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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박물관 다니기-2 : 서울역사박물관김영철/ 재경 제주사회문제협의회 대표
제주투데이 | 승인 2018.05.11 08:10

김영철/ 재경 제주사회문제협의회 대표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박물관 앞 마당 보도에 크게 그려져 있는 수선전도.

1800년대 전반기로 추정되는 서울의 모습을 김정호가 그린 것이다.

박물관 안마당

경희궁(과거 경덕궁) 터에 자리 잡았다. 최근 들어 시내에 조그만 공원, 도서관, 이런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계속 생기는 일은 복지와 문화에 대한 이해 측면에서 바람직스러운 현상이다.

경희궁은 조선 광해군 때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동궐이 불에 타서 광해군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동궐인 창덕궁을 먼저 복원했다.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가 살던 곳이다. 술사가 여기에는 왕기가 서려있는 자리라고 이야기해서, 그렇다면 궁을 지으라는 광해군의 명에 따라 짓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히려 자신이 내쫓기고 반정을 통해 인조가 왕이 되어 거주하였다.

그리고 숙종과 영조가 오래 거주한 궁이다. 그 후 일제에 의해 일본인 자녀들의 중학교를 이 자리에 만들면서 서궐은 철저히 파괴되어 지금은 매우 축소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례. 한양도성박물관 소장본 사진

정도전 등의 신진 세력은 중국의 국가제도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인 주례(조선에서는 세종 때 간행되어 널리 보급 되었다)를 참고로 하여 나라의 근간을 잡고자 하였다.

기원전 2500년경의 주나라는 유학의 맹아가 탄생되었고 공자뿐만 아니라 중국 역대 왕조들이 국가 모델로 삼고자 하였다.

삼봉집. 한양도성박물관 소장본 사진

세조때 국가운영 지침서로 간행된 <경국대전>의 모태인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이 <삼봉집>에 실렸다. 조선경국전에서 정도전은 조상 숭배와 사직을 의미하는 禮의 개념과 국가와 사회조직의 원리인 仁을 강조하여 유교 왕국을 지향하였고, 주례의 六典을 모방해 국정 담당 부서를 吏, 戶, 禮, 兵, 刑, 工의 여섯 부서로 나눈다.

불교가 숭앙시 되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고려 말에 들어온 신유학인 성리학적 수직 질서의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한 사대부 관료체제인 귀족 지배체제의 건설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기획하였다.

정도전 등은 이성계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조선을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두고 사대부가 지배하는 체제를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중국의 천자라는 북극성, 조선의 국왕도 그 주변의 자미원의 별들 중의 하나인 제후일 뿐이라는 사대주의적 사고가 저변에 깔린 사대부들이 중심이 되는 유교 왕국을 꿈꾼 것이다.

유교는 중국 한나라 때 처음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등장했는데, 충과 효를 강조하며 주나라를 계승하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사회질서에 사회 구성원들을 순응하게 하여 안정적인 통제를 목표로 한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국가 통제의 이념으로 이 유교만큼 적절한 것이 없어,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민중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계속 유교를 중시하였다.

조선에서도 유교는 중종 때에 접어들면 사대부 양반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실생활까지 규제할 정도의 유교 왕국으로 변화를 꾀한다.

그러나 명종 때부터 사단칠정 논쟁과 같은 철학적 논쟁을 거치면서 임란 직전부터는 당쟁으로 발전하여 대형 사화들을 일으키고 대비 없이 국난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국난의 상황에서도 당파싸움을 지속하면서 심지어 병자호란 이후에는 이제 문명국 즉 중화는 조선만이 유일하다는 소중화주의에 빠져 이 당시 격변하는 세계사에서 시간을 거스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즉, 유교가 이념인 국가에서는 '공부가 곧 정치'여서 과거제도를 통해 소위 출세에 혈안이 되면서 형성된 조선의 독특한 학자-관료층은 특정 스승이나 서원, 뽑아준 사람 등의 연줄을 통해 파당을 형성하여 당쟁이 심해지고 토지 겸병까지 나타나 백성들은 더욱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 재정의 악화와 유학을 숭상하는 과거제의 문반 중시로 군사력이 약해져서 외침에 취약성을 드러내어 임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에서 국토가 심하게 유린당한다(그리고 유학자 사대부들은 외세의 침략이 발생하면 왕과 더불어 도망치는데 바빴고 싸움은 의병과 승려들이 했지만, 후일 공신 선정에서는 임란의 경우 무기 한번 잡지 않은 문신과 내시 86명의 호성공신, 18명의 주로 전사한 무신과 의병장의 무신공신이라는 숫자로 본색을 드러낸다)

이는 유교가 근본적으로 민본사상이 아니라 일부 엘리트 귀족지배계급만의 이익을 위한 수직적 사회의 이데올로기라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유학이 발달한 중국에서도 역시 나타난다. 송나라 때 국력의 약화로 요와 서하에 패하여 곤란에 처한 상황에서 부국강병책을 내세운 왕안석이 토지조사와 세제 및 군역의 개혁 등의 신법정책을 통해 국가 재정난 해결과 생산력의 증가, 농민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자 개혁파(신법당)과 전통적 기득권층인 보수파(구법당)으로 나뉘어졌다. 신법당은 '기층민중 농민의 성장을 부국강병의 요체'라고 주장하고, 구법당은 뻔뻔하게도 '정치는 민중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목하다가, 왕안석의 후원자인 신종이 죽자 갈등은 치열한 당쟁으로 변하여 마침내 송의 멸망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명나라 역시 관료층의 부패를 청산하기 위한 장거정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끝나면서 동림당과 비동림당간의 치열한 당쟁과 환관정치의 폐해로 멸망한다.

풍수와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채택된 새 도읍지 한양

내사산과 외사산, 주산과 안산, 물을 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유학에서의 오상 등을 고려하여 도성의 명칭 등을 정하였다.

북궐도형 / 경복궁 평면배치도. (인터넷 검색)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중건한 뒤인 1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북궐도, 혜촌 김학수, 1975년(인터넷 검색)

위의 북권도형을 참고하여 복원과 채색을 더한 그림인 듯

경복궁 행사도. 년도 모름

                              동궐도, 고려대박물관 소장. 국보 (인터넷 검색)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 하나였는데, 태종 때 재천도하면서 새로 지어진 창덕궁을 동궐이라고 하였고, 이후의 창경궁도 함께 그려져 있다. 조선 후기 순조 때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가장 좌측 맨 위에 네모난 건물이 大報壇이다. 숙종이 엉뚱하게도 임란 때의 명의 황제였던 신종에게 제를 지내기 위해 만들었다. 괴산에 萬東廟라는 사당도 함께 만들면서 이미 중국은 청의 시대인데도 멸망한 명의 죽은 신종에게 큰 은덕을 갚는다는 뼛속 깊이 배인 사대의 의식과 중화와 오랑캐라는 구분을 보여준다.

이것들을 짓고 숙종은 명에 대해 우리가 100년 동안 의리를 지켰기에 훗날 한족이 다시 왕국을 세우면 떳떳이 내세울 수 있을 거라고 뿌듯해 한다.

서궐도안. 고려대박물관 소장. 보물 (인터넷 검색)

12폭의 종이 화폭 위에 먹과 자만을 이용해서 정교하게 경희궁의 모습을 그렸고 건물마다 이름이 적혀 있다

민화 화가 송규태의 모사 그림. 1990년대.

위의 서궐도안을 기본으로 동궐도 채색을 참고해 복원한 것이다.

오늘날의 호적등본에 해당하는 準戶口

본인과 처의 조상과 가족관계, 노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정선의 楓溪遺宅. 고려대박물관 소장

정선은 본인이 근무했던 양천고을에서 바라보는 한강과 북한산 등의 한양 모습과 어릴 때부터 주로 지낸 인왕산 부근과 금강산의 경치를 주로 그렸고, 중국의 산수를 상상해서 그린 관념산수화가 아닌 조선의 주체적인(?) 진경산수화의 효시 5부로 나뉘어 있고 그 아래 수많은 동네인 坊으로 나뉘어 있다.

당시 한양은 북촌, 남촌, 동촌, 서촌 그리고 중촌, 윗대(상촌), 아랫대(하촌) 등의 동네가 유명했다. 동인 서인으로 최초 시작해 치열하게 이어졌던 조선의 당쟁도 낙산 끝자락 혜화동 부근의 김효원이 살던 동촌, 서대문 옆 지금의 정동쯤에서 살던 심의겸의 서촌 동네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두 집을 들락거리던 무리들이 지들끼리 서로 패거리를 져서 당파싸움을 벌린 것이다

한양은 왕을 비롯하여 양반 관료, 의관 역관 등의 중인들, 관청의 서리 삼군문의 군인들이 살았고, 상인들은 운종가를 중심으로 남대문 밖과 마포등지에 거주했다. 도성 밖에는 채소와 과일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살았고, 그밖에 거지와 도둑들이 있었다. 

북촌은 서울의 대로인 종각이북인데, 조선 초기부터 소위 힘깨나 쓴다는 권력자 사대부들의 주거지였다가 후에는 나쁜 짓만 골라서 했던 서인 노론계열 최상류층의 거주지역이었다. 그 남쪽은 남촌(지금의 남산동, 회현동 일대)으로 소론이하 삼색당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남인들이 주로 거주하였다. 중촌은 의관, 역관, 법률가인 율관 등의 전문직 관리나 관청의 말단 관료인 서리와 상인들이 살았다.

정조 때 만들어진 장용영에서 간행된 군사훈련의 기본 지침서. 규장각 소장

도성의 방어와 치안을 담당하는 삼군문, 즉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담당 구역을 나눈 지도.

목판본. 규장각 소장

한양도

궁궐, 성곽, 문루 그리고 운종가라고도 불린 시전 등이 광통교를 지나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간략히 그린 지도

경복궁 앞의 관청거리인 육조거리의 모습을 만든 모형

임란이후 고종 초기까지 경복궁이 재건되지 않은 시기에도 이용되었다.

조선의 지리지. 연혁과 주요 성씨, 지형, 풍속 등이 기록되어 있다.

도성도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 중의 한양 지도. 도성 안의 주요 지리 정보를 묘사

오늘날 종각 부근의 雲從街, 조선 때부터 번창한 중심 상가 지역이었다. 흥인문(동대문)과 돈의문(서대문)을 가로 지른다. 종루 옆으로 6개의 큰 상점인 六矣廛 그리고 길 양쪽으로 市廛들이 있는데, 왕실과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다가 일반 백성들에게도 판매했다. 한 가지 물품에 대한 독점적 판매권(禁亂廛權)을 주다보니 상업발전에 따른 私商들의 증가와 함께 이들의 병폐가 심해져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은 회수되었다.

18세기 당시 북경어를 연구하는 책이라고 한다. 한자 아래 한글로 두 가지 음이 적혀 있다.

서얼들의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

한양도성 밖 10리(4키로)에 해당되는 '성저십리' 지역이 나타나 있다. 한성부는 동쪽으로 양주, 서쪽으로 고양, 남쪽으로 노량진까지를 관할했다. 조선 전기에는 이 지역 인구가 많지 않았는데 후기에는 한양 인구의 절반이 산다.

이 지역에는 지방에서 올라와 상업에 종사하거나 날품을 파는 빈민들이 많았고 그리고 주로 농작물을 재배하여 공급하는 근교 농업지역의 기능을 하는데, 왕십리 무, 청파동 미나리, 이태원 토란, 연희동은 고추와 부추를 주로 경작했다.

그리고 도성 밖 성저십리 곳곳에는 곡물, 소금, 얼음 등의 생산 보관 구휼 등의 기능을 담당하는 창고와 관공서 등이 있었다. 광흥창, 만리창, 군자감창, 염창, 와서(기와), 조지서(종이), 동빙고, 서빙고, 병자와 걸인을 돌보는 활인서는 동소문인 혜화문 밖과 서소문 밖 지역에 있었다.

마포 용산 서강은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과 상품들로 번창하여 한양이 상업도시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강은 세곡선이 몰리고 최대 시장인 한양을 끼고 있어 상품 유통의 중심지였다. 1700년대 말에는 매점매석의 행위인 도고를 통해 전국 상품 유통망을 장악하여 이 지역 대 상인들이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축적으로 나타난다.  

끝으로, 우리 나라 수도 서울의 역사박물관이라는 곳을 돌아보고서 거의 전무한 유물과 조악한 전시물들, 그리고 구성의 수준이 너무 한심했다. 우선 유물이 거의 전무한 채 약간의 설명이 적힌 사진들로 도배되어 있고, 당시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 즉 민중들의 의식과 생활이 전혀 안보이고 오직 왕조사적인 역사 인식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진이나 전시물들 그리고 그 구성은 당시 사회의 모습이 전혀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오래전 모스크바 2차대전 승전기념관이나 하바롭스크 박물관과 같은 역사박물관에서 봤던 유물이나 새로 만들어진 전시물들에서 느껴지는 리얼리스틱한 현장감, 전체적인 구성과는 너무 대비 되었다 

게다가 자랑스런 역사만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임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시기에 대한 전시물이나 사진도 전혀 없어서 당시 처절했을 민중들의 상황이나 그리고 조선 왕조 귀족사회에서 백성 위에 군림한 사대부들의 뻔뻔한 모습과 무엇보다 고단하게 살았을 민중들의 삶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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