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강병철/ 제주국제대학교 특임교수, 국제정치학 박사

선거처럼 사람들을 격한 감정 상태로 몰아가는 행사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친구였다가 원수로 변하고 원수였던 사람이 은인으로 변하는 상황이 선거에서는 항다반사(恒茶飯事)로 일어난다. 그러나 연극이 끝나면 관객들이 제 갈 길을 찾아 흩어지듯이 선거가 끝나면 모두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선거가 끝나면 관용과 화해가 뒤따라야 한다. 용서와 화해 없이 일상생활을 하기는 어렵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물가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인 수호전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어쩌면 사람들이 갈등하고 싸우는 것은 정해진 숙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에서는 ‘젊어서는 수호전(水滸傳)을 읽지 말고, 늙어서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읽지 마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왜 그런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아마도 삼국지연의에서는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관점이 강하게 나타나는 반면에, 수호전에서는 운명은 정해져 있으며 사람은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길을 깨닫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시각이 나타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수호전은 북송(北宋) 말기 휘종 때 농민반란을 일으킨 송강(宋江)을 다루고 있으나, 대부분이 허구이며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역사서에는 '송강이 36명을 데리고 여기저기를 휩쓸었다'라는 정도의 사실만이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수호전에서는 서두에서부터 숙명론이 나타나고 있다.

송나라 인종(仁宗)이 통치하던 어느 해에 전염병이 퍼지자, 조정에서는 대장군 홍신(洪信)을 용호산으로 보내 신선인 천사(天師)를 모셔 오도록 하였다. 용호산(龍虎山) 상청궁(上淸宮)에 이른 홍신은 ‘복마지전(伏魔之殿)’이라는 간판이 걸린 색다른 전각 하나를 보고 궁금해 하며 도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봉인을 뜯어내고 전각을 열었다. 신전 한복판에 석비가 있었는데 ‘마침내 홍이 문을 열다’라는 글이 있었다. 홍신은 예언대로 비석을 파내자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라서 108 요괴가 풀려났다. 이렇게 하여 인간으로 태어난 108명의 호걸은 수호전의 중심 인물들이 되었다.

수호전의 인물들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기구한 운명의 장난에 휘말려 분하고 원통한 일들을 겪게 된다. 수호전에서 숙명론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인물은 아마도 노지심(魯智深)일 것이다. 그는 송나라의 위주(渭州) 경략부에서 치안을 책임지는 하위직인 제할(提轄)을 맡고 있었고 당시 이름은 노달(魯達)이었다. 정의감과 정이 많았던 노달은 떠돌이 악사의 딸을 괴롭히는 푸줏간 주인을 죽이고 도망자가 되었다가 출가하여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문수원(文殊院)에 머무르게 된다. 문수원에서 말썽을 일으키자 문수사 주지인 지진장로(智眞長老)는 노지심을 대상국사(大相國寺) 주지 지청선사(智淸禪師)에게 보내게 된다.

지진장로는 노지심에게 이해할 수 없는 네 구절로 된 게(揭)를 알려주었다. 그 사구게는 ‘봉하이금 (逢夏而擒)/여름을 만나면 사로잡고, 우납이집(遇臘而執)/섣달을 만나면 굳게 붙들어라, 청조이원(聽潮而圓)/조수소리를 들으면 둥글어지고, 견신이적(見信而寂)/편지를 보면 고요해질 것이다’였다. 이는 노지심의 정해진 운명이었다. ‘여름에 사로잡을 것(逢夏而擒)’이라고 하였는데 송림에서 하후성(夏候成)을 사로잡았고, ‘섣달에 잡을 것(遇臘而執)’이라는 것은 방랍(方臘)을 사로잡은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조수소리를 들으면 원만해질 것이고(聽潮而圓), 편지를 보면 고요해질 것(見信而寂)’이라는 구절은 조신(潮信)을 만나서 원적(圆寂)한다는 것이었다. 노지심은 예언대로 전당강(錢塘江)의 조수소리를 들어 한 순간에 도를 깨우치고 세상을 떠났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작품 ‘맥베스(Macbeth)’에서 “인생이란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만큼은 자랑스럽게 연기하지만 그것은 지나가면 잊히는 가련한 배우에 지나지 않을 뿐.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광포와 소란으로 가득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라는 대사가 나온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상은 무대이고 사람들은 각본대로 연기하는 연극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 일 것이다.

금강경에 “일체 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觀)할지어다”라는 내용이 있다. ‘일체의 세상사가 꿈이요, 순간이다’라는 인식이 있다면 용서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심경을 헤아리는 데서 관용과 화해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삶이라는 것은 우주라는 숲에 있는 조그만 ‘끝없는 용서의 길’이라는 오솔길을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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