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숙의형 공론조사 위원회(위원장 허용진)는 지난 4일 녹지국제병원 ‘개설 불허’를 제주도지사에게 권고 했다.

원희룡지사는 8일 이를 “존중 하겠다”고 밝혔다.

공론조사위원회의 권고는 3차례에 걸친 여론 및 공론조사 결과가 토대였다.

제주도민 3012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전화면접조사와 숙의 토론 후 진행했던 배심원단 조사에서 ‘개설 반대’가 ‘개설 찬성’을 압도했다.

이로써 지난 10년간 논란이 거듭됐던 영리병원 문제는 사실상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제주도의 ‘개설 불허’가 기정사실로 굳혀졌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일단 수면 아래로 내려 간 듯 보일 뿐이다. 완전 소멸이 아니다.

언제 다시 새로운 폭발성을 갖고 솟구칠지 모른다.

정부의 녹지국제병원 사업 승인과 사업자의 병원개설 준비 완료, 허가당국의 엉거주춤 행보, 공론화 과정 등 제반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되레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풀기 힘든 밧줄이 될 수도 있다.

과정을 살펴 본 바로는 그러하다.

박근혜정부 보건복지부는 2015년 6월 중국 녹지 그룹이 제출한 녹지국제병원 사업계획을 승인했다.

사실상 국내 제1호 영리병원 사업승인이었다. 논란의 불씨였다.

이에 따라 녹지그룹측은 순발력을 발휘했다.

서귀포시 토평동 헬스케어타운 내 2만8163평방m 부지에 778억원을 투입해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의 병원 건물을 지었다.

성형외과 피부과 가정의학과 등 4개 진료과목 개설을 목표로 의료사업 관련 인원도 고용했다. 제주도에 병원개설 허가 신청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정부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9월 “의료 영리화 정책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공개 공문 한 장을 제주도에 보냈다.

의료공공성 문제에 책임이 있는 정부가 ‘병원개설허가권자는 제주도’라는 이유로 팔짱만 끼고 있다가 ‘영리병원 논란’이 불거지자 공문 한 장으로 책임을 제주도에 미뤄버리는 비겁함만 보였다.

원지사는 전임정부 보건복지부의 ‘사업 승인’과 현 정부 보건복지부의 무책임한 ‘공문 한 장’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구원투수(?)의 묘수가 등판했다. 제주도내 시민사회단체가 제안한 ‘숙의형 공론조사’가 그것이다.

전임정부가 승인한 사업을 현 정부가 반대하는 국정기조의 변화 사이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원지사‘에게는 ‘신의 한 수’ 같은 탈출구였다.

명분과 실리를 거머쥘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공론화를 통한 숙의형 민주주의의 실험이 명분이었고 거기서 책임을 모면할 수 있다면 실리를 얻게 된 것이다.

구원투수가 시민사회단체의 ‘공론화’ 제안이었다면 숙의형 공론조사 위원회의 ‘공론결정’은 야구에 비유하자면 ‘9회 말 끝내기 안타’ 같은 것이었다.

원희룡도정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공론화 결정을 ‘신의 한 수’나 ‘9회말 끝내기 안타’로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도 많다. ‘삼페인을 터뜨릴 일만은 아니’라는 조언이다.

오히려 ‘악마의 덫’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다. ‘개설 불허’ 결정의 곳곳에는 암초가 널려 있고 지뢰밭일 수도 있기때문이다.

“공론화 수용을 책임회피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먼저 사업자 측의 각종 소송 제기가 짐작된다.

정부의 승인을 받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병원을 지었으며 인력채용까지 마친 상태에서 개설을 불허한다면 피해 보전이나 구제를 받기 위한 법적 대응은 뻔하다.

손해배상 소송이나 행정 소송 등 법적 싸움에 휘말릴 공산이 크다. 그 부담을 어떻게 감당할지, 책임은 누가 질지가 걱정이다.

공론조사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다.

제주도의 공론조사 관련 조례는 2017년에 통과됐다.

녹지국제병원은 이보다 2년 전인 2015년에 승인이 난 사안이다.

이미 정부의 승인이 난 사안에 대해 뒤늦은 조례에 의한 공론조사가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불합리와 불법성 문제제기를 어떻게 극복할지도 의문이다.

다음의 문제는 외자유치 정책에 대한 국가나 지방정부의 신인도 추락이다.

향후 제주개발에 필요한 외자유치 사업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완공된 병원 건물의 활용여부, 고용인원에 대한 구제 대책도 간단한 일은 아니다.

공론화 결정이 ‘신의 한 수’라기 보다는 ‘악마의 덫’일 수도 있다는 경고를 흘려버리지 말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기서 원지사의 ‘똑똑하고 강단 있는 소통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해 당사자인 녹지국제병원 측과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해당 지역 주민들과 모나지 않은 긴밀한 협의를 통해 상생 대안을 마련하는 설득의 리더십을 말함이다.

공론조사위원회가 제안한 녹지국제병원을 비영리병원으로 활용하는 방안, 서울대 병원 분원 등 수준 높은 공공의료 기관을 유치해 제주도민에 질 좋은 의료 혜택과 의료비 역외유출을 방지하는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일이다.

그 결과에 따라 향후 원지사가 그릴 ‘큰 그림’이나 정치적 입지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것이다.

이번 녹지 국제병원 관련 공론조사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대안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공론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열수 있는 만능 마스터 키는 아니다.

문제 사안에 대한 자치단체장의 골치아픈 정책 책임회피 수단으로 남용된다면 이는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일 뿐이다.

공론화의 숙의민주주의를 활용함에 있어 보다 신중하고 진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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