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언해본 일부.(이미지=문화재청, 네이버 한글캠페인)

한글은 모음이 풍부하다. ‘ㅏ, ㅑ, ㅓ, ㅕ, ㅗ, ㅛ, ㅡ, ㅣ’ 열 개의 모음을 조합하면 ‘ㅘ, ㅚ, ㅙ, ㅝ, ㅞ, ㅢ, ㅐ,ㅔ, ㅟ, ㅖ, ㅒ’까지 총 21개의 모음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음의 확장성은 언어의 표현력을 증가시킨다. ‘노란·누런· 누리끼리한·누르스름한’처럼 다채로운 형용사, ‘콜록콜록·쿨룩쿨룩·쿨럭쿨럭·보글보글·바글바글·버글버글’ 같은 풍성한 의성어와 의태어는 한국어의 주요한 개성 중 하나다. 

이처럼 자모음을 자유롭게 재조합해서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한글이 글자의 모양에 있어 소리의 자질을 구별토록 기획한 데 따른다.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이 처음 도입한 자질문자론에 따르자면 그렇다는 것. 킥킥, 켁켁, 콕콕, 쿡쿡, 캭캭 모두 다른 의미와 뉘앙스로 사용된다는 점은 생각해보면 꽤 놀랍다. 한국어의 풍부한 모음과 그 조합은 조어력의 원천이 된다. 자음 'ㅎ'를 사용한 웃음소리를 생각해보면 그 점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하하, 허허, 호호, 후후, 히히, 헤헤.

올해 여름, 아랍인들이 웃음소리 ‘하하하하하’를 ‘ههههههه’로 쓰는 것을 보고 아랍어를 배워보고자 시도했다. 웃음소리가 어쩜 이다지도 꽃 같나 싶어서. 그러나 이틀 만에 포기했다. 내 귀에는 분명 같은 발음인데 다른 음가를 지니는 경우가 많았다. 여태 한국어만 써온 입장에서는 도무지 흉내내기 어려운 소리였다. 한글로 ‘ㅎ’라고 적으면 될 것 같은 문자가 몇 가지나 됐다. 그러나 내 막귀에는 다 같은 소리로 들렸다.

한글은 타 언어에 비해 모음이 많은 편이다. 적어도 영어나 아랍어에 비해서는 그렇다. 모음의 수가 영어는 다섯 개, 아랍어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a', 'i', 'u(o)' 세 가지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랍인들이 처음 만나는 한국어의 다채로운 모음은 꽤나 큰 벽으로 작용한다. 한국어를 처음 접한 아랍인들은 ‘ㅡ’와 ‘ㅓ’ 발음을 어려워한다. 아랍어에는 그런 발음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ㅡ’ 발음이 한국인들이 'r' 발음을 제대로 구사하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오늘은 한글날이다. 훈민정음 서문에 담긴 세종대왕의 말을 떠올려 본다. 백성들이 이르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제 뜻을 담아 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내가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것이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세종대왕은 단순히 국가 위상을 고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주류사회 기득권이 아닌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쉽게 쓸 수 있는 문자를 고민하여 만들었다. 자기 권리 주장에 어려움을 겪는 약자들이 자신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제대로 요구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한글. 그러므로 한글날은 한글의 우수성을 내세우는 날이 아닌 한글 창제 정신에 따라 사회적 약자들을 생각해보는 날이어야 한다.

올해 예멘 난민들의 입국 사실이 알려진 직후 많은 한국인들이 예멘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 봉사에 나섰다. 한국어 교육 봉사에 나선 이들은 두 가지 장면에서 놀랐다. 첫 번째는 예멘인들이 한글을 쉽게 익힌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아랍어 사용자들(예멘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국가다)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재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

언어 관련 공식적인 통계 자료를 제공하는 ‘에스놀로그(Ethnologue)’에 따르면 아랍어는 전세계 3억 명 가량이 사용하는 언어다. 중국어 스페인어, 영어 다음인 4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아랍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한글을 가르치는 교재가 많지 않다 어렵다. 별다른 선택권이 없다. 그래서 한국어 교육 봉사자들은 영어로 된 한국어 교육 교재를 활용하고 있다. 세계에 우수한 한국어를 전파하고 한국문화를 널리 알리고 싶다면 다양한 언어 사용자들을 위한 한국어 교재들을 다각적으로 개발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양한 언어 사용자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 방안을 개발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의 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한글을 자랑하는 것은 ‘국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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