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 훈/ 제주출신으로 제주일고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6월 18일부터 22일까지 베트남에 갔다 왔다. 학부의 동료 선생들과 연수 명목으로 갔는데 하노이와 하롱베이를 돌아봤다. 짧은 시간이라 제대로 본 것이 없지만 느낀 점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몇 자 적는다.

먼저, 호치민 이야기다. 한마디로 호치민은 위대한 인간이다. 무엇보다도,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인 미국과 싸워 이겼으니까. 이런 승리를 가져온 데는 인민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사랑이 그 밑바탕에 놓여 있다. 그는 독신으로 일생을 마쳤을 뿐 아니라 아주 검소하게 살았다. 그의 사진을 보면 그의 소탈한 면모를 얼른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점도 꼭 덧붙여 두어야겠다. 다 아다시피 이 책은 관리들의 바른 몸가짐에 대해 쓴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이 책을 읽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부끄럽게도 필자도 고등학교 책에 나와서 그 제목만 겨우 아는  사람에 속한다. 우리보다 외국 사람이 우리 것을 더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했다는 것을 보는 느낌이 착잡했다(혹시 그의 집무실이나 침실에서 이 책을 볼 수 있을까 해서 눈여겨보았으나 방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의 존재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를 가져 보지 못하니 더 그랬다.

참고로, 그가 죽었을 때 󰡔타임󰡕지는 한때 미국이 제일 먼저 타도해야 할 적으로 지목했던 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바쳤다.

호치민은 외세에서 해방된 통일 베트남의 건설에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고통받는 그의 조국의 1,900만 인민은 이런 미래상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한 그의 헌신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박호(호 아저씨)'인 그를 이해했다. 남 베트남인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 현재 살아 있는 민족 지도자 가운데 그만큼 꿋꿋하게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타임' 1969. 9. 12. 찰스 펜, 김기태 옮김, '호치민 평전' 자인, 2001, 306쪽.)

당연히 그의 시신을 모셔 놓은 곳과 그의 집무실 들을 돌아봤다. 먼저, 베트남 사람들이 아주 많아서 곳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호치민을 '호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느끼니까 그럴 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만있어도 땀이 쏟아지는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의 순례를 보고 '호 아저씨'의 위대한 면모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얘기했듯이 호치민 자신은, 화장해 달라면서 거창하게 장례식을 치러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유언했는데, 그의 시신은 미라로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다. 호치민의 유언장 원본은 다니엘 에무리, 성기완 옮김, 󰡔호치민-혁명과 애국의 길에서󰡕, 시공사, 1998, 163-5쪽에 나와 있다. 이 유언장은 '당에 대하여',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관하여', '내 개인적 문제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우리 인민 모두에게' 보내는 부탁과 바람을 적고 있다.

장례식에 대해서는 '내 개인적 문제에 관하여'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 달라. (중략) 재는 언덕에 뿌려 달라. (중략) 언덕에 '짙푸른 나무 숲'을 꾸미도록 하라." ). 당 지도부의 이런 '배신'과 연관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호치민의 시신을 보기까지 요구되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엄숙한 태도가 거슬렸다. 카메라도 들고 가지 못하며 옷차림도 단정해야 해서 슬리퍼를 신지 말아야 하고 모자도 쓸 수 없다. 나는 이런 게 '호 아저씨'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는 친밀스러움을 없애는 쪽으로 작용하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았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즐겁게 그를 만날 수는 없을까. 이게 '호 아저씨'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과도한 형식은 허례허식과는 구별이 안 될 정도로 가까이 있는 법이다.

참고로, 리영희는 묘소의 분위기에 대해서 필자와는 조금 다르게 -베트남 전쟁이나 호치민에 대한 그의 시각에 거의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으므로 말 그대로 아주 '조금'이다-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렸다고 할 수 있는 그는 호치민과 김일성의 묘소들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한국 국민이 이런 지도자를 한번만 가져 볼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을 그 자리(아주 검소한 대통령의 궁의 집무실과 침실-인용자)에서 하게 되더라구. 그의 시신이 보존되어 있는 묘소도 아주 간소하고, 아무런 장식도 허식도 없는 건축물이었어. 그런 곳에 모셔져 있는 그의 유해를 경배하는 베트남 인민대중의 행렬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치질 않더라구. 나는 그 몇 해 후에 북한을 방문한 기회에 김일성의 묘소에 안내 받아서 참관한 일이 있는데, 그 화려함과 규모의 거대함과 참관인들을 주눅 들게 하는 여러 가지의 인위적 장치와 음향 등에 나는 그만 압도당해 버렸어. 물론 김일성도 훌륭한 독립투사였던 것이 사실이오. 그리고 미국과도 싸운 사람이고, 그리고 북한 인민대중에게는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 역시 사실이에요. 하지만 호지명 묘소를 참관하면서 내 마음에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경외감이 북한의 그분 묘소를 참관하면서는 우러나오지 않았어. (리영희, 임헌영(대담), 󰡔대화󰡕, 한길사, 2005, 348-9쪽.)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대강 그 분위기를 짐작은 할 수 있는 김일성의 묘소와 비교하면 호치민 묘소의 소박함이 뚜렷이 부각될 것이다. 그래도, 유언을 거슬러서 시신을 냉동실에 보관한다든지 그의 초라한 집무실과 비교하면 꽤 웅장한 느낌을 주는 묘소를 마련한다든지 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소박하든 화려하든 꾸밈이 없이 오로지 그의 존재 자체로 인민의 존경과 믿음이 저절로 우러나온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호치민은 그럴 수 있는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조금 동 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하는 김에 우리의 정도를 넘는 묘지 치레에 대해서 한마디만 하고 넘어가야겠다. 이번에 도보 여행 비슷한 것을 하면서 언짢았던 것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묘지를 꾸미는 돌을 취급하는 석재상을 지나는 일이었다. 저렇게 큰 돌을 가지고 으리으리하게 비석을 세우고 납골당을 만들어서 뭐 하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죽은 이의 안식처는 결국 한 줌 흙밖에 더 있을까! 정말로 조상을 기리고 싶다면 그가 살았던 모습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책으로 남기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호치민의 생각과 행위와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현실은 하노이 시내에서 만나는 거지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애처로운 눈길을 하고 우리 여행객들에게 돈을 달라면서 따라다녔다. 또 거기 사는 한국인 안내자의 말을 들으니 도둑이 많아서 현관은 물론이고 방문까지 이중 삼중으로 열쇠를 채워야 한다고 했다. 전쟁이 끝난 지 30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그렇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쪽에서는 4모작까지 가능한 쌀 농사 같은 것에서 보듯이 자원이 풍부해서 경제 정책을 제대로 실시하면 보통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은데, 이와는 다른 베트남의 오늘의 현실은 당의 잘못에서 나오는 바가 크다는 아쉬움도 물리칠 수 없었다.

베트남의 착잡한 현실은 아마 경제 성장을 최고의 목표로 상정하고 물질적으로 잘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회라면 어디서나 겪는 일일지 모른다. 서구의 근대화 개념을 이상으로 설정하는 한에서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 같은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녹색평론󰡕 같은 데서 주장하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그 대안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은 골재 채취와 시멘트 생산을 위해 내장이 드러나듯이 잔인하게 파헤쳐진 산을 보고, 소수 민족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더 절실해졌다. 개발은 필연적으로 자연의 파괴를 불러온다. 이미 호텔과 유흥가가 들어선, 잔잔한 바다에 몇 천 개의 섬이 있는 아름다운 하롱베이의 풍광도, 발가벗은 경제 논리가 지금의 추세대로 작용한다면, 온전하게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보통의 관광 여정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동료 선생의 제안으로 둘러본 소수 민족 박물관은 이번 여행의 정점이라 할 만하게 아주 좋았다. 베트남에는 50여 개의 소수 민족이 있다. 그들은 지금은 많이 변하고 있지만 그래도 대체로 과거 삶의 방식을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박물관은 그들의 주거에서부터 세세한 일상사에 관련된 것들을 잘 전시해 놓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볼 만한 것은 장날이라든지 축제 같은 것을 주제별로 나누어 비디오로 촬영한 것들이었다. 그들이 만들었음 직한 낮은 대나무 의자에 앉아 그 영상물을 하나씩 보느라고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냥 그림만 나오는 것인데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내 어린 시절과 비슷한 데가 많아서일 것이다.

나는 구경을 마치고 거기에 있는 방명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래된 것에 미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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