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마영삼/ UNITAR 제주국제연수센터 소장

(장면 1) 북측 차효심 선수가 강한 스매싱으로 내리꽂은 공이 홍콩 선수들의 코트에 맞고 튕겨져 나가자 남측 장우진 선수가 두 팔을 활짝 펴고 차 선수의 품에 안겼다. 대전 충무체육관을 꽉 메운 관중들의 환호성이 폭발했다. 얼마 전 개최된 코리아오픈 국제탁구대회 혼합복식 결승전에서 얻어낸 마지막 득점에 펼쳐진 장면이다.

(장면 2) 금강산 호텔에서 열린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현장. 남측 최고령자인 101세 백성규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 다가가자 북에서 온 며느리와 손녀가 매달려 울음을 터뜨린다. 또 다른 테이블에서는 89세 유관식 할아버지가 생전 처음 보는 딸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는다. 67년 전 임신 중인 부인을 놔두고 잠시 남쪽으로 다니러 왔다가 영영 생이별하게 되어 딸이 태어난 줄도 모르고 있었단다. 하늘나라에서 부인이 부녀의 상봉을 지켜보면서 때늦은 만남을 통탄하리라. 텔레비전으로 상봉 장면을 지켜본 7천만 동포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한 핏줄임을 확인하였다.

(장면 3) 30년 전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 앞 광장. 무너진 베를린 장벽 틈새로 동독 주민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장벽 위에 올라선 서독 주민들은 동독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환호한다. 서독 땅에 첫발을 디딘 동독인들이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슈퍼마켓. 매장을 가득 메운 식품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 사이로 한마디 외침이 들린다. “야, 오렌지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위 장면들을 보고 드는 생각이나 감정은 대체로 비슷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용암처럼 분출한 동독 주민의 통일 열망과 가슴을 활짝 열고 이들을 환영한 서독 주민들의 포용력이다. 이런 열망과 포용력은 어디서 온 것인가?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역사적, 문화적 민족정체성을 공유하는 ‘공동체 의식(Sense of Community)’에 기반한 기억의 재생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견고한 분단과 차디찬 냉전의 40년을 이겨낸 독일의 공동체 의식은 어디서 왔을까? 다름아닌 ‘소통’을 통한 감동의 재생이다. 즉 베를린 장벽을 뛰어 넘는 동서독 주민 간의 끊임없는 접촉과 교류, 그리고 서로의 삶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그 시작점이었다. 동서독 국민들이 양측의 텔레비전 방송을 볼 수 있었고, 공산권 젊은이들이 서방의 방송을 통해 팝 뮤직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 소통의 끈이었다. 이로써 허물러지지 않았던 ‘공동체 의식’이야말로 통일의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다시 한반도의 얘기로 돌아와보자. 우리의 통일은 독일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울 전망이다. 분단 기간이 독일보다 두 배 가까이나 길다.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의 핵무장이다. ‘완전한 비핵화’ 없이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위험하다. 종전선언 문제도 진지하게 거론되고 있다. ‘우선의 문제’인지 아니면 ‘병행의 문제’인지에 대한 논란도 뜨겁다. 남북 간 현안을 보자면 핵, 종전선언 이외에도 생화학무기, 미사일 문제, 사찰과 검증 절차, 대북제재, 체제보장, 한미연합훈련 등 지난한 사안들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듯, 기대와는 달리 통일에 시간이 꽤나 걸릴 듯싶다.

무리수 없이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한반도를 통일로 이끄는 것이 우리 정치 지도자들의 역할이자 역사적 사명이다. 그런데 통일 문제가 정치인들의 손에 놓이면 골치 아프게 고려해야 할 요소가 불어나기 마련이다. 그동안 많은 정치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여러 시도를 해보았으나 가시적인 성과는 미미했다. 마찬가지로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등도 후속조치가 더딘 것 같다. 통일을 염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 수준을 정치 지도자들이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냉전체제가 와해된 지 근 30년이 지났지만 한반도만 여전히 냉전의 틀 속에 갇혀 있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한반도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우리는 하나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흔들며 남북 단일팀을 응원하는 응원단의 모습, 그리고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한민족 한핏줄의 극적인 재회라는 뜨거운 장면들은 공감에 바탕한 공동체를 복원하는 감동적 재생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한반도 공동체의 염원이 무엇인지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독일인들의 열망이 통일을 이끌었듯이, 한반도의 통일 열망이 식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서 교류와 소통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공동체 의식’이야말로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가 짚고 기댈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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