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초록 궁궐이었다.

햇빛을 받아 더욱 빛나는 진 록의 알갱이들이 눈을 시리게 간지럽힌다.

숲속에서 뿜어내는 싱그러운 향기는 지친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엔도르핀이다.

가을날에는 울창한 삼나무 숲과 억새밭의 출렁이는 은빛 물결이 어우러져 한 폭의 파스텔화(畵)를 연상케 한다.

걸으면서, 또는 시속(時速)을 최저로 낮춘 차창을 열고 느릿느릿 지나면서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힐링(치유)한다.

제주시 구좌읍 대천동 사거리에서 금백로 입구까지 2.9Km의 ‘비자림 로’가 그렇다.

2002년 정부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선정했던 빼어난 명품 도로다.

각 지자체에서 추천한 내로라하는 전국 도로 88개소 가운데 심사를 통해 최고의 아름다운 길로 뽑았던 것이다.

이 명품 도로가 최근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하늘로 쭉쭉 뻗었던 30년 이상 된 삼나무 군락이 팔다리가 잘리 듯무참하게 잘려 나갔다.

토막 난 나무들이 널브러져 있고 드러난 황토색 붉은 속살은 황무지처럼 처참했다.

뒷감당 없는 무모한 ‘졸속행정’의 본보기다.

제주도는 비자림 길 2.9Km 구간의 2차선을 4차선으로 확장하는 계획을 세웠다.

2022년까지 207억 원을 들여 삼나무 숲길 800m 양쪽에 있는 2160그루를 베어내 길을 확장하려는 사업이다.

이를 위해 지난 2일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8일까지 350m 구간에 조성했던 삼나무 915그루를 잘라 냈다.

환경관련 단체 등 전국적인 비난과 비판 여론이 쏟아지자 도는 일단 삼나무 벌채작업을 중단했다.

왜 그랬는가? 도가 말하길 ‘주민들의 10년 숙원사업’이라 했다.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차량의 정체가 심해지자  빠른 소통을 위한 대응조치라는 것이다.

S라인 도로구조가 교통 흐름을 지체시키고 교통사고의 위험까지 있어 길을 곧고 넓게 만드는 것이라 했다.

'차량의 빠른 이동과 주민 편의제공'이 사업추진 목적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빼어난 힐링 코스를 황폐화 시키는 명분일 수가 없다. 황당하고 어이없고 위험한 발상이다.

빠르고 편리한 것‘이 최고의 가치이거나 최고의 선은 아니다. 되레 재앙이 될 수 있다.

‘5분 빨리 가려다가 50년 먼저 간다’는 교통 관련 속담이 있다. 과속이 죽음을 부를 수 있다는 경구(警句)다.

현대를 지배하는 콘셉트는 ‘속도’전이다.

과거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변화의 속도는 이미 ‘구석기 식 용어’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분초를 다투는 ‘빛의 속도’로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 과학 기술 문명 발달이 가져다 준 변화다.

첨단 과학 문명의 발달은 ‘빠름’과 ‘편리’를 가져다 준 축복이기는 하지만 불편한 재앙의 불씨도 심어 놨다.

자연자원의 고갈, 환경파괴와 생태계 교란, 지구온난화에 의한 이상기후, 가공할 핵무기 위협 등은 부산물이다.

그 재앙 적 상황은 우리가 경험하는 바다.

‘빠름’과 ‘편리’는 ‘속도 증후군’의 역설을 낳고 있다. 조금만 불편해도, 속도가 조금만 느려도, 초조하고 불안한 증상이다.

초고속 성장과 치열한 경쟁사회이다 보니 긴장과 스트레스가 심각 해 지는 것이다.

무조건 빠르고 편리한 것을 찾아다니는 심리상태가 그것이다.

한국사회의 ‘빨리 빨리 문화’의 조급증도 속도와 스피드에서 비롯됐다.

‘느림의 미학’은 이러한 심리증상을 치유하는 처방전의 하나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긴 호흡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일이다. ‘빠름을 이기는 느림의 미학’은 여기서 비롯된다.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범지구적 운동인 ‘슬로 시티(Slow city)'가 중심에 있다.

‘빠른 속도와 편리’, 생산성만을 강요하는 ‘빠른 사회(Fast city)'에서 벗어나 자연ˑ환경ˑ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여유롭고 즐겁게 살자는 취지다.

‘속도’가 기계와 문명의 시간이라면 ‘느림’은 사람과 자연의 시간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피에르 상소는 “느림은 부드럽고 우아하며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리고 했다. 그의 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다.

느리게 산다는 것은 초스피드로 인한 자본주의 문명의 광기와 해악을 제어할 수 있는 대안적 조치다. 자연친화적이며 인간다운 삶의 방식인 것이다.

파스칼도 ‘팡세’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휴식과 힐링의 부족에서 온다’는 말을 했다. 삶의 여유를 모르는 것이 불행의 씨앗이라는 말일 터이다.

제기된 문제의 ‘비자림 길 상처 치유’도 여기서 해법을 찾을 수가 있다.

‘비자림 길’에 더 이상 야만적이고 파괴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주지 말고 현 상황에서 힐링의 콘셉트로 활용하자는 말도 나온다.

2.9Km의 도로확장 계획 백지화가 전제다.

교통량이 많아 그 구간 소통이 좀 늦어지면 어떠랴. 달구지 몰고 다니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 자체가 ‘느림의 미학’인 것이다.

구불구불 S라인 길은 비자림 길의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고 도드라지게 하는 코스다.

따라서 길을 곧고 넓게 직선으로 뽑을 것이 아니라 그 구간의 차량 속도를 더 느리게 제한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 방법이 비자림 길의 가치를 더울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천천히 차를 몰아야 오히려 교통사고를 줄일 수 있다.

이미 훼손된 공간은 숲속의 힐링 체험장이나 쉼터로 재활용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속도와 편리’만을 강조하다가는 졸속의 덫에 걸릴 수 있다.

‘욕속부달 욕교반졸(欲速不達 欲巧反拙)!

‘급하게 서두르면 일이 성사되기 어렵고 작은 것에 집착하면 큰일에 낭패 본다’는 뜻이다.

마을 태수로 떠나는 제자에게 당부한 공자(孔子)의 말씀을 다시 인용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제주도정에 보내는 가르침이나 다름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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