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성자/ 제주4.3연구소 이사, ‘육지사는 제주사람’ 회원

한라산과 오름의 형성과정에는 설문대할망의 노고가 녹아있다.

하루는 설문대할망이 망망한 바다 가운데 섬만 만들어 놓으니 심심해서 치마에 흙을 담아 한라산을 만들었다. 성경에 하느님도 심심하여 인간을 만들었다지 않은가. 이렇게 창조된 산은 은하수를 끌어당길 수 있을 만큼 높아 한라(한(漢)라(拏))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때 치마에서 흘린 흙이 360여 개의 오름이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물장오리오름’ 이었다. 물장오리오름은 정상에 못이 깊었다. 그 못은 바다까지 연결되어 ‘창(밑) 터진 물’이라고 불렸다. 설문대할망은 자신보다 깊은 물속을 찾아 키 재보기를 좋아했다. 어느날 할망은 그 곳으로 들어갔다가 거대한 몸이 점점 빠져 결국 머리까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설문대할망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물장오리오름에 빠져죽고 한라산신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물장오리오름을 통해 고향인 용궁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물장오리오름은 30년 전에 처음 갔었다. 4.3증언채록을 다닐 때, 증언자들이 ‘물장오리전투, 물장오리 전투’ 하시길래 현장답사 겸 간 것이다. 그 분들이 그 말을 할 때 빛나던 눈빛이며 음성은 아직도 생생하다.

가시덤불이 엉켜있는 산등성이를 낫으로 헤치며 꾸역구역 올라 한라산 깊숙히 들어갔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여름이었는데, 정상에 넓은 평지가 나오고 한쪽 끝으로 물안개가 뽀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습지를 갖춘 너른 평지가 있어 제주4.3 때 유격대들이 전투훈련이 가능했을 것이다.

1948년 6월 24일, 이 근처 계곡에서 유격대와 경찰토벌대 간의 격전이 벌어져 토벌대 28명 전원이 몰살되었다. 무기가 변변찮았을 유격대가 지형을 이용한 매복전을 펼친 것이다. 물장오리 오름은 천혜의 요새로 토벌대가 접근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때 죽은 전몰자 중에 1947년 3.1대회 때 기마경관임영관 경위도 있었다. 북초등학교에서 대회를 마치고 관덕정으로 나온 군중들 사이를 미군정 소속 기마경관이 돌아다니다 말발굽에 어린아이를 친 사건의 주인공. 성난 군중을 피해 그가 황급히 경찰서로 들어간 후 제주도민들은 관덕정 마당에서 역사 이래 처음으로 총소리를 들었다. 해산군중을 향해 발포한 총부리는 6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총격사건의 수습만 미군정이 잘했어도 제주4.3의 대학살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시위군중해산이 목적이었다면 한 발이면 족했을 것이고, 공포만 쏘아도 군중 해산이 가능했을 텐데.

물장오리오름은 왕벚나무의 자생지로도 유명하다. 왕벚나무를 제주말로 ‘사오기’라고 하는데, 나무의 질이 견고하여 혼수 필수품이던 ‘반닫이 궤’를 만드는 최고의 목재로 친다.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사오기궤를 어루만지곤 하셨다. 사진 한 장 없이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유일한 유품인 것이다. 1948년 겨울, 외가집이 불타고 어른들은 모두 총살되어 고아가 된 어머니는 불붙는 집에서 외할머니가 쓰던 사오기궤를 우선 꺼냈다. 이 궤를 지고 결혼한 이모 집으로, 큰할아버지 집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이 궤를 장녀인 내가 혼수품으로 물려받았다. 우리집 재산목록 1호인 이 사오기궤는 나무수령이 200년이 넘고 외가 삼대가 물리니 300년은 족히 되었으리라. 잦은 이사에도 이 궤는 늘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어 우리가족의 뿌리를 알려주는 족보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물장오리 오름은 절대보전지역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17호로 되어 있다. 조만간 생태계보호지역으로 지정할 계획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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