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남형/ KAIST 영양생리 연구실장, 한국식품연구원 책임연구원, (주)에그바이오텍 대표이사, (주)애드바이오텍 연구소 소장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 역사에 빛을 낸 조상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것도 후손들에게는 귀감이 되는 교훈이라 보고 사명당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명스님의 속성은 풍천 임(任)씨이고, 법명은 유정(惟政)이고, 자는 이화(離幻)이고, 당호(堂號)가 사명이다. 그의 증조부 효곤공이 문과에 급제하여 정3품 장악원장을 지냈는데, 일찍이 경상도 대구의 원으로 있으면서 밀양땅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효곤공이 사명의 할아버지 종원를 낳았고, 종원은 수성(守成)을 낳았으며, 그 수성공이 달성 서씨에게 장가들어서 사명을 낳았다. 중종 39년 (1544년) 10월 17일에 태어났다. 어머니 서씨의 태몽에 "누런 두건을 쓴 황금 빛 사람이 흰 구름을 타고 높은 누각에 올라 가더라"고 밝혀졌다.

사명스님은 어릴 때부터 조숙하고 영특했으며 할아버지에게서 글공부를 배웠다. 그러나 조부께서 한계를 느껴서 직지사 황학산 밑에 계시는 황여헌 선생을 찾아가서 손자를 마낀다. 밀양 산골에서 추풍령 남쪽 김천 황악산 까지는 수백 리나 되는 먼 길인데도 열 세살 짜리 손자를 데리고 훌륭한 선비를 찾아 나선 그 조부님이야 말로 아주 멋있고 한국인의 정신을 대변해 준다.

유촌 황여헌 선생은 황희 정승 5대손으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외와 울산 군수를 지냈고 ,한번 옥사를 치르고 말년에 황악산 아래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이미 70 고령이셨다. 이때 사명에게 슬픔이 닥친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다음해에는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조부님은 더 이상 손자의 학업을 밀어줄 힘이 없었다. 이때가 15세였다. 인생무상을 배운 것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품고 있던 어린 사명에게 연이은 슬픔은 그 동안에 익힌 세속의 모든 학문 즉, 유교학에 회의를 느끼게 했다. 그러므로 우주와 인생에 있어 번뇌 없는 무루(無漏)의 학문이며 최상의 법인 불법을 찾아 입산을 서두르게 된다. 당시 직지사에는 조실 스님으로 신묵화상이 주석하고 계셨다. “어느 날, 신묵화상이 공양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어인 일로 자꾸만 졸음이 왔다는 거야. 그런데 꿈결에, 절앞에 있는 몇 백년 묵은 은행나무가 보이고, 그 은행나무 가지에는 누런 황룡 한 마리가 서려 있다가 그만 하늘로 꿈틀꿈틀 기어오르더라는 거야.”

꿈에서 깨어나신 신묵화상은 이상하다고 생각돼 은행나무 있는 데로 갔다. 천왕문 밖의 은행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화상은 개꿈을 꾸었나 보구나하고 산 아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은행나무 가지로 보이는 산길을 따라 허름한 갓을 쓴 노인이 나타났다. 다음 순간 그 노인과 동행하고 있는 초라한 행색의 한 소년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직지사를 찾아오고 있었다. 바로 저 아이가?” 노화상은 직감적으로 꿈에 본 내용과 소년을 연결시켰다. 다가온 노인은 노화상을 알고 있다는 듯이 합장배례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하는 것이다. “부디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게끔 이 어린것을 거두어 주십시오”하고.

소년의 얼굴은 해맑았으며, 눈에는 총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소년 임응규는 직지사 조실 스님 신묵화상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아 불문에 들게 된다. 신묵화상의 꿈에 나타난 그 누런 황금빛 용이야 말로 장차 조선 불교계의 빼어난 고승이요, 임진왜란을 맞아서는 나라와 백성을 한꺼번에 구한 호국성사로서 ,사명당 유정대사 그 어른이었던 것이다.

당시 사회는 성종 조와 연산군, 중종 조로 이어지면서 우리 불교계는 암흑기인 폐불 위기까지 맞게 됐었으나, 허웅당 보우대사가 나오셔서 법등을 다시 밝힐 수가 있었다. 신묵화상은 보우 큰스님과 더불어서 직지사를 다시 키울 수가 있었다. 처음 어린 사명을 승방으로 데리고 가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본 다음에 신묵화상은 파격적인 조치로 그를 자신의 행자로 삼아서 수발까지 들게 지근거리에 두었다.

사명은 제아무리 긴 경이나 법문도 한번 들으면 모두 기억해내곤 했다. 어느덧 나이 열 여덟이 되었다. 1561년 명종 16년 신유년의 양춘가절이었다. “유정아 니놈도 과거시험 치러 볼 생각 없느냐? 금년 봄 승과시험에 말이야.” 젊은 사명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기 귀를 의심했다. 나이 겨우 열 여덟이다. 선배 도반들이 승과시험 준비에 여념들이 없는데 젖비린내 나는 자기에게 승과시험이라니,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말씀을 거두어 달라했지만 신묵화상의 명령이었다. 사명이 승과시험에 응한다는 소문이 나자 직지사 대부분의 도반들도 가소로운 웃음으로 비웃었다. 일이 잘 못되면 신묵화상의 위신도 망가지고 말판이니 말이다.

당시 사회는 성종, 연산군, 중종에 이르는 3대에 걸쳐서 억불, 척 불의 단계를 벗어나 폐불의 위기까지 몰리게 됐다. 성종은 승려의 신분증이 되던 도첩제 발행을 금지 시켰으며. 연산군은 정능 흥천사와 혜화동 흥덕사를 폐하고 그곳에 있던 승려들을 모두 노비로 삼았으며, 대원각사 큰절을 없애고 그 곳에다 기생양성소인 장악원을 만들었다. 중종 또한 승려의 고등고시인 승과제도를 폐지했고, 불상을 깨고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1,2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온 민족 종교가 가물가물 꺼져가고 있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에 이어 13대 명종이 즉위하면서 불교계가 숨통을 트게 된다. 그것은 불교계로서는 허응당 보우대사의 출현을 기다린 것이다. 50년 만에 다시 승과제도가 부활된 것이다.

선종 본사인 봉은사 산 문밖 승과평(지금의 무역센터자리) 넓은 들판에는 승과시험을 치르기 위해 방방곡곡 사찰에서 몰려든 젊은 승려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젊은 사명은 구름처럼 몰려온 수많은 승려들의 모습에 두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놀랐다. 둥둥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험을 알리는 그 북소리에 넓은 승과평이 조용해졌다.

그 날 저녁 선교양종판사 (지금의 정종스님) 겸 봉은사 주지인 보우대사는 자기 승방에 좌정하고 있었다. 과연 오늘 승과시험에서 장원은 누가할까하고. 이윽고 시봉승이 들어와 승과시험 결과를 보고했다. “뭐라고 열 여덟 살 소년 승이 당당히 급제를 했다고!” 보우대사는 깜짝 놀랐다. 아니 너무나 기뻤다.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 그래 내가 찾고자 하는 인물이 바로 그런 인물일 거야. 보우대사는 한시바삐 그런 젊은이를 보고자 했다.

시자가 사명을 안내했다. 보우대사에게 예를 올린 후에 무릎을 끊고 앉았다. “젊은이는 누구인고?” “ 소승, 큰스님께 알현이옵니다. 소승의 법명은 유정이라 하옵고, 황악산 직지사에서 신묵화상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았습니다.” 보우대사는 직지사와 신묵화상 이름이 나오자 한층 더 기뻤다. “노스님께서 대사선사 어르신을 찾아뵙고 안부를 전하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 그렇다면 시험을 치르기 전에 나를 먼저 찾아 올 일이지.” 사명은 비로소 사정 얘기를 했다. 떠나오기 전에 신묵화상은 “니몸 유정이가 승과시에 등과를 하면 보우대사님을 찾아뵙고, 니몸이 실패하면 아무소리 말고 그냥 직지사로 돌아오라고” .

사명은 등과후 하루아침에 햇병아리에서 한 마리의 백학으로 변신되어 갔다. 직지사로 돌아온 사명은 직지사가 잔치집 마냥 들떠있었고 너무나 열열한 환영이었다. 신묵화상은 사명을 데리고 대웅전으로 나아가 사명의 등과를 감축하는 예를 올렸다.

그런데 보우대사는 유생들의 모함으로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목사에게 생죽음을 당했다. 1565년 명종 20년에 문정왕후가 65세 나이로 승하했다. 그러자 조정대신들과 성균관 유생은 물론 전국8도 유림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상감마마 승 보우를 내치소서! 승보우는 나랏님과 웃사람을 속였으며 조정의 국고를 비게 하고 만백성에게 환란과 해독을 끼친 적승이옵니다. 오래동안 승려의 괴수가 되어 죄와 복의 허망한 사설을 널리 퍼뜨리고 뭇사람의 귀를 미혹케 하였으며, 온 세상을 석가모니 잡설에 물들게 하였나이다. 그리고 대비마마께서 편치 못하신 중에도 풀나물 같은 소찬만 잡수게 하고 목욕재계케 함으로 인하여 망극의 변고를 당하게 됐으니 이 대역 죄인을 극형에 처해 주십시오. 상감마마!" 대비마마가 죽은 것이 보우대사 때문이라는 생트집을 계속 들고 나왔다. 그러나 명종은 보우대사를 목숨이라도 부지시키려고 제주도로 유배보냈는데, 섬에 도착하자마자 제주목사 변협이란 자가 장살로 죽인다. 너무나 공포에 질린 승려들은 시체 수습도 못하고 천도제도 못 지낸다. 그런데 과감하게 사명은 보우대사를 위해 천도제도 치른다.

어느덧 사명도 30대가 됐다. 그 동안 30세에 직지사 주지로 있었으며 허웅당 보우대사의 <허웅당 문집>을 발간했다. 32세에 한양에 있는 봉은사 주지로 천거됐다. 봉은사에 당도한 사명은 주지직을 사양한다. 그때 신묵화상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새파랗게 젊은것이 절간에서 주지 노릇이나 하고 있으면 다냐?. 어서 참구하고 용맹정진을 해야지. 그저 무사 안일하게 게으름만 피우지 말고. 불법을 구하고 도를 깨우쳐야 하느니라!”

사명은 봉은사 주지직을 사양하고 서른 두살의 나이에 모든 승직을 훌훌 벗어 던지고 입산 수행자의 모습으로 뒤돌아 갔다. 그는 때를 기다려 묘향산 휴정스님을 찾아갈 결심이었다. 사명대사와 서산대사의 역사적인 맛남이 만뤄진 것은 1575년 선조 8년 을해년의 일이었다. 서산대사는 사명보다 스물 네살이 더 많은 56세였다. 사명은 개성 송도를 지나 평양성을 지나고 묘향산에 이른다. 사명스님은 큰 법당에 들어가 예불을 드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사명은 보현사 어느 스님에게도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는데 보현사 스님들은 이미 사명이 보현사에 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님이 예불을 드리고 나오자 원무스님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서산대사에게 안내하였다. 스님은 별 말도 하지 않은 채 서산대사가 있는 절 방으로 올라가 세 번 큰절을 올린 다음, 그 앞에 공손히 끊어 앉았다. 마치 돌부처 모습의 서산대사는 사명스님의 큰절을 받고도 아무런 반응을 내보이시지 앉은 채 지그시 두 눈을 감고 묵묵히 단주 알만 굴릴 뿐이었다. 사명스님도 숨을 죽이고 기다려야만 했다. 이윽고 서산대사가 눈을 떴다. 사명스님이 입을 열었다.“제자의 이름은 유정이라 하옵니다.” “큰스님께서 인도해 주소서. 법을 얻고자 하나이다.”

“하하하. 욕심이 많은 사람이구먼. 불법이 감나무 열매던가? 어디 가서 얻고 구하게. 견성인거야. 견성!” 한마디로 서산대사와 사명스님은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것이다. 마음이 통하고 보면 설명은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법.

묘향산 보현사는 서산대사와 사명스님까지 합세했으니 조선 불교의 총 본산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날도 서산대사는 법당에서 설법하고 있었다.“불자 여러분! 오늘은 내가 염불에 관해서 알기 쉬운 말씀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상근(上根)기의 사람을 위해서는 ‘마음이 곧 부처(佛)요, 마음이 곧 淨土(정토)이며, 自性(자성)이 곧 아미타이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서방세계가 여기서 먼 거리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근(下根)기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곳이 십만 팔 천리도 더 먼 곳에 있다‘하고 숫자까지 밝히셨으니. 그 말씀인즉 서방정토가 하도 멀어서 진실로 까마득하단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방정토의 멀고 가까움은 사람에게 있고 법에 있지 아니하며, 서방정토가 불자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숨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은 말에 있는 것이지 뜻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나무아미타불하고 불과 여섯 글자를 외우는 것은 결단코 번뇌망상을 떨쳐버리고 三惡道(삼악도)의 윤회를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있기 때문이며, 그 한 가지 표현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합니까? 그러므로 밤낮으로 나무관세음보살하고 입속으로 염불을 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한번 뜯어 생각해보면 염불에도 분명히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저 원숭이나 앵무새가 뜻도 모르고 생각도 없이 주절거리듯 건성건성 말로만 관세음보살을 부르거나 아미타불을 찾는 것이 그 한가지입니다. 그와는 달리 마음속 깊이 생각하면서 지극한 염원을 담아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찾는 염불소리가 그 두 번째 종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첫 번째의 염불방법을 송(頌)이라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외우는 것을 염(念)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불자여러분 송(頌)만 할 뿐 염(念)을 할 줄 모른다면, 그 염불이라는 게 구법행위로는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다음은 아미타불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예로서 아미타 법계장 비구가 수행할 적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이시여, 내가 장래에 부처를 이룩할 때에는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의 모든 천인(天人)들과 백성, 기어다니고 날아다니며 꿈틀거리는 벌레까지도 나의 이름자를 열 번만 염(念)하면 반드시 불국정토에 태어나도록 해주시옵소서.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성불(成佛)하지 않겠나이다. 아미타 부처님 이름을 한 번만 부른다 해도 하늘 마귀는 간담이 떨어지고, 그 귀신 족보에서도 삭제되며, 금빛연못에서 연꽃이 솟아날 것이니라“

“불자 여러분, 그러므로 마음으로 부처님의 경계(境界)를 따라 항상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 명호를 부르되 흔들리고 어지럽게 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서로 상응하여야만 80억겁(劫)의 생사의 죄를 멸하고, 80억겁의 아름다운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염불 한마디가 그러하거늘 하물며 천만번 생각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선남선녀 여러분, 염불이란 그저 한갓 입으로만 건성건성 송하지 말고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깊이깊이 염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자여러분, 우리 다함께 진심으로 확실하게 염불한번 해보십시다. 나무아미타불“

그 후 스님은 해인사에서 한철 을 보낸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늘 갔다. 몽고군이 무려 30년 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침략을 자행했는데 그 국난 중에 15년간에 걸쳐서 대역사를 이뤘으니, 고려인의 민심을 수습하고 구심점을 찾는데 팔만대장경인 불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팔만대장경은 불량률이 0인 세계일류 명품으로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됐다. 제아무리 공장자동화, 시스템화 하더라도 불량율 0으로 하기는 불가능하다. 15년간 완성된 경판수가 8만1천2백38 판이며, 여기에 새겨진 글자가 모두 5,233만자가 된다. 그런데 이 수많은 글자에는 오자나 탈자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기본서체에 벗어나는 글자는 단 한자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경은 한사람의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고 전쟁 중에 수많은 사람의 부역에 의해서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품질관리 능력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체계적이었는가 하는 것을 짐작케 하는 너무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수많은 비전문가들이 5천2백 만자가 넘는 글자를 획수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것도 한사람이 쓴 것과 똑같은 동일체로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고도의 품질관리 기법이 동원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분석이다. 호국심과 불심으로 가득 찬 혼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을 통해 본다면 미국의 빌게이츠 컴퓨터 프로그램 윈도우 95나 일본의 혼다, 소니 제품을 능가하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세계 초일류 제품인 것이다. 이것이 팔만대장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그때가 1652년 선조 25년 임진 유월 상순께였다. 사명당 유정스님은 금강산 유점사의 말사인 표훈사 절에 있다가 왜적이 출몰했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유점사로 발길을 돌렸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사 25만 명을 이끌고 대규모 침략을 감행. 지난 4월 열나흘 날에 부산포에 닿아, 달포 만에 한반도의 절반이 넘는 국토를 유린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점사 스님들도 왜놈에 포로가 돼서 모진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대법당 안에는 4명의 왜군 장수들이 앉아 있었다. 부처님께 예를 올린 후 왜장에게 갔다. 한자로 왜장과 필담이 오갔는데, 다행히 불자 대장이라서 왜놈들을 설득시키고 묶여있던 스님들도 풀려낫다. 왜군들은 유점사를 철수하며 “본 사찰은 도를 아는 고승이 있는 곳이니 여러 일본국 병사들은 다시는 출입을 삼가도록 하여라!” 글귀를 남기고 갔으며 임진왜란이 참화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이어서 강원도 고성지방에서 행패부리는 일본군 군영을 찾아가서 유점사에서 필담을 나눈 왜장이 거기 있었다. 그들을 설득시켜서 고성지방 인명을 구한다. 그리고 건봉사로 가서 의병들을 모은 후에 순안고을 법흥사에 있는 서산대사에게로 향한다. 이때 이미 서산대사는 선조로부터 승의병 대장이란 직책을 제수 받았다. 그 임금은 의주 쪽으로 도망가고, 탐관오리들도 다 도망가고, 관군이 고작 4천명도 안됐다. 유성룡 대감이 전국 방방곡곡에 군을 소집하고 있었다. 사명이 이끄는 승병수가 7백이었고 승군 모두 해야 2천 정도였다. 이때 낭보가 날아 온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영규스님이 이끄는 승병들이 청주 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영규스님은 무예가 뛰어난 스님이셨다.

스님은 법흥사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도체찰사 유성룡 대감이 체류하고 있는 안주고을을 향해 북쪽으로 말을 달린다. 유성룡은 장차 명나라 이여송 장군과 의논하여 평양성 수복 작전을 지휘하고, 이후 임진, 정유의 칠년 대전을 한 몸으로 이끌어가게 될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유대감은 사명에게 8도 16종 승병 부총섭 겸 의승 도대장이란 차첩을 내린다.

임진년 다음해인 계사년 정월 명나라 군대가 드디어 도착했다. 평양성 전투가 시작됐다. 명나라 군대의 화력은 대단했고, 부벽루 절벽 쪽은 승병들이 공격했는데 사명당이 3번이나 그 길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부벽루 아래 영명사란 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2천 승병들이 단 한사람도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는 기적이 일어났다.

행주성 대첩에서도 권율장군과 함께 뇌묵당 처영 스님이 이끄는 승병들도 전투에 참가해 승리했다. 아군 숫자는 3천여 명인데 3만 명의 왜군을 상대로 싸움에 이긴 것이다. 이 싸움에서 왜병은 2만 4천명의 전사자를 냈다. 승병들은 산성의 서북쪽을 맞았는데 바윗돌을 굴리고, 화살을 쏘고, 뜨거운 물벼락을 치고, 닥치는 대로 싸웠다. 위기 순간에 승병을 이끄는 뇌묵당 스님은, “승병 여러분, 겁먹지 말고 힘껏 치고 싸워요. 힘을 내시오” 독려하며 싸웠다.

왜군들은 경상도 지방에 진을 치고 장기전 태세로 들어갔고, 한편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인인 조선은 무시한 채로. 당시 명나라 도독 유정은 남원성에 머물러 있었으며 적진을 염탐하기 위해서 사명을 적진으로 보낸다.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이 제시한 강화 조약 내용은 ① 천자와 결혼 할 것(명나라 공주를 일본국 천왕의 왕비를 삼겠다) ②조선의 4개도를 일본에 복속시킬 것 ③전과 같이 교린할 것 ④조선 왕자 1인을 일본에 영주케 할 것 ⑤조선의 대신과 대관을 일본에 불모로 보낼 것. 스님은 유정의 친서를 갖고 적진에 간다. 소득 없이 스님네 일행은 돌아온다.

사명스님 일행은 두 번째로 울산의 서생포에 있는 왜성을 방문한다. 명나라 도독 유정장군의 서신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왜가 강화조건으로 내놨던 5개항을 요구조건을 들어 줄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서 나라를 반 잃고 치욕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의 비극이었다. 이 때 왜군대장은 가또오는 30대 초반이었으나 지모를 겸비한 훌륭한 장군이었고 그 옆에는 항상 일본 승 닛진이 자문하고 있었다.

사명스님은 일본에 설보화상(說寶和尙)으로 유명해졌는데, 그 사건은 두 번째 가또오 진영을 방문했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가또오가 스님과 붓글씨로 필담을 하는데, “조선에서는 무엇이 보배이며, 또한 어떤 보물이 있는가?” 스님은 가또오의 질문에 답하길, “우리 나라 조선은 군자의 나라라 도덕을 높이 숭상하므로 상하가 모두 옷배와 곡식을 귀하게 여길 뿐, 금, 은, 옥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보배가 따로 없는 것이다.” 스님은 계속한다. “이 참에 말 한 가지 더하겠다. 지난 임진년 그대 일본군이 서울에 쳐들어 왔을 때 우리 나라 보물을 찾겠다고 남의 나라의 무덤인 선릉과 정능의 두능을 파 해쳐서 부장품을 훔쳐갔으니, 만행이 부끄럽지 않으냐. 그런 행위가 인륜에 합당한 일이냐?”

가또오 장군은 마지못해서 “본인도 나중에야 그 얘기를 들었다. 유감의 뜻을 전하고 싶다. 그래도 무언가 너희 나라에도 국보로 여기는 보물이 몇 가지는 있을 게 아닌가?” 스님은 “보배가 꼭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일본에 있지 조선에는 있지 않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일본에 있단 말인가?” “가또오 장군 당신의 머리가 바로 우리 나라의 보배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젊은 가또오는 크게 웃었다.“ 본인의 머리가 어찌하여 조선의 국보가 되는가?” “지금 우리 조선에서는 가또오 장군의 머리를 천금의 값어치로 치고 있으며, 또한 만호후의 상금을 걸고 온 나라가 구하고 있으니 어찌 우리의 보배가 아니겠는가?” 가또오는 화도 낼 수 없고 헛웃음을 날릴 뿐이었다. 이처럼 사명대사는 담대하고 송곳처럼 예리한 기지 앞에서 그 용맹스럽고 패기 있다는 가또오 왜장은 맥을 추지 못했던 것이다. 임진년에 시작된 전쟁은 5년이나 계속 휴전 상태를 유지했으며, 그 동안 스님은 산성을 쌓는 일에 승병들을 총동원했다. 대구 팔공산성, 서울의 남한산성, 남원의 주생성, 선산의 금오산성 등 수많은 성을 쌓았고 또한 군량미를 위해서 농사일도 독려했고 많은 병기도 생산했다.

그 이유는 네 번이나 적진에 다녀왔는데, 왜군은 성을 쌓고 대궐 집을 짓고 떠날 조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 방문 때 귀중한 첩보를 입수한다. 항상 옆에 있던 닛진스님이 없고 안 보던 새얼굴 스님이 있었다. 청한스님인데 , “왜 닛진(일진)스님 안 오냐”고 안부를 물었더니, 새로 온 청한스님 왈, “5월 달에는 바다 건너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 일본군 증원군과 동행하게 됩니다.” 적진에서 돌아온 후 상소문을 올린다. 적은 재침할 것이 확실하니 총동원령을 내려 일전을 감행하고 적을 퇴치하여 나라와 백성을 구해야 한다고.

이 당시 해군은 이순신이 맞고 있었다. 그런데 3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이 어느 날 서울로 압송된다. 죄목은 실오군기죄(失誤軍機罪)란 맹랑한 것이었다.파렴치한 벼슬아치들의 흉계와 농간이 숨어 있었다.

왜장 소서행장 휘하에는 요시라란 첩자가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스파이는 교묘한 공작을 꾸미고 적들의 은밀한 정보를 탑지하는 한편 역정보를 흘리기도 한다. 요시라가 이런 공작술로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 장군의 진영에 접근했다. 그의 첩보에 의하면 요번 화의가 깨진 것은 전적으로 가등청정의 잘못이었으며, 그의 화의를 한사코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그럴듯하게 꾸몄다. 그리고 특급기밀사항에 속하는 정보를 흘리는 척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고 모월모시에 가등청정이 어느 뱃길을 따라서 조선으로 건너올 모양이라는 것. 이때 이순신이 길목을 노렸다가 기습한다면 왜장 가등청정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은밀한 내통을 했다. 김응서 장군은 귀가 솔깃해서 요시라의 거짓 정보를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모일 모시에 어느 해로에 출동해서 가등청정을 잡으라는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적정을 관찰한 결과 출동하지 않는다. 그러자 첩자 요시라는 다시 김장군을 찾아가서 하늘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쳤다고 약 올린다. 이 소리에 김응서 장군은 어리석게도 이순신이 어리석은 인물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김응서장군은 다시 조정에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을 무시했다고 장계를 올리고, 선조대왕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남이신이란 자를 한산도로 보내 조사케 했으나 그 역시 왕에게 거짓말을 했다.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선조 30년 1597년 정유년 7월에 왜적이 6백척이나 배를 이끌고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총병력 14만 그리고 가또오군 5만 대략 20만 대군이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즉, 조선을 길로 삼아 명나라를 치러했는데 조선의 끈질긴 저항에다 명나라까지 불러들이고 화친도 못 맺었으니 무력에 의한 조선 정복을 시도했던 것이다. 왜적은 임진년처럼 노도같이 전국을 점령해갔다.

그러나 9월에 들어서 전세는 조선의 국운이 역전되는 계기가 됐다. 명나라 제독 마귀가 거느린 4만 명의 명나라 군사와 우리 조선 군이 경기도 적산과 소사 싸움에서 적의 기세를 꺾어버렸고, 둘째 전기는 이순신이 울둘목 해전에서의 대승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해전에서 전사한다. 일본도 풍신수길이 죽고 다음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새막부가 출발한다. 일본도 화친을 주장하고 왜적은 철수한다.

사명은 금강산으로 가서 서산대사를 알현한다. 그런데 역모로 몰려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한때 2년간 걸친 기축옥사에 걸려 옥살이를 한다. 나중에 강능 선비들이 올린 상소로 풀려나긴 했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이 얼마나 역사의 반역자들인지 알고도 남는다. 사명당은 일본과 화친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다. 그 잘난 조정대신들은 아무도 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스님은 “조선포로 3,500명을 돌려줘야 화친할 수 있다” 주장해서 포로들을 귀한 시켰다. 유성룡 대감도 이순신을 천거했다는 죄로 하회마을로 유배된다.

스님은 말년에 해인사 홍제암에서 함께 열반송을 읇었다. “네 가지가 합한 이 몸, 나 이제 돌아가려니, 참된 나에게로, 무엇 때문에, 수고로이 오가면서,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괴롭힐 것이랴, 우리는 장차 돌아가, 도를 따라 열반에 순응하리” 때는 1610년 광해군 2년 경술 8월 26일이었다. 결부좌한 자세로 앉아서 향이 다 타기도 전에 눈을 감으셨다. 세수 67년이었다.

결론적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동안 일본과의 전쟁에서 사명대사는 당대 서산대사, 허웅당 보우대사와 더불어서 유성룡대감과 이순신과 함께 역사를 빛낸 인물이다. 그런데도 조선의 유학자들이 이 다섯 영웅들을 모두 한때 숙청했으니 유학자들의 얼마나 권력에만 아첨하는 모리배인지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일본에서도 풍신수길과 덕천가강 등 일본의 영웅들이 태어났던 시기였다.

다만 슬픈 것은 삼국통일 하기 위해서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도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명나라의 힘을 빌었다. 20세기 들어 육이오 전쟁 때도 남한은 미국과 유엔군을 그리고 북한은 중공군의 힘을 빈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나라가 힘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사는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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