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김봉현/ 16회 외무고시 합격, 전 호주대사, 국립외교원 겸임교수, 제주대학교 초빙교수

2018년 7월 20일 제주도 대정읍에 위치한 추사관과 유배지를 방문하였다. 제주대학교에서 강의하러 일주일에 한번 제주에 내려가지만, 강의 마치고 모친을 잠시 뵙는 것 말고는 제주를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마침 이 날은 전경련에서 주최하는 하계포럼에 초청받아 내려간 김에 모처럼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였던 대정읍을 찾아보았다. 명색이 제주가 고향임에도 제주에 묻힌 보배같은 유적지들을 제대로 찾아보지 못한 부끄럼이 항상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사실 예전에 이 곳 추사관을 한번 방문한 적이 있지만 기억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날은 기념관의 뛰어난 해설사이신 고00 여사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천천히 돌아볼 수 있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추사라는 호 이외에도 완당 등 여러 개의 호를 사용하였고, 무려 8년 3개월을 유배당하였으며, 세한도가 대정에서 유하는 동안 완성되었다는 설명이 새삼스럽다. 그리고 그 세한도를 자신이 사랑하던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하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8년 3개월을 보내면서 무위도식하지는 않았다. 낯선 마을에서 자연에 적응해 나가는 한편 주위의 후학들을 배양해 나갔다. 추사에게는 고통의 세월이었겠지만 제주도민들로서는 행운의 시절이었을 것이다.

추사 기념관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글로 남겨 보려고 추사에 관하여 좀 더 알아보던 차에, 인터넷을 통하여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후지츠카 치카시’라는 일본인이 추사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여 많은 논문을 썼고, 유품을 모았다. 후지츠카는 아들에게 추사 유품들을 한국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고, 그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2006년 2월 자신이 모은 자료와 아버지가 모은 추사 친필 글씨 26점, 추사와 관련된 서화류 70여 점 등 1만여 점을 현금 200만 엔과 함께 과천시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추사의 생애는 참으로 파란만장하였다. 추사는 19세기 중반 조선사회를 장악하였던 권문세가들, 특히 외척에 대하여 비판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화를 당하였다고 한다. 부정한 것을 보고도 못 본 척 얼굴을 돌리는 일반적인 세태에 반하여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정의를 말하다가 화를 당한 것으로 해석된다.

현실에 타협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항상 논쟁거리가 된다. 현실을 너무 무시하면 답답한 사람이 되고, 현실에 쉽게 타협하면 기회주의자가 되고 만다. 세한도에는 소나무 그림과 함께 논어의 <날이 차서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늘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글이 적혀 있다. 제자 이상적이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상관없이 변함없이 추사 자신에 대하여 ‘늘 푸름’이라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본 것이다. 이조 500년을 유지해 온 유교의 근간은 바로 ‘늘 푸름’이다. 추사는 이를 실천하려고 하였고, 화를 당한 스승에 대하여 제자 이상적이 변함없이 대하는 자세를 칭송한 것이다.

여말 선초에 이방원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하여가를 불렀고,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라는 단심가로 회답하였다. 우리 역사에서는 선죽교에서 살해당한 정몽주는 존경을 받지만, 조선의 기틀을 세우고 세종대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반석을 만들었던 태종 이방원은 그리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여가를 불렀던 이방원도 태종이라는 임금의 자리에서는 정몽주의 ‘늘 푸름’을 강조하였다. 자신은 고려를 배반하였지만 자신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자신을 배반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는 모든 권력자들에게는 공통된 현상이다. 정몽주의 ‘늘 푸름’이 이조 500년간 면면히 살아남은 이유이다.

우리는 항상 나의 이익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게 된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될까? ‘늘 푸름’을 선택하는 것이 이익이 될까, 아니면 ‘이런들 저런들’이 이익이 될까? 나는 이 선택을 소위 ‘이기적 유전자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다.

정몽주는 고려가 계속되면서 개혁을 해 나가는 것이 고려에서 기득권 세력인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될 것이고, 이방원은 새로이 창업하는 것이 가장 이익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추사에게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외척들의 발호보다는 정통 왕권의 강화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최선의 전략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충성, 의리, 일관성과 같은 가치를 이익과 관련시키는 것은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세속적인 이익이 아니라 고귀한 ‘가치’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과연 고려왕조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이 고귀한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고려왕조이든, 조선왕조이든 간에, 즉 절대적 권력에 변함없는 충성을 보여주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박정희 권력 또는 전두환 권력, 나아가서 김대중 권력, 노무현 권력에 대한 절대적 충성은 어떠한 ‘가치’를 가지게 될 까?

여기서 또 다시 ‘이기적 유전자의 전략적 선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고려왕조, 조선왕조, 나아가서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등 모든 권력에 대한 충성을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이익인 것이다. 고려왕조가 나의 이익을 가장 잘 구현시켜 줄 수 있다면 정몽주가 그러하였듯이 나는 조선왕조보다 고려왕조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전략적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전략적 선택의 전체적인 집합을 이룬 것이 국가 체제의 선택인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등 국가 리더의 선택이다. 따라서 나의 이익을 극대화시켜 줄 것으로 믿고 내가 전략적으로 선택한 위정자가 나를 배신하거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나의 이익에 반하면 당연히 그 위정자를 교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도 교체하지 않고 그대로 충성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은 이해되기 어렵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정몽주를 이방원보다 더 존경하고, 추사의 ‘늘 푸름’을 칭송하는 것일까? 그리고 무조건적인 충성과 의리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배반은 배반하는 당사자에게는 이익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배반을 당하는 사람은 손해를 입게 되고 따라서 우리는 모두 배반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배반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경계해야 하는 불필요한 자원을 소모하게 되므로 사회 공동체 전체로서는 손해가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의리 또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공동 가치로 존중하도록 중시하고 교육하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의리와 일관성이 항상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때로는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기득권 세력을 배반하는 것이 나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몽주의 충성이 이방원의 배반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배반이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자기 개인만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는 결국 국민, 나아가서 역사가 판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추사의 세한도를 보면서 이러한 상상을 펼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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