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광풍이 몰아쳤을 때 산으로 피신하는 대신 일본으로 밀항을 택한 도민들이 있었다. 4.3 당시 불법 밀항에 나선 도민들은 단속돼 걸리면 부산 등으로 추방당하기도 했지만 일본에 정착해 여태껏 살고 있는 이들도 있다. 김시종 시인의 경우도 그렇다. 1949년 그의 부모는 스무살 청년이던 김시종 시인을 밀항선에 태워 일본으로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돌아오지 마라. 우리 눈앞에서 죽지 마라. 부모보다 먼저 죽지 마라. 이게 네 운명이니 일본에서 살아라.” 그는 그 후 49년 뒤에야 비로소 부모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김시종 시인의 경우가 유독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김창후 전 제주4.3연구소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4.3 당시 도일한 제주인을 5000명에서 1만 명으로 추산하는 자료가 있다고 말했다. 올해 3월 일본 오사카 시에서 개최된 ‘제주도4.3사건 7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이 관련 내용을 일부 다뤘다. 심포지엄 취지문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담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식민지 강점기에는 오사카-제주 간에 ‘기미가요마루(君代丸)’ 등 객선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1930년대 중반에는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5만여 명)이 일본에 살았다. 오사카에는 제주도 출신자들의 확고한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일본-한국 간의 경계를 넘는 제주도 주민의 생활권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8.15해방과 더불어 많은 조선인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하게 되지만, 한 번 귀환한 제주인들의 다수가 4.3사건을 전후하는 혼란기에 다시 오사카 등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점령군(GHQ)은 한 번 한반도에 귀환한 조선인들의 일본으로의 도항을 엄격히 금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조선인의 도일은 밀항이라는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의 밀항과 관련된 여러 자료에 의하면 4.3사건을 전후한 시기(1947~1949년)에 대충 5000명∼1만명의 제주인들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측된다. 4.3사건의 진상규명은 이러한 재일동포 사회와의 관련을 외면해서는 결코 완결될 수 없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일본에 정착해 디아스포라로 살아온 이들의 삶은 신산스러웠다. 고향과 두고온 가족의 얼굴을 단 하루라도 잊고 지낸 적이 있었을까.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당한 멸시와 차별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바다.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불법 입국한 도민들의 처지는 상상만으로도 아프다. 제주인들을 멸시하던 일부 일본인들의 표정은 어땠을까. 현재 예멘난민들에 대해 무지에 기초한 혐오 발언을 퍼트리고 있는 이들과 아주 많이 달랐을까?

UN의 정의에 따르면 4.3 당시 일본행 밀항선을 타고 제주를 떠난 도민들도 난민이었다. UN은 1951년 난민협약에 기초해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를 난민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본으로 향하는 밀항선 위에서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던 '4.3난민'들은 어떤 일본을 기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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