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무더위에 도전한 무전도보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 보고 있는 진필수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사진=김재훈 기자)

-우선 자기 소개를 부탁드린다.

1978생이다. 오라동에서 태어났고, 요리사로 일을 해왔다. 11년 전 스트레스로 청각에 장애가 생겼다. 말을 할 수 있는데, 듣지는 못 한다.

-올여름 뙤약볕에 홀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24일 간의 무전도보여행에 어떻게 도전하게 됐나?

육지 올라가서 일하기 전에는 오름 동호회에서 활동했다. 오름 다니는 걸 엄청 좋아했다. 사고 난 뒤 귀가 안 들리니 다들 반대했다. 너 장애인이잖아, 같은 말들이 너무 답답했다. 이번 여행 계획을 알려도 다들 하는 소리가 위험한데 어떻게 갈 것이냐는 것이었다. 너 가서 3일 만에 내려온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단지 귀가 안 들리는 것뿐이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착실히 준비했다. 근처에 텐트를 칠만한 곳을 알아보는 등 6개월 전부터 준비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겠다.

새끼 발가락의 물집이 터졌을 때. 천안에서 조치원으로 들어갈 때였다. 살이 터져 피가 줄줄 샜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는 사람들 시선이 힘들었다. 세월호 추모 팔찌를 끼고 가니 박사모 어르신 나타나 바로 뭐라고 하더라. 대전에서 쉬려고 했던 곳이 야영가능한 곳이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야영금지라고 씌어져 있었다.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계속 걸었다. 세탁소로 가서 앉아 있었다. 세탁소 사장이 와서 옥상으로 올라가서 자라고 하더라. 이런 저런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끓는 아스팔트에 물집이 터진 발가락은 엉망이 됐지만 화이팅 하고 있는 진필수씨 (사진=진필수씨 제공)

-청각장애를 입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나?

요리사였다. 본점 사장이 장사가 너무 잘 되니 분점을 냈다. 분점에서 일할 식구들을 구해야 하는데 여의치 않았다. 오픈 날짜가 다가 와서 본점에서 음식을 빼주고, 퇴근 후에는 오픈하는 가게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한 달 정도 날 새고 준비하다가 오픈 끝나고 이틀을 숙소에서 잔 뒤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청각장애를 입게 된 지 11년째다.

-과로로 인한 장애로 보이는데 보상은 받았나? 병원에서는 어떻게 진단했는지?

스트레스로 인한 돌발성 장애. 검사해도 나오는 것이 없다. 서울에서 치료받다 포기하고 내려온 후 사장이 1년 정도까지는 월급을 챙겨준 정도였다.

-장애로 인한 절망감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사고가 난 뒤 제주로 내려와서 일을 하려고 몇 군데 부탁하고 이력서를 50 군데 냈다. 다 거절당했다. 그 후에는 아예 일 찾는 것을 포기했다. 2~3년 몸이 안 좋은 할아버지를 보살피며 살았다. 전에는 농아복지관에서 요리를 가르친 적이 있고, 지금은 농아인협회에서 제과와 요리 수업을 하고 있다.

-청각장애를 입은 뒤에 새로 바라보게 된 사회의 문제점들이 있을 텐데.

장애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는 말들을 하지만 몸소 느낀 것은 아직 여전한 것 같다. 나의 경우 입술을 읽는다. 말할 때 사람의 입을 가만히 바라봐야 한다. 그럴 때 오해를 살 때가 종종 있다. 귀가 안 들려서 입을 바라봐야 한다, 장애인이다 얘기하면 사람들 얼굴 표정이 변한다.

-도내 다양한 행사들이 많아졌는데 불편은 없는지?

공연과 영화 등을 좋아한다. 영화의 경우 자막이 없어도 가끔씩 영화관에 가서 보기는 한다. 거의 이해하지는 못한다. 한 50% 정도 이해할까. 공연이나 다양한 행사에서 수화통역사를 비치했으면 좋겠다. 시민사회에서 진행하는 행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청각장애인들이 참여할 여지가 없다.

하루 최대 32km에 이르는 강행군에 진필수 씨의 두 발은 상처투성이가 됐다.(사진=진필수씨 제공)

-도보 여행 중에 울기도 한 걸로 알고 있다. 왜 울었나?

올라갈 때 10만원과 장애인증만 들고 갔다. 카드는 가지고 가지 않았다. 제주도에 있는 친구가 격려 차원에서 편의점 기프트콘을 보내줬다. 그후 페이스북 친구 등으로부터 프트콘을 받은 게 근 20만원이 된다. 근데 시골을 위주로 걷느라고 편의점에 들를 기회가 많지 않았다. 계산해보니 7만5천원을 사용했다. 12만원 가량이 남아 있다. 길에서 만난 할머니들이 쌈지돈 7천5백원을 주셨다. 그 돈으로 봉사단체에 아이들 먹을 것 사다 주려고 생각 중이다. 도움을 주신 분들을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난다.(진필수 씨는 눈물을 훔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주 사람들이 청각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바꿔 가야 할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아직 많다. 나는 후천적이다. 말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농아이들 같은 경우 수화가 제1모국어다. 선천적인 장애인 같은 경우는 수화를 많이 쓴다. 그러다보니 행동이 커진다. 몸짓과 얼굴 표정이 크다. 그런데 사람들은 청각장애인들이 수화를 하는 모습을 계속 쳐다본다. 신기하다고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는 경우도 많다. 그런 시선 하나하나가 청각장애인들에게 하나의 큰 벽이다.

-제주도의 청각장애인 정책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제주도에서 장애인들에 대해 일자리를 만들겠다, 만들겠다 말은 하는데 아직까지는 체감되지 않는다. 공무원 중에 장애인을 뽑는다 해서 뽑힌 경우가 있는데, 1명 뿐이다. 도에서 아직까지 청각장애인들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청각장애인에게는 위험하거나 더러운 일, 공장일 등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청년들은 서울로 가는 경우가 많다. 제주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협회나 농아인 지휘부 등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제주도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솔직히 지금 현재로서는 포기다.

-국토 종주를 하면서 앞으로의 계획도 구상했을 것도 같다.

현재 청각장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음식 만드는 수업하고 있다. 그 분들이 직접 만든 음식으로 바자회 같은 걸 시도해보고 싶다. 어르신들도 즐겁고 의미도 깊은 자리를 만들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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