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은 밝고 경쾌했다. 그러나 노랫말은 쓰리고 아프다.

신나는 율동에도 어른들을 향한 아이들의 마음은 바늘처럼 예리하고 따갑다.

동요 ‘어른들은 몰라요’는 1980년대 이래 꾸준히 애창되는 노래다.

박건호가 노랫말을 지었고 김명곤이 곡을 달았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로 시작되는 노래는 아이들의 진솔한 마음을 꾸밈없이 담아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지도 헤아리지도 못하고 제멋대로인 부모와 어른들의 빗나간 이기심에 대한 아프지만 날카로운 항변 이었다

가사에 녹아있는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갖고 싶어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음이 아파서 그러는 건데, 언제나 혼자이고 외로워서 그러는 건데,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어른들은 모른다고 했다.

장난감을 사주면 그만인가요?

예쁜 옷을 입혀주면 그만인가요?

귀찮다고 야단치면 그만인가요?

바쁘다고 돌아서면 그만인가요?‘

부모와 어른세대의 무관심에 대한 아이들의 마음표현은 송곳처럼 듣는 이들의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었다.

아이들의 마음은 순수하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다.

새하얀 웃음이 그렇고, 또랑또랑 목소리가 그렇다. 표정이나 행동은 발랄하고 생기가 빤짝인다.

그러기에 그들의 생각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 역시 투명하고 환하고 푸르다.

그래서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드 워즈(1770~1850)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했다.

그의 시 ‘무지개’에서다.

사물을 보는 순수함, 자연에 대한 애정과 경외심을 잃어버린 어른들에게는 그야말로 ‘아버지 말씀’과 같은 빼어난 비유다.

아이들의 순수한 시각이 견고한 어른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아버지 말씀으로 작동되는 것이다.

구름다리 하늘에 휘어져 걸린 무지개를 볼 때마다 설렘 가득한 어린이의 마음처럼 어른들도 순수함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인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어른과 아이가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작금의 세태는 어둡고 칙칙하다.

세대 간 계층 간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망이 분열과 갈등을 짜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맑고 투명한 아이들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이 오염되고 거칠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무관심과 이기심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는 찾기가 힘들다.

“아이들을 위한 일“라면서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부모와 어른들의 지나친 욕심이 덫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벽에 낙서를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벽에 큼지막하게 ‘낙서금지’라고 휘갈긴다.

그냥 웃어 넘겨버릴 수만은 없는 위선(僞善)의 두 얼굴이다.

시인 유안진(77.서울대 명예교수)은 워드 워즈의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를 패러디해서 비뚤어진 교육의 단면을 해학적으로 풍자했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시구(詩句)를 이해한다면 ‘어른은 어린이의 아들’이라는 역설도 가능하다.

‘어린이의 아들이 어른의 아버지를 가르치다’는 제목의 시도 여기서 출발한다.

시인은 ‘우격다짐으로 / 어린이의 아들이 어른의 아버지를 가르치려 들며/ 행복한 어린이를 불행한 어른으로 퇴행시키려 들며/ 어른의 아버지에게/ 어린이의 아들을 닮으라고 윽박지르는/ 교육이야 말로/ 어처구니없는 거꾸로 사업’이라고 통렬하게 힐난했다.

사실 우리 교육현실에 대해 ‘암담하고 참담하다’는 우려의 시각이 많다.

인성교육은 간데없고 성적위주의 경쟁교육이 만들어 낸 것이다.

‘경쟁도구’, ‘공부벌레 교육’이 밝고 활기차게 뛰놀며 자라야 할 어린이들을 주눅 들게 하고 좌절시킨다는 지적인 것이다.

어린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쉴 틈이 없다. 영어 학원, 수학학원, 중국어 학원에다 교습학원,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태권도 학원 등등 ‘학원 뺑뺑이 돌리기’에 시달리다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게 마련이다.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받으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야할 어린이들에게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충혈 된 약육강식의 정글 속으로 내모는 것이 자녀의 행복을 위한 자식사랑인지, 씁쓸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는 사랑과 행복의 탈을 쓴 ‘정서적 정신적 학대 행위’일 수밖에 없다. 범죄다.

지난해 아동보호단체(세이브 더 칠드런)와 서울대 사회복지 연구소에서는 16개 국 어린이를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한바 있다.

이 결과 한국 어린이는 비교대상 16개 국 가운데 행복지수가 14위 였다. 알제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밀렸다.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에디오피아(15위)와 대지진 여파로 신음 중이었던 네팔(16위)과 함께 최하위 권이었다.

그만큼 한국 어린이들은 불행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옷이나 음식, 휴대 전화 등 물질적 욕구 충족 측면에서는 16개 국 중 최상위였다.

물론 물질적 풍요가 반드시 정신적 정서적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 속 ‘정신적 빈곤’은 아이러니하다.

어린이 교육에 대한 일대 각성이 필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 혼자이고 외로운 우리들을/ 따뜻하게 감싸 주세요/ 사랑해 주세요’.

동요 ‘어른들은 몰라요’의 마지막 소절(小節)이 찌르르 아프게 가슴을 찌르는 어린이 연휴 마지막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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