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팔레스타인 저항문학 오수연(소설가)

 

놀랍게도, 팔레스타인 저항문학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일반인에게 소개된 역사는 일찍이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에 단행본 <아랍민중과 문학-팔레스티나의 비극>이 간행되었고, 이듬해인 1980년에 무크지 <실천문학> 창간호는 ‘팔레스티나 민족시집’을 게재하였다.

이런 사실들이 왜 놀라운가 하면, 이른바 글로벌 시대라는 오늘날에도 힘들만큼 작품을 거의 당대에 신속히 소개해 냈기 때문이다. 또한 그 후로 한동안의 간극이 있어, 이런 선구적인 노력이 있었음을 아는 이들이 오늘날에는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로부터 최근까지 우리가 팔레스타인 저항문학을 만나온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되돌아보고, 이 만남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아랍민중과 문학>의 ‘역자 해설’에서 이 책의 편역자이기도 한 평론가 임헌영은 “아랍문학이 우리 한국문학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우리가 지금 열망하고 있는 제 3세계 문학으로의 지름길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문화가 여러 모로 봐서 제 3세계적 속성을 띄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가치 척도는 백인의 그것으로 측량해 왔던 사실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아랍문학은 밝혀준다.

둘째, 민족문학의 진정한 개념 규정에 큰 도움이 된다. 민족의식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제국주의적 침략시대에 생겨난 독립사상으로 그 명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있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민족문화예술의 중요성이 높아간다고 볼 수 있다.

셋째, 20세기의 저항문학 본류가 서구의 반나치 운동이나 러시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 3세계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임헌영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느낌을 주는 아랍문학은 역시 우리와 비슷한 체험을 한 팔레스티나 민족의 비극적 호소일 것이다”라고 밝히고, 갓산 카나파니의 중편소설 <하이파에 돌아와서>, 평론 <점령하 팔레스티나의 저항문학>,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시 <팔레스티나의 연인> 등 이 책의 상당부분을 팔레스타인 문학에 할애하였다.

 

.......나는 맹세한다.

나의 속눈썹으로 손수건을 짜리라

그 위에 너의 눈동자에 바치는 시를 쓰고,

이름을 수놓아

노래와 하나된 마음으로 물을 뿌리련다.

그것이 자라서 푸르른 나무가 될 때까지

꿈보다 키스보다 달콤한 말을 새겨 넣으리라.

󰠑팔레스티나 처녀이었네, 그 사람은, 지금도 역시!󰠙

 

........너에게 영광이 있으라

너의 메아리는-나의 상상 속에-

감옥과 쇠사슬에 날개를 던져 주었노라

나는 너를 보고 있다. 싱싱한 암말이 사뿐히 달려가는 모습을

벼개에 머리를 묻고 있자면 차가운 밤을 통하여 너를 느낀다

나의 핏속에서 노래한다.

태양을 느낀다. 나는 너를 어린 시절이라 부른다.

그러면 동화의 세계가 내 눈 앞을 어른거린다.

나는 너를 봄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장미와 풀꽃들이

자랑스럽게 피어 흩뿌려진다

나는 너를 하늘이라 부른다

그러면 비가 웃고 번개불이 고함친다

너에게 영광이 있으라고!

--마흐무드 다르위시 <팔레스티나의 연인> 발췌

갓산 카나파니는 이 책에 수록된 그의 평론에서, 이스라엘에 점령된 팔레스타인의 상황이 “세계 어느 민족에서도 그 잔인성에 있어서 거의 유례를 볼 수 없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박해”임을 강조하고, “그러므로 팔레스티나의 저항시는 󰠑아랍 제국의 저항운동을 대변하는 것이고, 그 역사적 기록󰠙이라고 말한다 해도 잘못은 아닐 것이다”라고 겸허히 규정한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저항시는 실천과 대결을 통해서 그 깊이와 넓이를 보이면서 ‘참여의 대지(大地)’와 ‘대지의 참여’에서 분출된 것이다. 온간 곤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자랑스럽게 정열을 불태우며 대두하였고 분명히 현대 아랍 문화운동의 으뜸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렇게 해서 저항문학은 그 원천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그 전망을 인식하며, 그 의무에 관련되어 체념이나 불평, 값싼 다변(多辯)을 일삼지 않는다. 저항문학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곧 영향을 받는 기분이 아니고, 스스로의 구실과 책임을 떠맡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사치가 아니고, 항상 한결같은 규범 아래에서 투쟁과 미(美)와 이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갓산 카나파니가 서술한, “언어와 그 역할의 평가에 대한 든든한 신념과, 무장저항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 저항운동의 기본적인 무기로서 문학의 사명을 결합”하려 했던 ‘싸우는 작가’의 대표적인 실례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의 작품이야말로 “시커멓게 말라비틀어진 콩깍지(아랍인에 눈에 비친 점령 체제)를 쓰러뜨리는 낫 같은 문학”이었다.

그는 1936년 팔레스타인의 지중해 연안 도시 악카에서 태어나 1948년 이스라엘의 점령 이후로 여러 나라를 유랑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절제된 구성과 언어로 표현하여 팔레스타인 소설사에 큰 획을 그었으며, 아랍 세계의 대표 작가가 되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의 대변인 겸 기관지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는 등 투사이자 이론가였다. 1972년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차량에 설치해놓은 폭탄에 암살당했다.

*

90년대의 간극은 사회주의권의 격변으로 인한 혼란이 아무래도 주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란 것이 ‘제 1세계’에, ‘세계문학’이란 ‘서구문학’에 편중되었음에 대한 반성으로 제 3세계 문학과 제 2세계 사회주의권 문학을 비로소 돌아보았는데, 이중 하나의 세계가 격하게 흔들렸으니 말이다.

2003년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팔레스타인 저항문학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계기는 공교롭게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었다. 당시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전쟁 반대 활동의 일환으로 이라크, 팔레스타인 문인들과 교류를 시작했으며, 이라크가 내전 상황에 이르러 사실상 봉쇄된 후로도 팔레스타인과의 인연은 열심히 이어갔다.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 마흐무드 아부 하쉬하쉬, 키파 판니, 바쉬르 샬라쉬, 나즈완 다르위시, 타릭 함단, 마야 아불 하야트, 모하마드 카산, 소설가 사하르 칼리파, 아다니아 쉬블리, 아스마 나디아, 후자마 하바이에브, 평론가 파크리 살레,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국민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 등, 최근까지 직접 방한하여 본인들의 작품을 발표하고 피점령 상황에 대해 알린 팔레스타인 작가가 10여 명에 이른다.

소년은 검은 말을

바라보았다

그 말 앞머리에 새겨진

하이얀 별 지니고 있었지

말은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땅으로부터

한 발을 들어올렸다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초원은 푸르디 푸르고

앞머리 갈기 아래

그 말의 별 불타올랐다

그 말

굴레 하지 않았고

입에

재갈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말

머리 치켜들고

우적우적 씹었다

그 입술로부터 뜨거운 피 흘러내렸다

소년은 깜짝 놀랐다

검은 말이 뭘 씹고 있지?

그는 물었다

도대체 무얼 씹지?

검은 말은 싸늘한 쇠붙이로부터 벼려진

기억의 재갈을

씹고 있었다

우적우적 씹고

죽을 때까지

또 씹을 재갈을

--자카리아 무함마드 <재갈> 전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발행한 여권으로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시는 팔레스타인 저항문학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고정돼 있던 어떤 상과 사뭇 달랐다.

지금은 있지도 않는 기억 속의 재갈을 입에서 피가 나도록 씹고 있는 검은말을 바라보는 ‘소년’,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을 듯싶다. 이 시의 구도는 점령/피점령 같은 직접적인 대적관계가 아니다. 지나가던 사람이라도 그런 말을 본다면 걸음을 멈추고 떠올릴 법한, 자연스러운 의문을 소년은 갖고 있다. 소년은 어느 무리에도 소속되기 이전 인간의 보편적 상식을 대변한다. 시의 위치는 적과 반대편이 아니다. 이성이다.

때때로 저는 머리가 화약으로 가득 찬 통 같이 느껴져요. 저희들이 왜 이러느냐고요?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어디서부터 이 재앙에 맞서고, 어떻게 물리쳐야 하나요? 사람들은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저희들 또한 기획할 재목이 못 됩니다. 섬광 같은 순간의 희망이라도 주는 곳은 세상천지 그 어느 조그마한 땅에서조차 찾을 수 없으니, 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요?

--사하르 칼리파 <유산> 발췌

팔레스타인 여성작가를 대표하는 사하르 칼리파는, 1997년에 발표한 이 소설에서 땅과 신체만이 아니라 내면까지 점령당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더 이상 박해받는 자들은 ‘봄’이나 ‘하늘’ 같은 투명한 상징이 아니다. 고민에 찌들어 우왕좌왕하는 현실적인 인물들이다. 점령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끝나 지나가버릴 ‘시커멓게 말라비틀어진 콩깍지’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현실의 인물들에게 얹힌 그 무게는 매우, 매우 무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읽고 나서 드는 느낌은 절망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나는 이것이 상황과 그 상황 속의 사람들을 철두철미 꿰뚫어보는 작가의 시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만 끔찍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작가의 그 의지가 작품에 그려진 억눌린 삶들을 떠받치며 고통스런 인물들을 끌어안는 것 같다.

수업 중에 커다란 “예에에에에" 소리가 몇몇 학생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모두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사가 그 소리를 따라 어느 책상으로 갔더니, 한 학생의 손에 팔레스타인이라는 단어가 적힌 자가 쥐여 있었다.

교사가 그 학생에게 그 단어를 지우든지 그 자를 구석의 쓰레기통에 버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학생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를 계속 쥐고 있었는데, 마치 어머니의 침대 머리맡 그림 속에서 어깨를 드러낸 채 포도를 쥐고 있는 여인 같았다. 교사가 학생의 어깨를 움켜잡자, 학생의 셔츠는 마치 포도나무 가지에 걸려 버린 그 여인의 드레스처럼 보였다. 학생이 앉아 있던 의자가 쿵 하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교사가 학생의 셔츠를 잡아끌고 교실 문을 지나며, 아이더러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제 역할을 대신해 달라고 했다. 아이는 교사의 책상으로 가서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았다.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이가 그 속에 앉아 있던 때와는 다르게 보였지만, 방금 벌어진 일에 대한 당혹감으로 인해 좀 비슷하게 보였다.

아이는 의자를 돌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초록 칠판을 보았다. 그림 속 여인의 드레스 색깔은 선인장 색깔과 같았다. 아이는 사브라와 샤틸라라는 단어들의 의미를 이해하려 애썼다. 어쩌면 그것들은 하나의 단어였다. 팔레스타인이라는 단어는 사용이 금지되었다는 것 외에는 불분명했다. 초록 칠판의 색깔은 선인장 색깔과 닮았다.

아이는 칠판에 포도송이의 즙을 짜내듯 흰 분필을 쥐어짰다. “나는 당나귀입니다.”

분필을 집어든 아이를 지켜보던 학생들이 그 글을 읽자마자 욕을 퍼부으며 아이와 영원히 절교하기로 했다.

--아다니아 쉬블리 <접촉> 발췌

여러 차례 방한하였고 한국과 팔레스타인의 문화교류에도 큰 역할을 해온 아다니아 쉬블리가 2002년에 발표한 이 장편소설은, 일단 한 소녀의 성장기로 읽힌다.

아이는 ‘사브라와 샤틸라’라는 두 개의 지명이 의미하는 하나의 단어, 즉 학살을, 그리고 동급생이 그 글자를 학용품에 써놓았다는 이유만으로 교사에게 끌려 나간 ‘팔레스타인’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불분명하다. ‘선인장’이라는 뜻이기도 한 ‘사브라’라는 지명이 초록색 선인장, 칠판의 초록색, 제 어머니의 침대 머리맡 그림 속 여인의 초록색 드레스와 겹쳐진다. 그리고 교사에게 우악스럽게 끌려 나가느라고 드러난 동급생의 어깨가 그림 속 여인이 우아하게 드러낸 어깨와 겹쳐지고.......오빠의 놀림에 약 올라 신께 오빠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다음날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폭탄이 떨어져 오빠가 죽어버린다.

너무나 이질적인 조합이다. 아이의 연상은 자유롭고 지극히 섬세한 반면 현실은 무지막지하다. 그래서 매 순간 불안하다. 아이의 상상력이 기발할수록 비극적이다. 성장기의 아이는 생명의 명령에 따라 주위를 예민하게 감지하면서 한사코 자라나려 하지만, 감지되는 족족 인류사의 오점으로 기록될 참상들이다. 독자는 언론매체를 통해 자기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건들을 아이의 감각으로 새로이 접하게 된다. 아직 껍데기가 여물지 않은, 생살로.

올해는 ‘나크바’(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에서 쫓겨난 사태를 지칭하는 아랍어. 재앙이란 뜻.) 70주년, ‘나크사’(1967년 이른바 ‘6일 전쟁’에서 아랍군의 패배로 팔레스타인 전역이 사실상 이스라엘에 점령된 사태. 좌절, 역행이란 뜻) 51주년이다. 팔레스타인 상황은 해마다 더 이상 나빠질 수가 없을 만큼 최악인데도, 꾸준히 한계를 돌파하여 더더욱 나빠지고 있다. 해법도 희망도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박해’와 ‘침략’이 가혹할수록 팔레스타인 문학의 저항성과 중요도가 높아진다는 언술들은, 슬프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이 수십 년의 긴장을 유지하지 못한다. 팔레스타인과 관련되어 나쁜 뉴스들뿐이니 아무리 나빠도 더는 충격으로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숫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조적으로 내뱉곤 하는 말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국제뉴스에 사상자 숫자로 나온다. 그게 몇 천 명이든 몇 백 명이든 국제정세는 털끝만큼도 바뀌지 않는다. 사람의 피로 치른, 이처럼 추상적인 숫자가 또 있을까.

팔레스타인 작가들은 이 국제적이고도 세계적인 둔감함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각자가 자기만의 방식을 창안해내고 있다고 보아진다. 고통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비극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안고 가야 할 이 문제를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용감히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가고 있다.

*

2006년 광주 ‘아시아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6개월 동안 참가했던 키파 판니는 <테러 대 기억-문학의 역할: 잊혀진 기억과 역사적 기억>이라는 흥미로운 에세이에서, 사전에 없는 ‘비문학’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집단의 정체성을 인류의 종적 정체성과 분리시키는 잘못된 교육과 교리를 뜻하는 것으로, 흔히 인류의 영원한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구약 성경>과 <일리아드> <오디세이>가 포함된다.

모든 게 글쓰기가 우리에게 생각, 서술, 묘사 등등을 응축하고 축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유일신교로 대변되는 사고방식이 없었다면 글쓰기 자체로는 혼자서 이런 짓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둘의 조합이 신성한 말씀만이 아니라 하나뿐인 절대적 진리라는 주장을 창안해냈다......이런 발상이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차이를 제거한 단일성의 미학을 갖게 했다. 곧 이 미학은 죽임의 미가 되었다. 죽임이란 그 오래 전부터 있었으며 이유와 변명 또한 있었지만, 단일성의 미학이 출현함으로써 비로소 죽임의 변명이 인간의 잘못된 행동으로부터 신 자신의 의지로 변형되었다. 이는 신성한 기록의 권능에 의해 고착되었다.

“내가 블레셋(팔레스타인)인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와 벌판의 짐승들에게 던져주리라.”

이런 구분의 뿌리는 일리아드, 오디세이 같은 그리스 서사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트로이와 그 거주자들은 인간 종과 문명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히브리와 그리스 양대 문학이 매우 효과적으로 폭력, 탐욕, 이중적 기준의 도덕을 정당화했음이 밝혀질 것이다. 그리스 문명의 문학적 성과는 강탈의 역사라는 주제에 봉사하며, 이는 다름 아닌 고전적 식민주의의 도덕적 정당화이다.

그리고 키파 판니는 잊혀진 종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항구적 ‘문학’으로서,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시 <봉쇄 상황>을 예로 든다.

살해자에게: 네가 죽인 희생자의 얼굴을 떠올리면, 가스실에 있던 네 어머니가 기억날 텐데. 너는 총의 지혜로부터 놓여나 마음을 바꿀 텐데. 이렇게 말고, 네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다른 살해자에게: 네가 그 태아를 어머니의 자궁에 삼십 일만 더 있게 했더라면, 많이 달라졌을 텐데. 점령이 끝나고 젖먹이는 포위 시절을 잊어버리고 건강한 아이로 자라, 네 딸 중의 하나와 학교에서 고대 아시아 역사책을 읽었을 텐데. 둘은 심지어 사랑에 빠져 딸을 낳았을 텐데. (그 딸은 모계 혈통에 따라 유대인이 됐을 텐데). 그런데, 너 지금, 무슨 짓을 했지? 이제 네 딸은 과부고 네 손녀는 고아야. 무산된 가족을 어떻게 할래? 그리고 어떻게 총알 한 방으로 비둘기 같은 세 사람을 죽여버린 거야?

마흐무드 다르위시는 1941년 갈릴리에서 태어나, 여러 나라를 유랑하며 창작 활동을 하면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도 가담해 자주 투옥되었다. 팔레스타인 저항문학을 국제적으로 알렸으며 많은 상을 받았고, 2007년 우리나라도 방한했으나 이듬해인 2008년 서거하였다. 이 글의 초반에 인용된 그의 <팔레스티나의 연인>는 그가 20대였던 1966년에, 바로 위의 시 <봉쇄 상황>은 60대인 2002년에 발표하였다.

2007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마흐무드 다르위시 시선집을 아랍어에서 직역하여 출간한 아랍문학자 송경숙은, 그의 시세계를 초기 서정시 단계, 이행기, 1980년대 이후 성숙기로 구분한다.

초기에는 시인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해서, 이행기에는 팔레스타인 민족공동체의 집단적 기억을 통해서, 그리고 성숙기에는 탈시간화와 탈공간화를 바탕으로 고통 받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으로서 팔레스타인을 은유함으로써 독보적인 예술성을 갖춘 민족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토피아를 찾아 유랑하는 모든 인류의 노래로 승화시켰다.

이제 일찍이 1979년에 평론가 임헌영이 했던 질문을 다시 해보자. 팔레스타인 저항문학은 우리 한국문학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제 3세계 문학으로의 지름길을 제공하고, 민족문학의 진정한 개념 규정에 큰 도움이 되는 것 이외에, 2018년의 우리는 한 줄을 더할 수 있을 듯하다.

훼손된 인류의 종적 정체성을 복구하는 문학, 유토피아를 찾아 유랑하는 모든 인류의 노래로 승화된 시를 우리에게 제시해준다는 것.

앞서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시 <재갈>에서 기억 속의 재갈을 입에서 피가 나도록 씹고 있는 검은 말은, 물론 과거 자신들이 당한 홀로코스트의 비극으로 오늘날 자신들이 팔레스타인에게 저지르는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이스라엘의 비유이다. 그리고 과거 피해자였던 역사를 명분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류라는 종적 정체성과 분리시키는 모든 집단의 비유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에 우리 군대가 가서 저지른 학살을 아직도 진정으로 사과하지 못하는 우리, 침략 전쟁인 줄 알면서도 국익을 위해 이라크 전쟁에 군대를 보낸 우리 또한 그렇다. 미국에 적체된 군사무기가 중동에 쏟아지지 않는다면 한반도에 쏟아지리라는 은밀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혹시 있지는 않은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북미정상회담을 기대하면서, 우리는 그 호기로운 미국 대통령이 모든 국제법을 무시하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안에 인류 본연의 눈을 가진 소년이 있고, 유토피아를 포기하지 않는 팔레스타인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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