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길현 교수/제주대학교 윤리교육과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고 제주미래담론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보통 혁명하면, 전쟁이나 폭력을 떠올리게 된다. 세계 최고의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프랑스혁명은 물론이고 볼세비키의 러시아혁명 등 크고 작은 혁명에는 아래로부터의 폭력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구질서를 청산하는 데 폭력적 충돌은 필요악처럼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서 정당화되곤 하였다.

돌이켜보면 1990년 전후에 진행된 구 공산권의 붕괴는 조용한 혁명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놓았다. 물론 그 와중에 동유럽에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냉전 해체 이후 새 질서를 태동시키는 데 참혹한 전쟁을 거치지는 않았다. 핵무기 등 막강한 무기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구소련이 구질서를 고집하는 데 물리력을 동원하지 않았기에, 어떤 의미에서 탈냉전은 조용한 혁명이 성공을 거둔 대표적 사례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 이후 30년이 지나는 동안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는 여전히 냉전과 탈냉전이 교차하는 과도기적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 가운데 한반도의 남과 북은 여전히 냉전의 최전선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지내왔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그저 관성 때문인가, 아니면 남과 북의 기득권 옹호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리 대단한 이념 때문인가? 20세기의 미국과 소련을 대체하여 21세기에 새로이 G2로 떠오른 미국과 중국의 첨병 역할을 함으로써 무언가 득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까?

그냥 그렇게 지난 탈냉전의 30년도 남과 북은 거의 변함없이 살아왔다. 바깥세상의 누가 이러한 남북한을 보면 신기할 것이었다. 어떻게 1990년 이후 세상이 이른바 세계화 흐름에 따라 새로이 크게 변하고 있는데, 남과 북은 아무런 변화 없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이면서도 서로 가보지도 못하고 대화도 없이 살아가고 있을까.’ 그렇게 남과 북은 1948년 이후 70년간 아무런 변화 없이 평화는 그냥 먼 훗날의 일로 치부하면서 살아왔다.

2018년. 드디어 무변의 땅 한반도에서 조용한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 평창 올림픽으로 시작된 봄기운이 판문점 선언으로 진전되었고, 이제 북미정상회담으로 발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아래로부터의 폭력이 없고 누군가를 죽이는 전쟁도 없다. 약간의 우려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전 세계가 기꺼이 환영의 박수를 치고 있다. 국내에서도 김정은에 대한 긍정 평가가 70%를 넘는다고 한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가 이렇게 단 몇 달 만에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데서 우리는 ‘예술로서의 정치’의 진수를 맛보고 있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은 아직 불명확하다. 그러나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아예 평양으로 날아가는 게 더 트럼프다워 보인다. 직접 평양을 방문하여 모종의 평양선언을 해야 역사에 남는다. 21세기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난 조용한 혁명의 최종 결행자로서의 책무를 다한 것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올 때는 역류된 미국 국민과 손잡고 판문점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전 세계 TV에 방영되도록 하는 제스처는 덤이다.l

판문점 선언 이후 한반도 평화를 향한 구상과 제언은 현란하기까지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한 바, “시작 가능한 것부터 추진”하는 게 정석이다. 무엇보다 남과 북을 잇는 철도와 도로부터 정비해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피력했듯이 북한의 철도 사정은 매우 안 좋다. 경의선-동해선 철도를 통해 남과 북 8,000만이 서로 쉽게 자주 만날 수 있는 여건조성이 첫걸음일 것이다.

바야흐로 세계평화의 섬 제주가 할 일이 생겼다. 지난 15년간 해군기지 문제와 씨름하느라 세계평화와는 담을 쌓아온 제주에게 2018년에 이르러서야 정부가 지정한 세계평화의 섬으로서 무언가 역할을 할 무대가 제공되고 있다. 해군기지 덕분에 지난 15년간 120만 제주도내외 도민은 한반도 평화와 대한민국의 안보에 대해서 남다른 이해와 학습을 해 왔다. 이제는 그렇게 배운 역량을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기게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지금까지는 북핵문제와 대북제재로 제주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인지 상상력도 닫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요량이라면 아예 평화의 섬 타이틀을 반환하는 게 맞다. 북한에 감귤 보내기 재개로는 부족하다. 백두산-한라산 공동 탐사와 연구도 너무 전문가 중심적이다. 그렇다고 북한에 크루즈 보내는 건 인프라가 부족한 북한 사정을 고려하면 성급해 보인다. 당장은 철로와 도로 등 육로를 통한 남북 교류협력 추진으로서 벅찰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포럼에 북한 참석을 요청한 것도 궁여지책이다. 올 6월 제주포럼에 북한 인사가 온다는 얘기도 있어 반가운 일이지만, 제주포럼에 북한 인사가 오는 것만으로는 2% 부족이다. 북한 주민이 오도록 해야 한다. 그게 관광이든 일자리든 유학이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 좋다. 대북개방특구로서의 제주가 아니고는 세계평화의 섬 제주 타이틀을 유지해 나가기가 쉽지 않다. 치안이 잘 되어 있고 또 1차산업과 서비스산업이 발전해 있는 따뜻한 나라 제주는 분명 북한 주민에게도 최우선 순위로 코리안 드림을 꿈꿀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북한 주민이 오는 만큼 우리도 북으로 갈 수 있어야 한다. 당장 가서 무엇을 할까? 70년 동안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땅이기에, 그냥 가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왕 갔으면 무언가 보람 있으면서 북에 도움이 되는 걸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 가운데 북한 산림녹화가 눈에 띤다. 정부의 <판문점선언 이행추진위>가 “북쪽이 가장 필요로 하고 우리로서도 경험이 많이 쌓인 분야”로 산림협력을 우선적으로 추진한다고 한다. 제주는 지난날 제주 흑돼지 경협사업을 준비한 적이 있다. 북에 가서 돼지 기르고 나무 심어주고 또 광어와 같은 양식 기술을 전수해 주는 건 어떤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앞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창의적이고 열정적으로 남북한 교류협력이 추진되리라 기대되지만, 그 가운데 특히 바둑과 당구에 눈이 간다. 요트나 승마 등과 같이 당구도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대북제재 대상이 되고 있다는 데 실소를 금하지 못하면서도, 한 때 우리에게 냉장고가 사치품으로 여겨질 때도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당구와 바둑은 서민적이고 비용도 많이 들지 않으면서 집중력과 두뇌회전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친목에도 제격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향한 조용한 혁명은 그렇게 남과 북 8천만이 당구와 바둑으로 서로 만나 재미있는 시간을 같이 할 수 있는 날과 함께 어느덧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엊그제 뉴스에는 2018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에서 남과 북이 단일팀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 단일팀명을 평창 때처럼 코리아(KOREA, 약칭 COR)로 하기로 했다는데, 앞으로 단일팀 명칭은 COREA가 더 적합해 보인다. 올 6월 제주포럼에서 남북한 단일팀 구성과 관련 명칭, 유니폼, 단일팀 기 등에 대한 논의도 해보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다. 앞으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단일팀 구성이 많아질 것으로 본다면, 남북단일팀의 평화 기여에 대한 논의와 함께 더욱 이를 뒷받침해 나갈 제도적 방책들을 논의하고 마련해 주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판문점선언은 중앙정부가 주도했지만 지방정부도 그냥 구경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항차 6월 지방선거 이후 분권형 개헌이 추진되리라 본다면 세계평화의 섬 제주도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서울시는 평양시와 자매결연 추진한다고 하는데, 제주는 한라-백두 상징에 맞춰 백두산이 위치하는 양강도와 자매결연 하는 게 좋아 보인다. 차기 도지사는 세계평화의 섬 제주의 이름에 걸맞게 타 지역보다 앞서서 양강도와의 자매결연에 적극 나서주길 바라마지 않는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자신의 업적인 따릉이(서울 공공자전거)를 타고 서울에서 평양까지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제주도지사 후보들은 어떤 마음들일까? 북한은 이미 인천-평양 직항로를 제언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제주-평양 직항로는 어떤지. 나아가 제주-양강도 삼지연 공항 간에 직항로가 열려야 비로소 한라-백두 관광 벨트가 가능할 것이다. 이미 15년 전 북한이 제주에 고려항공 직항으로 와서 민족평화축전을 했던 전례도 있다. 지난 15년 동안 허송세월처럼 보낸 시간이 안타깝다.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속담도 있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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