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16일 비자림로 도로 확장 공사 현장에 설치 중인 3m 높이의 펜스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몰래 공사'를 우려한 것. 이에 도는 3m 높이의 펜스를 철거하고 1m 남짓 높이의 A형펜스를 설치하기로 했다. (사진=김재훈 기자)

빽빽한 삼나무 숲 사이로 난 비자림로. 비자림로는 도시의 온갖 소음을 흡수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길이었다. 그 고요한 숲길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수십년을 살아온 삼나무들이 이미 잘려나갔고 숲은 흉터로 남았다. 현재 비자림로의 풍경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참혹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 참혹에 놀란 시민들이 비자림로를 찾고 있다. 시민들은 제주도 당국이 공사를 중단하겠다 약속한 뒤에도 삼나무 뿌리를 뽑는 등의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행정 당국의 기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 불신을 자초한 것이다. 공사 현장 내부를 볼 수 없도록 3m 높이로 설치되고 있는 철제 가림막(펜스)도 시민들의 분노를 키웠다.

가림막 행정, 밀실 공사를 우려한 시민들은 지난 16일 비자림로에 모여 목소리를 내는 운동을 벌이고자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인근 송당리 이장 및 개발위원 등이 현장을 찾았다. 이들은 도로 공사를 요구하고 있다. 결국 시민 대 시민 간 갈등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이번 사안에 대해 책임있는 발언을 해야 할 도 공무원은 없었다.

다행히 비자림로 확장 공사 저지를 위해 모인 시민들과 송당리 주민들 간 큰 마찰은 발생하지 않았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이 자리에서 송당리 주민들은 도로 공사 및 개발로 인한 반사이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교통 편의와 안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송당리 주민들은 최근 관광객이 늘며 비자림로 구간에서 사고 발생 시 교통정체가 극심해지고, 교통량이 적은 도로라는 이유로 제설작업이 지연되기 일쑤라고 토로했다. 관광객들이 버리는 쓰레기들로 몸살을 않아온 비자림로의 현실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한 주민은 관광객들이 버린 쓰레기를 수거하는 데 3m 당 마대 한 자루를 써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인근 메밀밭 등이 관광객들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도 전했다.

“농사일을 하는 주민들은 ‘트랙터가 여길 왜 지나가?’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밭에 함부로 들어 와서는 밭주인이 뭐라고 하면 조금 들어온 것 가지고 시비를 거냐는 둥 적반하장일 때도 많죠. 자기는 개인일 뿐이지만 그런 사람이 매일 같이 온다고 생각해봐요. 밭이 남아나나.”

결국 넘쳐나는 관광객들로 인한 피로로 인해 편의를 찾아 비자림로를 확장하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는 것. 마을 주민들의 수익으로 반영되지 않는 관광자원의 의미보다 차라리 주민들의 교통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택했다. 관광객들로 인한 피로를 겪는 송당리 주민들의 선택에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송당리 이장은 도로확장 공사 외의 대안을 물었다. 하지만 당장 그 대안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시민은 없었다. 충분한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원희룡 도정은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여러 절차를 밟았다고 주장한다. 원희룡 도정의 소통부재가 더욱 드러나는 대목이다. 도민들의 받은 충격이 방증하고 있다. 충격을 받은 도민들이 잘못됐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번 논란의 책임은 온전히 안고 가야 한다.

제2공항과 연계된 공사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도는 그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점은 이번 도로 공사로 인해 제2공항이 야기하게 될 제주 자연의 파괴를 목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2공항 관련 도로 건설이 예정돼 있다. 비자림로에 모인 시민들은 이번 사태를 단지 비자림로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2공항·제주신항 등 개발일변도 정책이 야기하는 부작용을 미리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송당리 주민들과 마주한 테이블에서 김녕리 주민 김홍모씨는 김녕·월정리 하수처리장의 문제를 지적했다. 도로가 공사되고 송당리가 개발되기 시작하면 김녕 월정리 해녀들의 고통이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를 전했다. 설득력 있는 지적이다. 개발 속도에 비해 환경 인프라 부족으로 망가져 가고 있는 제주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제주 개발 문제가 더 이상 어느 한 마을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송당리 주민들 입장에서는 송당리가 타 지역의 개발에 비해 지지부진하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을들은 연결돼 있다.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하며 특정 마을회와 개발위원 등 몇몇 주민과의 조율을 끝으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했다며 밀어붙이는 제주도 행정 당국의 관행에 대해서도 점검해봐야 한다. 많은 시민들이 소통을 요식행위로 여기는 도 공무원들의 태도에 분개하고 있다.

시민들은 원희룡 지사가 발언한 '생태도로'의 실체를 밝히는 토론회 개최 및 비자림로 확·포장 공사 전면백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행정 당국이 사업을 추진하기에 앞서 미리 도내 환경단체 등에 의견을 구하는 방법 등의 과정을 거쳤다면 시민들이 지금처럼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돌이킬 수 없는 흉터가 생기기 전에, 시민 대 시민간 갈등이 발생하기 전에, 상처로 얼룩지기 전에 ‘생태도로’나 다른 대안에 대해 논의해볼 수는 없었을까.

민선 7기 도정은 협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협치의 기본은 소통이다. 타 정당 정치인을 고위직에 앉히는 일 이전에 도민과 소통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논란을 우려하며 정보를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도민들은 분노를 키우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도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도민들에게 늦게 알려질수록 행정에 대한 불신은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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