, 그리고 嘉義와 台北에서 수많은 청년과 학생들이 희생되었다. 군사진압은 3월 17일에 막을 내렸지만 경비사령부가 주도한 대만의 각 지역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주도자 색출작업인 소위 淸鄕에 들어가 사건 관련자를 면밀히 색출해 나갔다. 淸鄕의 구체적인 내용은 호구조사를 통해 관련자를 검거하고 총기를 수거하는데 있었다. 이 작업은 전국에 7개의 거점을 두고 5월 초까지 가가호호 진행되었는데 대규모의 전면적 실시, 연좌처분 원칙으로 인해 대만사회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으며 내란죄의 명목으로 많은 대만 엘리트들이 체포되거나 실종되었다. 당시 200여명에 달하는 블랙리스트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楊逵(1905-1985), 張深切(1904-1965), 莊遂性(1897-1962)등 일제시기 활동했던 대만 지식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淸鄕작업은 1950년 5월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고압적인 계엄통치 아래 228관련자는 물론 좌익인사들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색출로 대만사회는 백색테러리즘 시기로 진입했다.

이렇게 2만 여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낸 비극적인 228항쟁은 접수정권의 실책에 대한 대만민중의 절망과 분노에서 기인한 전형적인 官逼民反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省籍갈등과 모순이 격화되고 중국대륙에서 파견한 군대의 무장진압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으며 이어진 淸鄕과 백색공포, 이후 38년에 달하는 계엄으로 인해 금기가 되어 대만사회의 오랜 상흔으로 남아 있었다. 1987년 해엄 이후 228항쟁은 역사적인 자료의 정리와 체험자들의 구술을 토대로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어 가고 있지만, 현존하는 대만사회의 정치적 갈등의 근원이면서 여전히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族群 간 문제를 되돌아보게 하는 살아있는 교재라고 하겠다.

 

2. 228문학의 향방과 면모

해방 직후 중국의 대만접수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에서 발생한 228항쟁은 국가의 폭력에 의한 대규모의 사상자 발생과 이 과정에서 빚어진 族群 간의 갈등, 이후 오랜 기간 지속된 백색공포와 계엄령 하에서 금기가 되어 대만사회의 치유되지 못한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228항쟁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와 평가는 1987년 해엄 이후 가능해졌지만 문학에서는 그 이전부터 여러 형태와 시각으로 반영되고 형상화되어 왔다. 따라서 228문학은 각 시기별 대만사회의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고찰할 수 있는 좋은 소재라고 하겠다. 이절에서는 지금까지 나온 228관련 소설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여전히 대만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역사적 비극이 문학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번호

소설명

작자

간행잡지/출판사

발행일/비고

1

冬夜

呂赫若

台灣文化 2卷2期

1947.2.5

2

農村自衛隊

丘平田

台灣文化 2卷2期

1947.2.5

3

創傷

夢周

中華日報

1947.4.20

4

台灣島上血和恨

伯子

文藝生活14期

1947.5

5

黎明前的台灣

吳濁流

學友書局

1947.6 일본어

6

波茨坦科長

吳濁流

學友書局

1948.5 일본어

7

沉醉

歐坦生

文藝春秋 5卷5期

1947.11.15

8

鵝仔

歐坦生

文藝春秋 7卷4期

1948.10.15

9

三月的媽祖

葉石濤

台灣新生報 副刊212期

1949.2.12 일본어

10

偸渡者日記;濁水溪

邱永漢

大衆文藝 1月號

1954

11

香港

邱永漢

大衆文藝 8-11月號

1955

12

鄕村的敎師

陳映眞

筆匯 2卷1期

1960.5

13

梅春娘

白駒

文壇社

1964 장편

14

無花果

吳濁流

台灣文藝 19-21期

1968 장편

15

台灣哀史

林文堂

山崎書房

1972 장편 일본에서 출판

16

台灣連翹

吳濁流

台灣文藝 39-45期

1973 장편

17

老人

陳若曦

聯合報副刊

1976.12.26

18

陳若曦

明報月刊 133-149號

1977.1-1978.5

19

微細的一線香

陳鏡花

前衛 1期

1978.5

20

路口

陳若曦

中文月報2,3號

1980

21

小說

李喬

文學界 1期

1982.1

22

告密者

李喬

文學界 4期

1981.10

23

黃素小編年

林雙不

自立晩報 副刊

1983.7.16

24

鈴璫花

陳映眞

文季 3期

1983.8

25

泰姆山記

李喬

台灣文藝 86期

1984.1

26

叛國

吳錦發

文學界 10期

1984

27

月印

郭松棻

中國時報 人間副刊

1984.7.21-30

28

稻穗落土

蔡秀女

中國時報 人間副刊

1985.12.7-8

29

夜琴

李渝

中國時報 人間副刊

1986.1.5-7

30

西庄三結義

林深靖

台灣文藝 99期

1986.3

31

返鄕箚記

蕭颯

洪範書店

1987.5 장편

32

抗暴的打猫市

宋澤萊

台灣新文化 9期

1987.6

33

黯魂

楊照

時報文化出版

1987.9

34

煙花

楊照

時報文化出版

1987.9

35

寡婦歲月

許振江

愛華出版社

1987.10

36

風雪的底層

林文義

文學界 24期

1987

37

將軍之夜

林文義

南方 15期

1988.1

38

百家春

陳雷

自由時代

1988.8

39

阿公,海漲囉!

林文義

自立晩報 副刊

1988.10.1-3

40

幌馬車之歌

藍博洲

爾雅

1989.3.

41

葉石濤

台灣時報 副刊

1989

42

泥河

陳燁

自立晩報

1987.5 장편

43

浪淘沙

東方白

前衛出版社

1990 대하장편

44

一九四七高砂百合

林燿德

台灣春秋16-22期

1990 장편

45

紅鞋子

葉石濤

前衛出版社

1990

46

迷園

李昻

麥田出版社

1998 장편

47

調査-敍述

舞鶴

爾雅

1993

48

反骨

廖淸秀

遠景出版社

1993 장편

49

怒濤

鍾肇政

前衛出版社

1993 장편

50

埋寃一九四七埋寃

李喬

海洋台灣

1995 장편

51

白水湖春夢

蕭麗紅

聯經出版社

1996 장편

52

後山日先照

吳豊秋

躍昇文化

1996 장편

53

台灣七色記

姚嘉文

自立晩報文化出版社

1987 장편

54

彩妝血祭

李昻

聯合文學 13卷4期

1997

55

奔跑的母親

郭松棻

七十年代 172期

1994.5 홍콩에서 출판

56

雪盲

郭松棻

知識份子 1卷2期

1995.1 미국에서 출판

57

今夜星光燦爛

郭松棻

中外文學 25卷10期

1997.3

58

洗不掉的記憶

田雅各

晨星

1992

59

十日談

朱天心

遠流出版社

1989

60

杷城春櫻

陳佩璇

南投縣

1999

61

二二八台灣小說選

林雙不

自立晩報文化出版部

1989/1,2,4,23,25,29,31,36,45수록 소설집

62

無語的春天-二二八小說選

許俊雅

玉山出版社

2003/2,4,9,23,24,29,31,34,52,54수록 소설집

63

文學二二八

曾健民 等

台灣社會科學出版社

2004/1,2,3,4,7,8수록 소설집

64

槍聲

胡長松

前衛出版社

2005 閩南語소설집

 

 

위의 표에 제시된 228관련 소설의 면모는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사건에 대한 생생한 기록에 중점을 두고 있는 소설이다. 우선 시기적으로 228과 동시에 나온 伯子의 〈대만섬의 피와 원한〉(4)을 들 수 있는데, 소설 속 주인공은 陳儀정부가 들어온 후 실업자가 되었다가 아는 이의 소개로 겨우 전매국의 창고간수로 일하게 되지만 서무과장의 부정한 행위에 동조하지 않았다가 중국어를 제대로 모른다는 핑계로 해고된다. 이에 대만인들이 모이는 곳에서 外省人을 욕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사건이 발생하여 격분한 군중 속에 섞여 자신을 해고한 전매국의 과장에게 보복을 한다. 하지만 곧 이어 진입한 국민정부의 군대가 台北를 포위하고 대규모의 체포 작전을 펼치자 이를 피해 도망가던 도중 총에 맞아 사망한다는 내용이다. 소설은 공포의 총소리가 台北를 둘러싸는 장면에서 끝나는데 전후 초기 접수정권의 실정과 높은 실업율,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갈등이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228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일본인의 노예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속아서 일으킨 소요라는 관방의 시각과 달리 대만 소시민이 직접 겪은 체험에 기초하여 사건의 진실에 보다 접근된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吳濁流(1900-1976)의 《무화과》(14)와 《대만 개나리》(16)는 소설의 형태를 취하기는 했지만 사건의 상세한 기록으로 유명하다. 당시 기자였던 작가의 예리한 눈으로 사건 발생 전의 긴장된 분위기와 가장 근거리에서 직접 겪은 내용을 기록한 자서전 형식이다. 소설에서 228의 원인으로 접수정권의 여러 부당한 행정 조치와 관료들의 태도를 들었으며 악화되는 민생과 省籍마찰로 인해 열렬하게 조국을 맞이하던 대만인들이 실망에서 분노로 돌아서게 되는 과정과 심리상태를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 정부의 미곡징수와 배급금지로 미가가 폭등하고 기타 생필품의 가격도 상승하면서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경과와 각종 부정부패를 직접 목격한 본성인이 더 이상 외성인 경찰과 관료들을 믿지 못하는 심리, 그리고 앞에서는 평화적인 처리를 약속하고 뒤로는 군대를 불러들여 폭력적인 무장진압을 감행한 陳儀정부에 대한 분노와 사건이 무마된 후에도 이어진 백색공포의 사회 분위기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淸鄕조치가 대만인 사회에 가져온 집단적인 공포의 기억에 대한 증언은 228을 바라보는 吳濁流 소설의 주요한 시각이라고 하겠다.

둘째, 사건이 남긴 심리적, 정신적 상처에 초점을 맞춘 소설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林雙不(1950-)의 〈黃素의 일생〉(23), 楊照(1963-)의 〈煙花〉(34)와 李渝(1944-2014)의 〈夜琴〉(29)을 들 수 있다. 이들 소설의 주인공들은 직접 사건을 경험했거나 혹은 수난자의 유족으로 홀로 트라우마를 견디는 모습을 보여준다. 〈黃素의 일생〉은 한 젊은 여성이 저항할 수 없는 권력으로 인해 삶을 빼앗겨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사건 당시 결혼을 앞둔 19세 소녀였던 黃素는 장래 시가에 혼수로 가져갈 식칼을 사는 도중에 소란이 발생하여 엉겁결에 칼을 들고 피신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녀는 감옥에서 온갖 정신적, 육체적인 고문에 시달리고 일년 후 형장에 끌려 나와 총살되기 직전 무죄로 석방되지만 집으로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어머니의 실종과 여자정치범이란 죄명이었다. 감옥과 형장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온전한 정신을 잃어버린 그녀는 그 후로 20년을 암흑 속에 살다가 결국은 기차에 치여 생을 마감한다. 소설은 결혼을 앞둔 소녀의 설레고 부푼 마음, 앞날에 대한 기대와 잔혹한 진압, 고문을 대비시켜 강렬한 비극성을 더하고 있으며 역사의 큰 물결이 개인의 일상과 인생에 가한 충격을 살아남은 자의 정신적 황폐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煙花〉는 228 수난가족의 이야기로 사건처리위원회에 참가한 부친이 시체로 발견되지만 당시의 공포 분위기에서 장례도 치를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조부모를 비롯해 가족들에게 남은 마음의 상처와 그 이후에도 원망을 말하지 못하고 가슴으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억울함 등을 드러내고 있다. 소설은 이 일로 가족이 해체되자 친척들과 연락을 끊고 생계를 위해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아 살아가는 처지로 전락한 주인공 여성의 기억을 통해 과거를 소환해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안개를 걷고 희생자의 무덤에 피어나는 붉은 꽃을 의미하는 煙花는 희생자들이 흘린 붉은 피를 상징하는 동시에 그 희생이 초래한 주인공 여성의 현재처지를 말해준다. 〈어두운 혼〉(33) 역시 수난자 유족의 심리적인 상처와 대를 이어 이어지는 트라우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夜琴〉의 주인공은 중국대륙에서 온 여성으로 국공내전에서 부친을 잃고 대만으로 건너와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꾸리지만 끝났다고 생각했던 총성을 다시 듣게 된다. 그녀와 남편은 대만인 가정의 보살핌으로 겨우 살아나지만 결국 외출했던 남편은 전쟁에서 죽어간 아버지와 같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소설은 사건이 일어난 지 40년이 흐른 후의 회상으로 시작되는데 그 세월 동안 무고무친한 타지에서 쓸쓸하고 힘들게 지내 온 여성의 마음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여성인물을 내세운 소설은 대부분 여성을 族群和合의 매개체로 그리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해엄 후 나온 여성작가의 소설에서는 보다 복잡하고 개별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李昻(1952-)의 〈彩妝血祭〉(54)는 여성의 관점으로 228을 다시 쓰고 있는데 남성작가들이 해석한 것과 달리 기이한 분위기와 음침하고 처참한 색채를 가미하여 228에 대한 개인적 기억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중년 여성은 228 수난자 유족으로 해엄 후 여성의 정치적 진출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항쟁시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무장한 사람들에게 끌려간 남편으로 인한 슬픔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동성애자 아들이 있다. 그녀의 아픔은 국가의 권력 뿐 아니라 가부장적 제도와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말에서 에이즈로 죽음을 맞이한 아들을 곱게 화장해 주는 것으로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228의 비극적 기억을 떨쳐낸다.

앞에서 본 소설이 수난자나 유족인 여성인물들의 심리를 다루고 있는 데 비해 사건 직후에 나온 葉石濤(1925-2008)의 〈삼월의 媽祖〉(9)는 경찰에 쫓겨 농가로 피신한 청년의 심리를 그리고 있는데 정확한 時空은 드러나지 않지만 228사건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혀지고 있다. 이 소설은 장관공서의 기관지인 《台灣新生報》에 실려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사건의 전개보다는 인물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도주에서 오는 정신적 피폐를 媽祖라는 민간신앙에 의지하여 견디는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셋째, 사건의 발생이나 당시상황에 대한 시각 차이를 보여주는 소설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앞에서 본 伯子의 소설이 228항쟁에 가담하여 희생되는 본성인 청년을 그리면서 접수정권의 실정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비슷한 시기에 나온 夢周의 〈상처〉(3)은 대만으로 신혼여행을 온 외성인 부부가 閩南語와 일본어를 하지 못해 남편은 구타를 당하고 겨우 본성인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국군의 진입이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가 정리되는 계기였다고 하여 관방과 같은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반공시기에 나온 白駒의 《梅春娘》(13) 역시 공산당과 부랑자들에 의해 민중봉기가 일어났다는 관방의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2월 27일의 사회동란은 실업자, 퇴역군인과 현지의 깡패들에 의해 생긴 일이며 공산당이 잔혹한 수단으로 무고한 민중을 살상했다고 하면서 대만인의 봉기를 폭도들의 동란이라 규정하고 군대파견과 진압을 합리화했다. 한편 周靑의 〈烽火鐘聲〉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계급모순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그리고 있는데 사건의 원인을 관의 압박으로 일어난 민중의 반란으로 보고 주인공이 무장하여 관군과 대립하고 심지어 《延安解放日報》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나오는 등 중국대륙의 인민투쟁과 연계하여 서술하고 있다.

넷째, 앞서 본 대로 228항쟁은 중국에서 온 접수정권의 실정에서 기인되었고 격화된 省籍모순과 갈등이 기폭제로 작용했다. 따라서 이 문제는 향후 대만의 정치와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러한 정치이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邱永漢(1924-2012)과 林文堂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전자의 자전체 소설인 《밀항인 수기》, 《濁水溪》(10), 《홍콩》(11)등은 국민당 정부의 만행과 봉건적인 착취, 진압과정에서 보여준 국민정부 군대의 잔혹성, 사건 후의 철저하고 강압적인 조사에 초점을 맞추어 국민당 정부와 군대를 가해자로 대만인을 피해자로 대립시키는 구도로 해석하고 당시 미국의 주도 하에 대만을 유엔에 신탁통치하려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기하고 있는 등 중화민국의 영토로 편입된 이후의 대만 현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林文堂의 《台灣哀史》(15)는 더욱 분명하게 蔣介石정권에 대한 비판과 대만독립의 정치이념을 드러내고 있는데 광복 후 대만인의 조국에 대한 기대가 실망과 분노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접수정권의 관료와 중국인에 대해 매우 노골적인 수사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다섯째, 해엄 후에 나온 장편소설인 《反骨》(48), 《白水湖春夢》(51), 《귀향일기》(31), 《흙강》(42), 《浪淘沙》(43), 《1947년에 원한을 묻다》(50), 《怒濤》(49)등은 각각 다루고 있는 시기와 범위는 다르지만 일제시기부터 전후까지의 대만 근현대사의 시각과 흐름에서 228사건을 조망하고 있다. 이들 소설은 그간 금기시 되어왔던 사건이었던 만큼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방식을 채택하거나 가족사적 양식을 채택해 대만인이 주체인 역사인식을 보여주며 그간 관방에서 제기한 공산당과 좌익분자의 활동이 대규모의 군대파견과 진압으로 이어졌다는 논리와는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면서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전체적으로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과 多族群 대만사회의 미래를 전망하는 방향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나와 있는 세 권의 228문학선집(61,62,63)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들 문학선집은 전후 약 15년의 시간차를 두고 발간되었는데 출판시기, 정치적 분위기와 사료의 출토와 유통, 관련 소설의 지속적인 창작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상당히 다른 선집을 했으며 그에 따른 평가도 다르다. 우선 세 권에 공동으로 수록된 작품으로는 〈농촌 자위대〉(2), 〈대만섬의 피와 원한〉(4) 두 편인데 전자는 228사건이 일어나기 전 해방직후 대만사회의 불안과 무질서를 그리면서 무장저항을 결심하는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곧 있을 대규모의 충돌을 예고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후자는 앞서도 보았듯이 사건과 거의 동시에 나온 것으로 가장 근거리에서 사건의 발생과 상황을 그려 228문학의 서곡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을 통해 228의 발생 원인과 실제 상황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편집의도를 읽을 수 있다.

1989년 소설가 林雙不이 편집한 《228대만소설선》(61)과 2003년 연구자 許俊雅가 편집한 《말 없는 봄날-228소설선》(62)은 앞선 두 작품 이외 〈黃素의 일생〉(23), 〈泰姆山記〉(25), 〈煙花〉(34)가 중복으로 실려 있다. 〈泰姆山記〉(25)는 일제시기 문인인 呂赫若(1914-1951)의 전후초기 무장저항 기지건설로 희생된 행적을 소재로 하여 인간과 대자연의 관계로까지 사고를 끌어올려 작가들에게 새로운 창작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으로 각 선집에 단독으로 실린 작품들을 통해 각각의 편집의도와 228사건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첫 번째 선집인 《228대만소설선》(61)은 직접적으로 228항쟁을 반영한 작품을 선정하여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를 문학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宋澤萊(1952-)의 〈항쟁의 민슝시〉(32)는 몽환적 리얼리즘 기법으로 半山 형제가 대만을 팔아 치부하고 출세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편집자는 閩南語의 대량사용이 민족의 자존을 건립한 것이라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林深靖(1961-)의 〈西庄三結義〉(30)는 228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대륙에서 건너 온 사람들의 만행으로 촌민들이 대거 체포되어 30년간 소식이 전무하다는 내용으로 오랜 기간 금기시되어 후세대들에게 잊어지게 된 과정을 알리고 있다. 林文義(1953-)의 〈바람과 눈의 저층〉(36) 역시 228사건을 정면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남녀가 이 일로 인해 감옥으로, 해외로 오랜 기간 헤어지게 되는 비극과 잔혹한 살육이 가져온 기억 저층의 상처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葉石濤의 〈붉은 신발〉(45)는 옥중에서 죄목을 엮는 과정에서 228이 드러나는 형식을 택하고 있는데 외성인과 본성인이 대만섬에서 생활하는 한 이미 운명공동체이며 따라서 상호 협력하여 대만인의 대만을 건설하자는 미래의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수록 작품의 성격에서도 드러나듯이 《228대만소설선》(61)은 대만 민중의 입장에서 통치자인 국민당 정권이 40여년간 228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한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일반 사료와는 다른 감정적 가치가 있는 소설로써 부드럽게, 우회적으로, 측면에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더 큰 공명을 이끌어 내며 동시에 각기 다른 차원의 계시를 제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두 번째 선집인 《말 없는 봄날》(62)은 앞의 선집에 비해 228사건을 대하는 성별, 세대 간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吳豐秋(1942-)의 《後山日先照》(52)는 族群의 융합, 용서와 화해, 약세 계층에 대한 관심을 강조한 작품으로 대만섬에서 살아가는 모든 族群과 일본인, 심지어 미국인도 차이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蕭颯(1953-)의 일기체 소설 《귀향일기》(31)는 평범한 서민의 입장에서 일제식민과 중국 접수정권의 연이은 통치가 가져온 대만인의 고통을 담담하게 쓰면서 국가가 강해져 다시는 전란이 발생하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 외 이 소설집에는 앞서 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夜琴〉(29)과 〈彩妝血祭〉(54)를 수록하고 있다. 첫 번째 선집이 문학으로 역사를 알리는데 초점이 있었다면 이 선집이 나온 2003년은 이미 공식적인 228기념활동과 연구가 진척되어 사건의 성격이 폭정에 대한 항거와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으로 평가받던 때였다. 따라서 228관련 소설 중 여성의 관점을 보여주는 작품을 선정하여 또 다른 시각을 개척했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남성작가의 228소설은 사건의 발생원인과 탐색, 사건의 의미, 역사의 진상, 정치와 국가에 대한 정체성의 탐구에 중점이 있다면 여성작가는 「수난자 유족의 정신과 마음의 상태, 평범한 서민의 일상, 역사적 기억의 허와 실, 역사적 고난에 대한 구원」등의 내용에 치중하여 보다 다원적이고 입체적인 역사의 현장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소설 속의 여성 역시 남성작가의 손에서 국가의 수난으로 형상화되거나 족군 화합의 매개체로 기능해 왔던 것과 달리 가부장제도와 국가권력의 공모가 여성 고난의 원인임을 밝히고 주의와 이념이 가져온 일상과 평화의 파괴를 고발하고 있다.

세 번째 선집인 《문학228》(63)은 소설 뿐 아니라 신시, 고전시, 보도문학, 희곡, 산문 등 기타 장르와 중국대륙, 홍콩에서 나온 작품도 포함시켜 새롭게 또 전면적으로 228을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소설은 모두 6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앞서 중복된 2편과 이미 살펴본 夢周의 〈상처〉(3) 이외 歐坦生(1923-)의 〈숙취〉(7)는 부상당한 외성인 남성이 어떻게 자신을 돌봐 준 대만인 여성을 기만하는지를 그리고 있고, 〈거위〉(8)는 본성인 남자아이가 애지중지하던 거위를 이웃집 외성인 관료의 아내가 트집을 잡아 요리해 먹자 이에 분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呂赫若의 〈겨울밤〉(1)는 전쟁 시기 일본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간 남편을 둔 대만 여성이 생계를 꾸리고자 술집을 전전하고 대륙에서 온 남자에게 놀림과 사기를 당하는 내용이며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총성은 228사건이 임박했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 선집의 특징은 편집인이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228문학이 「창작시기와 정치이데올로기, 族群 감정 등 여러 인소로 인해 천차만별이며 심지어 어떤 작품들은 이미 고도의 정치적 토템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되도록 새로 발굴된 사료에 힘입어 사건 전후에 창작된 소설을 선정하여 보다 역사적 진상에 가깝고 직접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 선집은 228사건의 후일담 소설을 배제하고 사건 당시의 상황을 근거리에서 반영한 작품을 선정한 결과 省籍갈등보다는 부정한 공권력에 함께 대항하는 당시 민중들의 항쟁이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앞의 두 선집이 국민당 정권에 대한 비판과 대만인의 시각을 중시한데 비해 228사건을 「1946년부터 1949년에 이르는 전 중국인민의 장개석과 부패정권에 대한 반대, 민주와 평화건국을 요구하는 민주운동의 한 부분이며, 구중국의 지주계급, 관료자산계급과 전국의 피압박 민주인민 간의 모순과 투쟁의 일환이지 절대로 외래의 중국정권과 외성인이 대만인에 대해 행한 식민압박의 통치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로써 이 선집의 출간 목적이 대만학계와 문화계에 운위되고 있는 대만민족주의론, 국민당에 의한 재식민 담론, 나아가 228이 대만독립의 근거로 제기되는데 이의를 표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228소설은 창작된 시기, 작가의 성별, 체험여부, 정치이데올로기에 따라 다양한 인식과 평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비록 228로부터 이어져온 본성인과 외성인의 대립, 또 그것이 가져온 부정적인 일면이 대만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국가권력에 대한 민중의 항쟁과 대만에 거주하는 모든 구성원의 공동체의식은 228문학 속에서 매우 적극적인 의미로 그려지고 있다.

 

3. 《1947년에 원한을 묻다》의 역사인식과 미래지향

《1947년에 원한을 묻다》(50)은 지금까지 나온 228관련 소설 중 가장 집중적이고 세밀하게 사건 당시를 재현하고 있는 장편역사소설이다. 상하 두 권으로 모두 74만자에 이르는 이 소설은 유명작가인 李喬(1934-)가 약 10여년 간의 자료수집과 3년 이상의 창작기간을 걸쳐 1995년에 출판한 것으로 228문학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李喬와 그의 소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나와 있는데, 1959년 첫 단편을 발표한 이래 지금까지 약 200여 편의 단편소설과 10편 이상의 장편, 대하소설로 불리는 《寒夜三部曲》, 그밖에도 10권 이상의 문화비평과 문학비평집을 출판한 영향력 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 인간의 내면과 속성을 해부하는 모더니즘적 경향에서 후기로 갈수록 대만의 현실과 역사로 확대하여 대만민족의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작품의 배경 역시 자신의 고향에서 시작하여 점차 대만 각 지역의 광범위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특히 큰 스케일과 긴 호흡으로 각 시기 대만의 역사를 그려낸 《寒夜三部曲》, 《西來庵 결의》, 《1947년에 원한을 묻다》 등은 대만 현대소설의 큰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 장편역사소설은 일본의 식민지로 할양된 1985년을 기점으로 향후 100년간의 대만역사를 그리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수난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16년 일본 식민자에 항거하여 일어난 西來庵사건과 전체 일제시기를 조망한 두 장편에 이어 전후 대만역사의 전환점이 된 228사건을 그린 《1947년에 원한을 묻다》(50)은 식민지시기부터 전후까지 이어지는 대만인들의 외부 식민자에 대한 항거와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수난의 역사를 온전하게 그려내었다. 작가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1947년에 원한을 묻다》(50)은 특히 역사를 어떻게 소설에 배치할 것인가를 두고 오랜 고민을 했다고 하는데 상권은 228의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방식을 택해 민중항쟁이 있었던 곳을 따라가며 거의 모든 현장을 세세하게 그리고 있다. 상권에 등장하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실제사실과 동일하며 다만 남녀 주인공만 허구적 인물을 내세워 228항쟁사건의 시공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달리 하권은 두 가상의 인물을 중심으로 228사건이 이들에게 미친 생활과 심령 상의 영향을 추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사건의 진실과 사건이 대만인에게 미친 영향을 드러내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매우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1947년에 원한을 묻다》(50)의 구조를 보면 우선 대립적인 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불합리하고 준칙이 없는 중국인이고 다른 하나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대만인으로 봉건성이 남아있는 낙후된 중국과 현대화된 대만을 대립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이 차이는 해방 후 대만인이 중국에서 온 접수정권을 대하면서 인지된 것이고 228사건을 겪으면서 체화한 것으로 그려진다. 즉 대만인의 입장에서는 외부에서 온 낙후된 중국의 개입 때문에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이 결코 자립과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험에서 온 이러한 인식은 해방 직후의 감격과 조국에 대한 열망이 실망과 분노로 변해가는 과정과 맞물려 환상 속의 중국과 구체적인 중국 간의 극심한 차이가 대만인이 겪는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낙후된 중국이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전, 즉 일본패전 후부터 접수정권이 파견되어 오기 전 흔히 「역사의 眞空期」라고 불리는 극히 짧은 몇 달의 시간이 대만인들에게는 평화롭고 희망에 찬 진정한 해방이었다는 것이다. 대만인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사회질서와 평화를 유지하여 현대국가의 자립적인 면모를 보여 준 이 시기에 대해 소설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보여준다. 반면 접수정권의 실정으로 발발한 228이후를 중국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대만인의 자립도 불가능한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점으로 설정하고 있다.

소설의 전반부는 이 시작점인 228사건에 대해 35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매우 자세하게 그리고 있는데 각지에서 개별적,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관방의 잔혹한 진압에 대한 중복적인 묘사는 향후 오랜 기간 대만사회 전체가 처하게 될 자유 없는 감옥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복선으로 기능한다. 후반부는 허구의 인물인 남녀 주인공 林志天과 葉貞子가 겪는 228이후에 주력하는데 전자는 무장 항쟁을 벌였던 台中 27부대의 간부로 사건 직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후자는 군인과 헌병의 공격을 받은 소위 中山堂사건의 수난자로 힘든 인생을 살아간다. 즉 상권이 1947년 초반 두 달여간의 비극적 상황의 모든 장면들을 시간대별, 지역별로 하나하나 추적하며 나열했다면, 하권은 두 인물이 비극적 경험 이후 지나온 반세기를 추적하면서 228이 대만사회에 끼친 막대한 영향과 동시에 인물들의 변화를 통해 대만사회의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즉 소설의 주제는 이 두 인물의 처지와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고 하겠다.

林志天은 사건 이후 체포되어 갇힘으로써 수십 년 간 유형의 실제 감옥에서 신체적인 자유를 박탈당하며 그의 애인과 가족들은 국민당 特務의 감시를 받는 무형의 감옥에서 정신적 자유를 잃고 살아간다. 이는 대만이 중국의 통치아래 장소와 처지를 막론하고 감시와 통제를 받는 소위 집단 수용소 같은 감옥상황이 되었음을 드러낸다. 林志天의 이러한 囚人상태는 국가권력에 의한 신체적 압박과 정신적 구속을 의미하는데 비해 葉貞子의 경우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소위 自囚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국민당 군경이 항쟁에 참가한 학생들을 진압한 중산당 사건에서 생존하기는 했지만 심문도중 중국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한 상태로 갖은 방법으로 낙태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아이를 낳아 키운다. 이후 교사로서 국민당 정부의 교육지침을 성실히 수행하며 표준적인 중국인이 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녀의 이러한 행위는 외력을 내화하는 현상으로 외부에서 가해진 가치를 강박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상태이며 언뜻 보기에는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 이성적 사고를 거친 선택이 아니라 무형의 압력 아래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 두 인물은 감옥과 사회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고와 심리의 변화를 보여준다. 林志天은 228 당시 친구의 밀고로 감옥에서 17년의 세월을 보내는데 초기에는 고문과 학대를 당하고 이어 같은 처지의 수인들과 공산주의, 무산계급사상 등 사상투쟁을 겪으며 옥중에서 보고 들은 바를 토대로 그간 환상으로 받아들였던 중국을 버리고 대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옥중에서 겪은 여러 사건은 그에게 소위 중국성에 대한 허상을 분명하게 깨닫고 대만의 현실을 직면하는 변화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몸담았던 27부대의 동료이자 친구가 옥중에서 해준 이야기인데 자신들을 이끌었던 謝雪紅이 중국에서 地方主義를 도모한다는 죄목으로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지방주의의 죄목이란 謝雪紅이 말한 진정한 공산당원이 되기 전에 정정당당한 대만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 사실은 공산당원과 대만인의 관계에 대해 모호한 인식에 머물러 있던 林志天에게 소위 중국과 대만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후 이름을 志天에서 志台로 바꾸는데서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그는 대만의 현실과 토지에 발을 디딘 대만독립 주장자로 거듭나게 된다. 林志天은 이상과 포부 뿐 아니라 행동하는 실천력을 가진 대만청년으로 일제시기에는 일본에, 228시기에는 접수정권에 대항해 왔지만 마음속에는 늘 중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17년간의 오랜 옥중생활에서 중국성에 대한 허상을 깨고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갖게 되는 것이다.

감옥이 전체 대만을 표상하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志天을 지배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폭력이라면 이와는 달리 교육과 매체를 통한 전방위적 사회통제와 장악으로 통치자의 가치관을 주입하여 통치자에게 자아정체성을 귀속시키게 만드는 지배방식도 있다. 이는 葉貞子의 생활을 통해 보여 지는데 그녀는 낙태에 실패하여 폭행의 결과이며 미움의 결정체인 아들 浦實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이는 곧 그녀의 상황이 미움과 사랑이 동시에 존재하는 모순의 상태에 놓이게 됨을 말한다. 아들을 볼 때마다 악몽이 떠오르지만 돌봐주어야 할 어린 생명이기에 버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의 고향인 苗栗, 학창시절을 보낸 台北를 떠나 편벽된 지역인 花蓮으로 떠난다. 이는 貞子가 자학과 자아망명의 방식으로 이 모순의 상태를 헤쳐 나가고자 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데 花蓮은 閩南人과 客家人, 그리고 原住民이 섞여서 살아가는 지역으로 多族群 사회인 대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貞子는 이곳에서 오랜 시간 교사로 근무하며 국민당 정부 교육의 대리자일 뿐 아니라 중국식 의복과 음식, 생활방식을 고수한다. 원래 일본문학을 좋아하고 정신적인 위안을 얻었으나 이제 그에게 가해자와 다름없는 중국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그 가치체계에 편입된다. 표준 국어를 연습하고 대만인들의 국어발음을 질책하며 아들에게도 강요한다. 당시 강요된 국어정책은 단지 표준어의 보급 차원을 떠나 대만인에게 열패감을 안겨주었는데 따라서 貞子의 이러한 철저한 국어사용을 위한 노력은 그녀가 얼마나 철저하게 중국에 동화되어 대만인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해 왔는지를 잘 말해 준다. 일본식 이름인 貞子에서 중국식의 貞華로 바꾸는 것도 이런 맥락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자기부정은 외부의 힘, 즉 중국인으로부터 또 한 번 폭행당할 뻔한 일을 이를 겪으면서 전환의 계기를 마련한다. 이 사건은 아무리 노력하여 중국 정체성을 획득하더라도 결코 중국인이 되지 못한다는 현실을 그녀에게 일깨워주었고 나아가 중국성을 주입시켜 키웠던 아들이 대만토지와 현실에 대한 정체성을 보여주면서 중국에 대한 환상을 떨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며 이름을 貞華에서 다시 貞子로 바꾼다. 소설의 마지막은 일류 고등학교에 합격한 아들과 함께 다시 대만의 심장부인 台北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있어 그녀의 자아 정체성이 완성되었음을 시사한다.

貞子라는 인물은 국민당 정부의 강력한 지배 시스템에서 자신을 잃고 살아가던 대만인을 대표하는 동시에 객가인 여성으로서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며 포용력을 발휘하는 대만인의 미래상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그녀가 대만사회의 다양한 族群이 섞여 살아가는 花蓮에서 불행으로 잉태한 아들을 통해 자신의 대만인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은 대만이란 장소의 비극적 특징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구성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대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아들 浦實은 축복받지 못한 불행한 출생과 모친의 모순적인 심리상태 하에서 자라났으며 외부로부터도 雜種이란 놀림을 받으며 지내는 소외된 존재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처지는 그를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고 자신을 놀리는 소위 純種들과 싸우며 자신의 독특한 신분을 인식해 간다. 그것은 바로 수백년 지속되어온 외부의 식민자와 침입자에 의해 잃어버린 대만인이 자신을 되찾고 자신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상실감을 축출하는 과정을 대변하는 것이다. 또한 나아가 자신을 잃고 중국성에 동화되어 있는 모친을 각성시킴으로써 浦實이 표상하는 것은 바로 대만인 정체성임을 알 수 있다. 貞子가 자아망명으로 택한 변두리 花蓮이 浦實에게는 대만의 각종 언어를 배울 수 있는 토양이 되었고 독립심과 자신감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하는 토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가 새로운 대만인이란 점이 분명해진다. 갓 청년기에 접어든 이 젊은 대만인이 변두리에서 중심부로 진전하는 것으로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바로 그가 대만의 주인임을 상징하고 있다고 하겠다. 浦實이 모친에게 하는 「저는 제가 무슨 죄가 있거나 부끄럽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죄가 있다고 여기시면 아들인 저도 죄가 있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입니다. 자기에게 잘못이 있다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는 말은 지난 시기 대만이 침략당하고 점령당한 역사는 결코 대만의 잘못이 아니며 오직 당당하게 이러한 자신을 지켜 나갈 때만이 부끄럽지 않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浦實의 이러한 잡종성의 인정은 대만의 다양한 族群과 다원적인 문화를 오롯이 대만의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으로 풀이된다. 작자는 이런 생각을 실제 창작에도 그대로 적용시켜 표준 중국어와 대만어, 객가어 뿐 아니라 일본어까지 당시 대만인의 실제 언어상황을 소설에서 구현하고 있다.

이로써 李喬의 소설 《1947년에 원한을 묻다》(50)이 228사건의 상세한 묘사와 사건 이후 대만인의 지속된 고난은 물론 이를 통해 대만인의 자아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방대한 분량의 이 소설은 사건 후의 대만인의 정신사인 동시에 대만의 토지와 현실에 기반한 대만인상을 제시하여 228이란 역사적 비극을 대만의 미래를 설계하고 전망하는 밑거름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허구성을 혼합한 이러한 형식은 국민당 정부의 오랜 통치로 잊혀졌던 대만인의 역사경험을 사실 그대로 복원하여 독자에게 전달하면서도 작가가 지향하는 역사인식과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하겠다. 앞 절에서 보았듯이 228사건의 문학화는 각기 다른 족군 신분, 개인적 체험과 정치이데올로기에 따라 매우 다른 해석과 지향을 보인다. 그중에서 《1947년에 원한을 묻다》(50)는 다루고 있는 내용과 시간의 방대한 규모는 물론 작가의 인지도, 독특한 소설구성 등에서 대만문단의 호평을 받고 있는 중요한 소설이기에 228사건에 대한 대만인의 인식을 살펴보는 하나의 예로 제시해 본 것이다.

 

4. 결어

이상 1947년 해방 직후에 일어난 대만의 비극적 역사인 228항쟁의 전말을 소개하고 이 항쟁이 문학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를 전반적으로 고찰했으며 그중 대만문단의 중요작가인 李喬의 장편소설인 《1947년에 원한을 묻다》(50)을 대상으로 228문학의 역사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228항쟁은 대만 현대사에서 주요한 분기점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일본 식민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중국 접수정권의 통치가 시작되는 시대의 전환기이면서 또한 그로 인해 중국과 구별되는 대만인 의식을 갖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 지금까지 대만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대만은 광복을 맞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후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중국으로 귀속된 대만에는 국민정부가 파견한 특별행정기구가 설치되어 접수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곧 접수정권이 보여준 정치, 경제면에서의 실정, 대만인에 대한 차별대우와 경멸어린 시선, 매일 터져 나오는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조국회귀를 열망하던 대만인들에게 실망과 분노만 안겨주었고 급기야 228이란 관민간의 충돌로 비화되었다. 약 두 달여간 진행된 이 사건은 초기에는 정부의 민중에 대한 총기발포에 항의하고 진상규명과 처벌요구에서 점차 접수정권의 실정에 대한 비판, 대만인의 정치기회 제공과 인사권 보장 등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민중항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접수정권에 대한 분노는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켜 민중시위는 과격한 양상을 띠게 되었고 중앙정부가 급파한 군대의 잔혹한 진압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2만여 명에 달하는 민중이 희생되었고 省籍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뒤이은 淸鄕작업과 계엄 하 오랫동안 지속된 백색공포 속에서 228항쟁은 말할 수 없는 금기가 되었다.

이른바 228문학은 바로 이 비극적 역사에 대한 기억의 보존과 상처에 대한 치유의 수단으로 사건 발생 후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창작되어 왔다. 228문학은 작가 개인의 체험과 정치이데올로기 등에 따라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사건 자체에 대한 세세한 기록, 잔혹한 진압이 남긴 심리적 상처, 族群 간의 화해와 평화의 기원, 중국과 구별되는 대만인의식의 정립 등으로 그 향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228문학으로 알려진 李喬의 《1947년에 원한을 묻다》(50)은 228역사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동시에 두 명의 허구적 인물을 내세워 228이후 억압된 대만사회의 상황을 비판적 인식으로 고찰하고 있으며, 중국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대만의 현실을 인식하는 인물들의 변화를 추적하여 대만인 자아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을 긍정적으로 그려 내었다. 동시에 미래의 역사상으로 228이 남긴 상처와 族群간의 이질성을 극복하여 대만공동체의식의 정립을 제시하고 있다.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