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형성된다. 감정이나 감성으로 보는 관점이 있고, 법의 관점, 행정의 관점 등 하나의 문제를 두고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하거나 비평하게 된다.

그러나 그 문제가 폭력이라면, 그것도 학생들에 의해 일어나는 학교폭력이라면 법의 기준을 앞세워 맞고, 틀렸다는 식으로 다른 생각이나 의견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는다. 이분법으로만 그 문제를 보려 한다. 특히 ‘피해’와 ‘가해’로 구분하면서 ‘약자’와 ‘강자’의 문제로 본다.

피해자인 약자는 보호의 대상이 되고 가해자인 강자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 경우 원인이나 결과를 보는 과정은 불필요하다. 결과만 놓고 정해진 틀에 사람을 끼워 넣으며 법의 기준을 들이댄다. 가해자는 인권이 없는 사람이 된다.

가해자가 자기보호를 위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분위기와 환경이 만들어지고 가해자는 폭력범이 되면서 자신을 위한 변호의 기회조차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만약 문제가 발생하고 그 문제를 보는 관점이 인권에 맞춰진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사안이 발생하고 풀어가는 과정에서부터 보호조치가 만들어지고 그 보호조치 안에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포함되는 환경이 만들어 질 것이다.

결과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그 원인으로 인해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짚어가면서 예방을 위한 조치를 찾아가고, 분쟁이나 갈등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식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풀어가는 것이 가능해 질 것이다.

최근 어떤 학교의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학교폭력이 일어났다. 그것을 풀어가는 어른들은 너무나 일처리가 미숙했다. 오직 피해와 가해로만 구분을 하면서 보상과 처벌을 위한 과정만 만들었다. 가해학생들은 ‘명예훼손과 모욕죄’에 해당한다며 폭력범이 됐다.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정신적 폭력이 일어나 한 학생이 트라우마가 생겼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 문제를 풀어가는 어른들은 가장 기본이 되는 조사의 과정에서 가해학생으로 규정한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보호조치 없이 ‘폭력확인서’를 받았다.

‘가해자’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조사를 받는 동안은 확정된 것 없이 사실관계를 다투는 과정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며 그 결과 ‘폭력확인서’는 폭력사실을 ‘확정’하는 ‘증거’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명예가 뭔지, 모욕이 뭔지 그 개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초등학교1학년들에게 ‘명예훼손과 모욕죄’를 들어 정신적 폭력을 가한 폭력범을 만들었다. 이 어린 ‘가해자’들은 자신을 변호하고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가해자’로 만들어 진 것은 아닐까. 인권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렇게 따져 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른들이 마구 헝클어 놓은 이 결과를 다시 어른들이 나서서 풀어 가면 어떨까. 그래서 어린 학생들이 학교라는 곳이 재미난 곳이고 즐거운 곳이고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웃음이 더 많은 곳이란 것을 알게 해 주면 어떨까. 꼭 그걸 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너희는 폭력범’이라고 삿대질을 해대야 할까. 그렇게 법대로 처리하자며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을 몰아세워야 했을까.

인권은 권리를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인권이 사람과 사람을 권리로 갈라놓는다면 인권적이라 할 수 있을까. 인권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가치를 존중해 주면서 서로의 삶을 더해가면서 ‘함께’라는 것을 만들어 가는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인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관계를 깨뜨릴 것이 아니라 관계 유지를 위한 지원 방안을 고민을 해봤다면 지금처럼 갈등이 심화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최석윤 제주평화인권연구소 왓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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