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남형/ KAIST 영양생리 연구실장, 한국식품연구원 책임연구원, (주)에그바이오텍 대표이사, (주)애드바이오텍 연구소 소장

3세기까지는 영지주의 기독교와 주류 기독교, 두 기독교가 300여 년간 역사적으로 공존해 있었다. 서기 318년 로마교황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니카야 공회를 주제한 이후 주류 기독교가 승리를 거둠으로서 영지주의 전통은 지하로 숨어 들어 갔다.

영지주의 기독교는 그 후 이름을 달리하여 마니교 등으로 발전하고, 이 신앙은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와 소아시아로 퍼져 나갔다. 카타르 파 영지주의 교회는 피의 화형을 당할 때인 12세기 까지 명맥이 유지 돼 왔다.

11-12세기 경 이단으로 몰린 영지주의자들은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 아르노 아말릭(Arnaud Amalric)과 카스텔로의 피터(Peter of Castelnau) 그리고 성 도미니크 (St. Dominic) 수도승들에 의해 악명 높은 종교재판과 잔인한 알비파 십자군에 의해 마을과 촌락이 피의 전쟁으로 물들었고 집단으로 화형 당한다. 그런데 1945년 이집트 동굴에서 한 농부가 항아리를 우연히 발견했는데, 바로 나그 함마디 (Nag Hammadi) 영지주의 문서 13권의 보물이 그것이다. 거의 1,600년 만에 햇빛을 본 것이다. 이 귀중한 자료들을 통해 영지주의가 재해석 된다.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영지주의의 부흥을 촉진시킨 심리학자다. 그는 고대 신화와 가르침을 현대적 관점에서 제시하고 영지주의에 주목할 만한 공헌을 남긴 현대 영지주의자로 평가된다.

영지주의란 말은 그리스어 그노시스(gnosis)에서 유래 됐으며, 경험을 통해 직접 얻은 지식을 의미한다. 이 그노시스를 얻거나 열망하는 사람이 바로 영지주의자다.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한 그노시스란 단어가 자기 지식(self knowledge)은 물론 궁극적, 신적 실재들에 대한 지식까지도 아우르는 직관의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노시스를 통찰(insight)로 번역해야 한다고 한다.

영지주의 메시지에 담겨 있는 영원한 생명력과 매력은 영지주의가 인간 마음(mind)의 심층과 맺고 있는 친화력에 주로 근거한다. 영지주의의 내적 핵심을 이루는 것은 특별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정통 기독교의 경전에 해당하는 어떤 일관된 교리가 없다고 비판론자들은 말하지만, 바로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그노시스의 경험에서 직접 얻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이 수행을 통해서 참 나를 직접 찾아 깨달음을 얻는 동양 종교와 그노시스가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같은 유일신교의 주류 분파들은 믿음(faith)을 크게 강조한다. 대부분의 전통 종교인들에게 ‘나는 믿는다’는 고백은 아주 중요한 증언이다. 이와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믿음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마침내 물질세계의 울타리 너머로 자신을 실어다 줄 내면의 앎을 열망하고 끝내 성취한다.

영지주의를 칭송하는 오늘날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헤럴드 볼룸 (Herold Bloom, 미국의 문학 비평가)은 <천년의 징조>란 책에서 현대적 언어로 그노시스 경험을 묘사한다. 그는 그노시스란 다채로운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홀로 있는 가운데서 나타나기도 하고 타인의 존재를 통해 오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나 자연 현상을 읽거나 쓰거나 관찰 할 수도 있고, 혹은 그저 마음으로만 응시할 수도 있다. 음악과 향, 의식 같은 것이 중요 할 수도 있다.

헤럴드 볼룸은 그노시스 경험을 다른 경험과 구별시키는 주된 특징으로 다음 두 가지를 든다. 첫째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멀리 떨어져 계시는 하느님, 즉 그릇된 창조와 무관한 하느님에 대해 알려준다. 둘째로는 인간의 깊은 본성이 창조(혹은 타락)의 일부가 아니라 과거나 지금이나 한결 같이 충만한 존재, 곧 하느님의 일부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준다. 이 하느님은 세상이 숭배하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인간적이며 또한 신적이다.

이런 점은 불교의 화엄경에서 비로자나 부처님이나 전우주의 공간을 포용하여 전재되고 있는 영원의 세계관과 열반경에서 일체중생 悉有 佛性(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의 내용과 유사한 의미이다.

영지주의의 중심에는 환상과 합일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영적 경험이 있다. 신비경험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환상적인(visionary) 신비 상태와 합일적인(unitive) 신비 상태를 구분한다. 전자가 서술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신적인 합일을 가리킨다.

고대 영지주의자들은 두 경험 모두에 참여했던 것 같다. 영지주의적인 환상에는 흔히 천상으로의 상승이 포함되지만 무아 상태에서의 죽음과 같은 다른 종류의 환상도 포함된다. 창조된 세계를 버리고 영원한 세계들로 상승해 감으로써 그 영역들에 거하는 존재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환상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것들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했다.

그들은 이런 환상을 개인 안에 있는 ‘신적불꽃’(pneuma 영靈)이 더 높은 세계의 실재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묘사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합일의 경험을 신성한 존재(소피아, 그리스도)나 궁극의 하느님의 영적 본질과 연결되는 것(신비한 결합)으로 이해했다. 이처럼 환상적인 경험과 합일적인 경험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그노시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의 체계에 따르면, 어떤 형태로든 세계는 불완전한 것으로 그려진다. 주류 기독교 사상에서는 최초의 인간부부가 하느님 법을 어김으로써 인류뿐만 아니라 온 피조물의 타락을 가져 왔다고 원죄를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해 영지주의자들의 관점은 아주 놀랍고 독특하다. 그들은 이 세계가 본래 불완전한 방법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결함을 지니는 것이라 주장한다. 영지주의는 지상의 삶이 고통과 덧없음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서 시작한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살리려고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 하고 그로 인해 다른 생명체에게 고통과 공포, 죽음을 선사한다. 이런 사실은 초식동물에게도 적용되는데, 그들도 식물의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살아가기 때문이다. 유기체의 구조가 복잡하면 할수록 고통과 괴로움도 커진다. 이런 영지주의자들의 관점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성제(고집멸도 苦集滅道)에서 주장한 一切 皆苦(모든 현상적 존재는 고통을 받고 있다)의 고통과 동일시된다.

이런 사실을 직시하기란 쉽지 않다. 세상의 어두운 측면을 기꺼이 직시하기 때문에 영지주의자와 불교인에게는 종종 염세주의자라 오해도 붙는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나 불교인이나 모두 고통과 무지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으며 그 길은 바로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의식을 물질세계에서 더 높은 영적 실재의 차원으로 끌어 올리지 않는 한, 어둠(외적-물질적 세계의 어둠과 정신세계의 어둠)에 갇힌 영혼의 노예 상태는 계속된다. 마치 몸과 마음이 영혼(soul) (또는 영 spirit)을 가두는 새장의 창살과도 같은 데 갇혔다가, 새장을 빠져나와 하늘로 날아오를 때 비로소 궁극의 의미와 행복이 있는 영적 세계로 올라가게 된다.

이 세계들을 통과해 계속 비상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본향, 곧 신성한 존재에 이른다. 아함경의 수행관에서 보면, 초기불교에서는 선정(禪定)수행을 통해서 벽지보리를 증득하는 데 구차제정(九次第定)의 가르침이 있다. 즉, 아홉 단계의 선정을 구차제정이라 한다. 처음에는 색계사선( 色界四禪 ; 초선천 天. 이선천 天, 삼선천 天. 사선천 天)을 통과하고, 다음 사무색정(四無色定; 空공무변처, 識식무변처, 無무소유처, 非想 非非想 비상 비비상처)를 통과 한 후, 마지막으로 상수멸정(想受滅定) 단계를 삼매 수행을 통해서 성취하면 깨달음을 증득하여 범부에서 깨달은 자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구차제정을 통하여 죽음의 경지를 넘어서게 되는데, 여기서 죽음의 극복이 바로 ‘열반’을 의미한다.

영지주의 자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 잠자는 인간의 영은 신의 사람들 혹은 빛의 사자들을 통해 전해진 저 궁극의 신성한 존재의 부름에 의해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런 존재들은 전 역사를 통해 참 하느님으로 부터 온다. 그들은 영혼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최고의 영적 세계에서 내려온다. 인간의 영을 본래의 의식 상태로 회복시켜 신성한 존재에게로 다시 이끌기 위해서 구원으로 이끄는 존재들은 극히 일부이다.

예수, 예언자 마니(Mani), 붓다와 조로아스터(Zoroaster)같은 위대한 종교 창시자가 빛의 사자로 인식되기도 한다. 영지주의자들의 구원의 개념은 힌두교와 불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해탈(해방)의 개념에 가깝다. 영지주의자는 죄(원죄나 그 밖의 것)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죄의 원인이 되는 무지로 부터의 구원을 바란다. 그노시스를 통해 신성한 존재를 알게 된 자는 모든 죄를 벗어버리지만, 그노시스가 없는 자는 죄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무지-영적 존재들에 대한 무지 -는 그노시스에 의해 일소되고 만다.

영지주의는 그노시스와 구원의 잠재력이 누구에게나 깃들여 있으며 구원이 대속적,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임을 인정해 왔다. 따라서 주류 기독교가 주장하는 대속 신학(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교리)의 메시지는 영지주의자에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세계는 완전하게 창조되지도 않았고, 현재의 상태는 타락의 결과가 아니며, 인류는 누구에게나 전해진다고 하는 원죄의 영향아래 있지도 않다. 따라서 분노한 아버지(하느님)를 진정시키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당해야 할 하느님의 아들(예수)도 필요 없다.

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하마르티아(hamartia)가 본래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만하다. 이런 뜻으로 사용될 때, 대부분의 인간은 죄인이다. 우리 모두는 과녁을 벗어나 있다. 참되고 신성한 것들에 무지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위대한 빛의 사자들은 이 무지를 떨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온다. 우리는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해방의 잠재력을 펼치도록 돕고자 빛의 사자들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의 가르침과 해방의 신비 의식이 필요하다.

사실 영지주의자들이 여러 가지 점에서 지상의 삶을 어둠의 세력들에 예속된 상태로 여기긴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이 고된 상태를 저절로 벗어나도록 해준다고 믿는 영지주의자는 아직 없다. 해방의 지식은 몸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얻어져야 하며, 그런 영적 해방에 이른 사람은 몸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상관없이 자유를 누린다. 그에 반해서 의식의 해방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몸이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족쇄 속에 갇혀 있다. 몇몇 영지주의 문서들에서는, 인간은 변화된 의식이 더 이상 환생(還生)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반복해서 지상의 세계로 되돌아온다고 말한다.

영지주의의 환생 개념이 흥미로운 것은, 영이 거듭해서 이 지상에 태어나는 이유가 세계를 창조한 초물질적인 권능자들의 구속으로부터 아직 자유롭게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권능자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인간의 영이 모든 활동과 조건을 치러내야 한다. 지상에 살면서 겪어야 하는 온갖 일에 정통하게 될 때 비로소 의식은 이 저급한 세계의 유혹으로 부터 풀려나게 된다.

불교의 비유를 빌리자면 몸을 입고자 하는 영혼의 ‘목마름’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해방(해탈)을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불교의 법화경에 설하신 여래 수량품(如來 壽量品)에서 보면, 즉신성불과 역겁수행(歷劫 修行)에 대해 나온다. 즉신성불(卽身成佛)이란 지금 당장이란 뜻이 아니고 지금의 이 몸으로 수행을 쌓아가기만 하면 마침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며, 역겁수행이란 오랜 세월을 두고 수행을 쌓고 또 쌓고 해야만 그 결과로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을 보면, 이생(二生)後 ,사생(四生)後, 팔생(八生)後 등 오랜 세월 환생을 통해서 계속 정진 수행해야 부처님이 된다고 설하신 내용과 같다. 위대한 영지주의자이신 붓다는 바른 생각은 반드시 바른 행동을 낳는다고 말했다(팔정도 八正道). 영지주의는 내면의 심령적 경험에 근거한 사고 체계이다. 이런 까닭에 영지주의가 그 본질과 중요성에 있어 행동보다도 마음의 상태를 더 우위에 두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영지주의는 동양의 위대한 종교인 불교와 유사성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불교의 최종 목표(영지주의의 궁극 목표와 정확히 상응한다)는 몸을 입은 존재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미래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liberation)에 있다.

불교 학자인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에 따르면, 영지주의와 불교(특히 대승불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보인다고 했다.

● 구원은 그노시스 gnosis(불교 즈나나 jnana)를 통해 얻어진다. 현실 존재들이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불교 연기법) 곧 해방(해탈)이다.

●무지가 악의 진짜 뿌리이다. 영지주의에서는 아그노시스(agnosis), 불교에서는 아비디아(avidya)라고 말한다.

●영지주의자의 지식과 불교인의 지식은 평상의 방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 계시의 결과로서 얻어진다.

●어리석은 물질주의자 (hyletic)의 상태로부터 깨달은(pneumatic 영적인) 현자의 상태에까지 이르는 영적 성숙의 단계가 있다.

●영지주의와 불교에서는 지혜의 여성적 원리(각각 소피아 sopia와 프라즈나 prajna)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콘즈는 ‘헤바즈라 탄트라’를 인용하여, “프라즈나는 세상을 낳기 때문에 어머니라 불린다”라고 말한다. 불교에는 소피아에 필적하는 관음보살과 같은 다른 신적 존재들도 있다.

●영지주의와 불교는 사실보다 신화를 선호한다. 붓다와 그리스도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원형적 존재로 제시된다.

●도덕률 폐기론의 경향(규율과 계명에 대한 경시)이 두 종교 체계 속에 내재해 있다. 영적 사다리의 낮은 단계에서는 행동의 법칙들이 중요한 것으로, 때로는 결정적인 것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높은 영적 상태에서는 그런 법칙들의 중요성이 상대적인 것으로 변한다.

●두 종교의 체계는 값싼 대중성을 혐오한다. 이들의 가르침은 영적 엘리트를 목표로 한다. 숨겨진 의미와 신비한 가르침을 일반적인 특징으로 삼는다.

●영지주의와 불교는 모두 형이상학적인 일원론을 취한다. 이는 두 종교가 현실 존재들의 다양성을 초월하여 궁극의 합일 상태에 이르기를 열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사성이 대승불교에 속하는 티베트 불교가 오늘날 서구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는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 이상의 주 내용은 <이것이 영지주의다>( 스티븐 휠러 지음, 이재길 역. 샨티 출판사)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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