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문학의 문학적 저항에 대해서 오세종(류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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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저한테 주어진 테마는 ‘재일조선인문학의 문학적 저항’입니다. 먼저 재일조선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에 관해 간단하게 본다면 문학사적으로 아마 가장 유통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은 가와무라 미나토가 『태어나면 거기가 고향--재일조선인문학론』 (1999)에서 내린 정의를 이효덕이 재구성한 것입니다.

 

  ‘재일조선인문학’이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패전 즉 대일본제국 붕괴 뒤 식민지지배 하에 놓인 조선반도에 출신경위를 가지면서 일본에 생활의 근거를 둔 (한국적·조선적·일본적의) 조선인 및 그 자손에 의해 일본어로 씌어져, 일본에서 발표된 문학의 총칭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단 이 문학이 "특이"한 것은 그것이 단지 작가의 혈통이나 nationality, 정체성에 의해서만 분류 되는 것이 아니라, 취급되는 주제와 불가분해서, 식민지기 이후 조선인의 처지, 환경, 역사 등을 재일조선인의 입장에서부터 다루고 있는 것이 그 중심적인 특징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효덕 「포스트 콜로니얼의 정치와 「재일」문학」『현대사상』 2001년 7월호, 29(9),pp.155-156)

 

 오해가 없도록 말씀드리자면 이효덕은 재일조선인문학을 포괄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효덕은 재일조선인문학이 일본사회에서 혹은 일본인연구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의돼 왔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의에 의하면 ①재일조선인이란 누구인가 ②그 문학에 있어서 이용되고 있는 언어와 작품 발표 장소 그리고 ③취급되고 있는 주제가 등이 이 정의의 구성요소입니다. ①에 관해서는 일본국적을 가지는 조선인, 즉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귀화」를 하면서도 그러나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자도 포함하고 있어, 이것 자체가 재일조선인이란 누군가를 널리 정의하는 내용이 되어 있습니다. ②에 관해서는, 작품 발표 장소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이용되는 언어는 일본어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조총련 간부를 맡고 그 후 북한의 정치에도 종사한 허남기마저 일본어를 이용해서 시를 만들었던 것을 생각할 때 대체로 타당한 규정입니다. 그렇지만 많지는 않지만 조선어로 문학작품을 창출한 시인이나 작가가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한정은 지나치게 좁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강순 시인은 주로 조총련 탈퇴 후 일본어를 이용해서 시를 썼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선어로 창작한 문학자였습니다. 또한 일본어를 이용한 그의 시집 『날라리』는 강순 자신의 조선어작품을 ‘번역’한 시집이고, 일본어를 이용했다고 해도 약간 특수한 일본어 시집입니다. 강순 시인의 시가 재일조선인문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 하나만 봐도 “일본어로 씌어져” 있다는 규정은 역시 재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 발표에서 중요한 점은 ③의 재일조선인문학이라고 불리는 작품에서 취급되는 주제라는 점입니다. 이효덕은 재일조선인문학이란, 정의 가능한 작품의 총체라기보다는 어느 실천을 의미합니다.

 

   재일조선인 작가의 문학은 전후 일본에서 일방적으로 역사화되어, 망각되어 부인당한 동아시아에서의 전전·전후의 제국주의와 민족문제에 대한 간섭〔으로서〕, 즉 하나의 역사적 실천으로서 출현〔했다…〕 (id. at 155)

 

 이효덕은 이 관점에서 재일조선인문학이라고 불리는 작품이 어느 시기에, 어떤 주제를 취급하고 있는가를 역사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김석범, 이회성, 고사명, 김학영 4명 작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보고는, 저한테 주어진 테마에 따라, 재일조선인 작가들의 ‘역사적 실천’으로써의 문학작품이 어떠한 ‘저항’을 결과적으로 낳았는가에 대해서 다소 도식적으로나마 가리킨 뒤 김석범 작품에 나타난 독자적인 저항을 논할 예정입니다.

 

2

 문학적 내지 사상적인 ‘저항’이란 한편에서는 저항/협력과 같은 이항대립적인 틀 속에서 위치-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틀 속에서 저항을 생각하는 중요성은, 적어도 일본 사회에서 식민지주의가 아직 지속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원칙적으로 줄어지지 않습니다. 또 가네시로 가즈키 『GO』(2000)같이 결과적으로 저항하는 것부터 내려버린 재일조선인문학의 작품을 읽을 때도, 이 이항대립적인 틀은 항상 참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틀 속에서만 저항에 위치 및 가치를 부여할 때, 저항의 강도 (강한 저항, 약한 저항)의 차이나 저항 안에서 생기는 억압―예를 들면 식민지주의에 대한 저항에 망설이는 사람을 ‘민족반역자’라는 상표를 붙이는 것 등―그러한 것들을 보기 어려워진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또한 저항/협력이 획일적인 정체성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음도 조심해야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한 조심스러움을 가지면서, 또 각 작품이 발표된 시대 등을 일단 고려로부터 제외한다면,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재일조선인문학을 몇 가지로 분류할 수는 있습니다. 첫째로, 재일조선인문학의 문학적인 저항이란, 물론 일본 패전의 해인 1945년 이후에도 일본 사회에 계속해서 잔존하는 식민지주의에 대한 저항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가 일본 식민지지배의 결과인 이상 당연히 나타나는 테마이며 그 결과로서의 저항입니다. 삼 세대 걸쳐서 식민지 그리고 해방 후의 독재 정권과의 투쟁을 그린 허남기의 『화승총의 노래』(1952), 조선전쟁기의 일본과 식민지기를 겹치면서 쓰인 김달수의 『현해탄』(1954)등, 이 저항을 테마로 하는 작품은 큰 역사적 관점에서 쓰인 작품뿐만 아니라, 일본인과의 결혼과 같은 일상 수준에서의 문제를 다룬 작품을 포함하면 무수하게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둘째로, 조선인 조직, 주로 조총련에 대한 저항도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송혜원이 지적하듯이, 재일조선인 작가에 의한 문학이 일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문학이라고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가, 문학자들의 조직으로부터의 이탈 시기와 겹친다는 사실부터 필연적으로 나타난 테마이며 저항일 것입니다. 이 저항에서는 특히 북한 귀국 사업이 구체적인 사건으로서 채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인 청년과 가야코라고 불리는 일본인 여성과의 연애 (과 그 파탄)을 그린 이회성의 『가야코를 위해서』(1970)나, 조직 속에서 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이탈하고, 생가 선박관계의 일을 하는 남자의 고뇌를 그린 박중호의 「회귀」(1987)등은 「귀국사업」과 주인공의 관계를 작품 내에 삽입하고 있어서, 동 사업에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통해서 조직에 대한 저항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조직에 대한 저항은 귀국 사업이외에도 후카자와 우시오의 『한사란--사랑하는 사람들』(2013)이 재일조선인끼리 맞선 결혼을 알선하는 노녀를 등장시켜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조직에 대한 저항과 관계됩니다만, 대한만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라는 분단국가에 저항하는 작품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찬반양론이 있는 작품입니다만, 양영희의 『오빠 -가족의 나라』(2012)는 북쪽에 ‘귀국’한 오빠 셋의 모습을 전기와 픽션을 삽입한 형태로 그리며, 북한이라는 국가와 귀국 운동을 추진한 조직을 함께 비판하는 내용이 되어 있습니다. 또 김석범의 『과거에서부터의 행진』(2012)은 한국에서 고문을 당한 재일조선인 남성의 인간으로서의 회복을 그려서 한국 사회에 계속해서 남는 군사독재 정권의 영향을 비판적으로 가시화하고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같은 김석범의 『화산도』는 이 면에서 거대한 저항을 나타내는 작품입니다.

 넷째로, 재일조선인 작가 문학작품의 큰 특징이 되는 것에 일본어를 사용해서 일본어에 대한 저항을 한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김시종 시인이 있습니다. 김시종 시인이 중심이 되어서 1950년대에 간행된 잡지 『진달래』(1953∼1958)에서 이미 시인 자신의 시 작품이 일본어에 대한 저항을 드러내고 있으며, 또 그것이 1955년에 결성된 조총련과의 마찰 속에서 나타났음을 상기할 때 일본어에 대한 저항은 식민주의와 조직에 대한 저항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어에 대한 저항은 김시종 시인뿐만 아니라, 일본어를 이용하면서도 표현 가능성의 한계를 그 언어자체에 부딪쳐 갈 때, 이 저항은 재일조선인문학의 도처에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것도 또 찬반양론이 있는 작품이지만, 최실의 『지니의 퍼즐』(2016)은 조선학교를 무대로 해서 일본어에 대한 저항을 전경화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항’이란 ‘전기저항’이라는 말에 나타나 있듯이 어느 일정한 흐름 속에서의 방해, 혹은 책상위에 둔 손이 느끼는 반발의 힘, 즉 큰 흐름 속에서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하는 힘, 어떤 환경 밑에서 느끼는 (억압적인) 힘에 대한 반발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저항/협력이라는 틀과 관계가 있습니다만, 어떤 환경 속에서 개개인이 입는 사회적인 힘 (예를 들면 동화 압력)이나, 인간관계가 초래하는 살기 어려움, 말하자면 신체적인 감각이나 정체성을 둘러싼 저항적 의식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으로 자명하게 생각되는 컨텍스트를 가시화하는 (수동적인) 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김학영의 『얼어버리는 입』(1965)은 주인공이 안고 있는 말더듬이라는 것이 민족 문제보다 앞장서는, 개인의 근원적이고 신체적인 괴로움을 그린 작품입니다. 또 이양지의 「해녀」(1983)는 주인공 ‘나’의 신체를 통해서 일상적인 억압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또한 이 작품에는 젠더적인 시점도 색깔이 진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나」’ 의형에게 강간당하는 것이나, 남자들과 ‘나’의 ‘분방한’ 성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그녀의 신체는 일상적인 억압 속에서 작동하는 성차별, 성폭력을 비추고, 그것을 이용하듯이 서로 신체를 재편성해 가는, 그러한 신체의 사건을 묘출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예를 제시한다면, 김 마스미의 「메소드」(1995)도 그렇습니다. 주인공 한명인 ‘누나’는 조선인과의 결혼밖에 인정하지 않는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계속해서 억압을 받고 복수를 결의하게 됩니다. 복수는 일본인 연인을 ‘재일’이라고 속여서 아버지한테 결혼을 인정하게 해서 동시에 아이를 낳는 것으로 완수되어 갑니다. 이러한 복수에 의해 누나의 자기회복도 행해지려고 할 때, 이것은 관념적인 ‘재일’에 대한 저항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들에 나타난 '저항'은, 저항/협력이라는 관념적인 이항대립과 겹치는 면도 있으면서도, 투쟁적인 저항이라기보다는 그 아래에서 일어나는 이항대립적인 저항에 회수되지 않는 '저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항/협력으로서의 저항과 신체적 감각적인 '저항'은 서로 배반하기보다는,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이성적인 저항과 감성적인 저항처럼 구별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아까 일본어에 대한 저항으로서 논한 김시종의 시작품이, 4·3항쟁 때 학살당하고 그러나 역사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게 그 목적 하나일 때, 권력자 쪽의 역사이야기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정형적인 저항의 역사이야기에 대한 항거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로 김시종의 시는 저항에 저항하는 에크리튀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이것만을 봐도 두 저항을 엄밀하게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두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문제이며, 그것들을 서로 구별하면서도 연동적인 저항의 두 측면으로서 위치를 부여해야 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이 크게 둘로 나눈 저항을 연결할지도 모르는 혹은 다른 문학적인 저항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저항에 대해서 논하고 싶습니다.

2015년 김석범의 『화산도』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그 이후 한국에서는 이 소설에 관한 연구논문이 많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화산도』의 무대인 관덕정이나 관음사 등 실재 장소는 물론, 주인공·이방근의 집마저도 ‘특정’되었고 주요 등장인물인 남승지가 걸었다고 생각되는 길도 추정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특정’이 가능했던 것은 김석범이 어릴 때 제주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었던 것, 또 일본의 오사카에는 제주에서 건너온 사람이 많이 있었고, 그들한테서 제주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점 등을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화산도』가 번역·소개되고 읽히고, 연구되고 있는 것으로 제주도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섬이 문학작품으로 쓰인 섬을 덮어 간다고 느껴지는 점입니다. 요컨대 각각의 장소가 상상적으로 ‘특정’되기보다는 정말로 실재하는 곳으로서 창조되어 섬 자체가 만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화산도』라는 작품이 제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그리는 것으로, 섬에 하나의 전체적인 형상을 주고, 그 결과 지금 이 섬을 보는 시선에 큰 영향을 계속해서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김석범 자신이 이미 말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제주도라고 하면 관념 위의 고향이다. 그러므로 강렬한 셈이다. 옛날은 제주도=조국이기 때문에. 제주도라는 것은 단지 지역적인 지방에 하나라는 것에서 끝이지 않은 것이에요, 이것은 조선, 우리들이 해방해서 독립을 쟁취해야 할 조선의 대명사같은 것이니까. 그것이 전후 〔한반도가〕 분단되어서, 그 고향 섬에서 학살이 일어났어요. 〔…〕 4·3의 실제 체험자는 모두 침묵하니까, 이것은 반드시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러한 의미로 내가 받아낸 방법은 관념적인 것이에요. 〔…〕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관념적인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소설에서는 관념이 실체를 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문학이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계속 써 왔는가, 왜 침묵해 왔는가』 pp.81-82

 

 김석범의 문학적 방법은 ‘사실’을 ‘진실’로 존재시키기 위해, 역설적으로 철저히 ‘허구’라는 점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허구라는 방법은 언어적 (일본어적)인 문제와 경험적인 문제라는 두 문제를 김석범이 넘기 위해서 고안된 것입니다.

먼저 언어적인 문제입니다만, 허구라는 방법은 일본어라는 ‘침략자’의 언어를 이용하면서도 ‘조선적인 것’은 표현 가능한가? 또한 가능하다면 어떻게 하면 ‘조선적인 것’을 일본어로 표현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다듬어지고 있습니다.

 김석범의 대답은 ‘적의 언어敵性言語’인 일본어를 이용했다고 해도 ‘조선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김석범의 언어관에 있어서는 음성이나 문자(signifiant)는 각 언어의 고유성을 띠지만, 의미 내용(signifié)은 자립적이고 보편적인 성질을 가진다고 생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적인 것'은 언어의 의미 내용 측면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따라서 다른 언어를 이용해도 재생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허구적으로 구축된 '조선적인 것'은 자립적이고 보편적인 성질을 가지는 언어의 의미 내용 측에 속하기 때문에 일본어의 구속을 넘어서 존재할 수 있다고 간주된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허구」라는 방법은 언어의 개별성을 넘을 뿐만 아니라, 경험의 개별성도 넘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누군가의 개별적 경험에 의거하지 않고, 읽는 사람에 역사적 사건의 추체험을 가능하게 하고, 제주에서의 투쟁 본질 이해도 가능하게 하는 그러한 보편성을 김석범의 허구 세계는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만, 이것은 김석범이 그 자리에 없었다는 부채를 극복하려고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경험의 개별성을 넘기 위해서 김석범은 그려져야 할 ‘사실’을 관련되는 다른 사건들의 그물코 안에 두고, 그렇게 해서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논리와 함께 작품내에서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즉 하나의 사건 존재를 전체적인 관점 안에 위치를 부여하고, 논리정합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것이 김석범의 ‘허구’라는 방법의 또 하나의 측면입니다.

 따라서 ‘허구’는 문학을 통해서 ‘사건’을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에서, 동시에 전체적이고 논리적으로 구축하는 행위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소설에서는 관념이 실체를 넘는다”라는 김석범의 말도 이 허구라는 방법에 의해 실현되는 것입니다.

 『화산도』가 번역됨으로써 '조선적인 것'은 바다를 넘어서 제주에 건너가고, 또 번역된 그 작품이 구축한 픽션 세계는 보편성을 띠기 때문에 실체로서의 제주를 덮게 된다, 그 결과 실체 섬이 문학작품을 떠받친다고 하기 보다는 문학작품이 하나의 섬을 덮고, 섬 자체에 정체성을 부여해 간 것이 아닐까 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까 이념적인 저항과 감성적이고 신체적인 저항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두 저항의 관계에 대해서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현실과의 접촉 속에서 생성된 감성적인 저항이 이념적인 저항으로서 세련되게 변해 가고, 다른 한편으로 이념적인 저항은 감성적이고 다양한 저항을 통해서 항상 문제되어 간다, 그러한 관계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오늘 논한 김석범의 저항은 하나하나의 저항에 머무르지 않고 저항의 장소자체를 창출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김석범의 말로 하면 ‘혁명’입니다.

 

   나에게는 서양과 같은 신이 없다. 신을 대신하는 것으로 혁명이 있었다.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현실을, 변혁하는 것으로서의 현실을 긍정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혁명 그자체가 바로 신을 대신하는 니힐리즘의 극복이었다. 〔…〕 「4·3」을 쓰는 것으로, 드디어 「고독을 물리치고」, 삶에 머물 수 있었다. 그러므로 4·3에 대해서 쓰고 있지만, 「허무로부터 혁명으로」가 내 진짜 테마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혁명은 패배했지만, 허무를 극복하는 혁명은 무엇일지를 추구하고 싶다. 『왜 계속 써 왔는가, 왜 침묵해 왔는가』 p.185

 

 이 저항=혁명의 가능성이 어떠한 것일지는 이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재일조선인문학은 그 작품들이 밀착하는 다양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열린 형태로 해석해 가는 여지를 만들어 내고, 그뿐만 아니라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도 있습니다. 즉 재일조선인문학이란 이효덕이 말하듯 “전후 일본에서 일방적으로 역사화되어, 망각되어 부인당한 동아시아에서의 전전·전후의 제국주의와 민족문제에 대한 간섭〔으로서〕, 즉 하나의 역사적 실천으로서” 출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역사와 환경을 창출하는 작품으로서도 있습니다. 김석범의 작품은 그러한 저항으로서의 재일조선인문학의 거대한 도달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말하면 오늘의 재일조선인문학에 관한 아야기는 신조 이쿠오가 진술하는 ‘전후 오키나와문학’의 규정과도 공진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후」라는 시간을 빼앗겨가듯, 전쟁과 그 지속인 미군지배라는 식민지상황에 거의 대부분 눌러 찌그러뜨리면서도, 그러나, 그 현실을 어떻게든 해서 표현하려고 해 온 행위속에 전후 오키나와문학의 시작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조 이쿠오 「전후 오키나와문학 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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