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하러 오셨다가 못하시고 그냥 가신 적이 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이십니까?"  "아, 한국에 나갔다가 4주가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못했습니다." 

지난 10월 27일 '일본오사카부적십자헌혈센터 아베노룸'에 현혈하러 갔을 때 접수 담당 여직원으로부터 받은 질문이었다. 9월 18일부터 21일까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참석차 서울에 갔다 왔었다.

그후, 10월 4일 헌혈하러 갔더니 외국에 갔다 온 사람은 4주가 지나지 않으면 헌혈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의 자료에는 기재되었지만 확인 차원에서 일부러 다시 물었을런지 모른다.
어느 나라에서도 다 그렇겠지만 일본에서도 헌혈 전에 여러 질문 사항이 있는데 2,3일 전 치과의원에서의 치료 여부, 외국 방문, 동성간의 성교섭, 수술 여부, 복용 약의 부작용, 특히 에이즈 항목이 많다.

필자가 일본적십자헌혈센터에서 헌혈을 시작한 것은 1973년도부터였다. 헌혈캠페인 방송을 듣고 히가시오사카시에 살고 있던 필자는 열차를 두번 갈아 타서 갔다 오니 한나절이 걸렸다.

그후, 오사카시 이쿠노구에 이사 와서 살았는데 가까운 이쿠노중학교에 이동 헌혈차가 왔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피검사를 하는데 혈관이 제대로 안 나와서 몇 차례 시도했지만 채혈을 할 수 없었다.

"김상. 대단히 죄송스럽지만 혈관이 잘 안 나와서 피검사를 못하겠습니다. 이번에는 헌혈을 포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일부러 이렇게 와 주셨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네, 잘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간호사가 몇 차례나 머리를 숙였다. 교실 하나를 빌어서 헌혈 수속을 하는데 헌혈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교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헌혈도 하지 않고 나가는 필자를 모두 의아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혈관이 제대로 안 나와서 채혈을 못한 것뿐인데 다른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김상이라고 불리웠으니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필자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았을 것이다. 재일 한국인으로서 모처럼 헌혈을 위해 갔던 필자는 모든 시선을 의식하면서 마치 죄인처럼 나와야 했었다.

헌혈을 포기하고 몇년이 지났는데 다시 이동 헌혈차가 왔다. 다시 채혈을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한 마음 속에서 찾아 갔는데 베테랑 간호사여서 헌혈을 할 수 있었는데 솔직히 기뻤다.
자신을 갖고 그후에는 아베노헌혈센터를 찾아 가서 헌혈 신청을 했는데 채혈을 하지 못해서 그대로 나와야 했으며, 다른 헌혈 센터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필자가 헌혈을 하는 이유는 재일동포도 일본인을 위해 헌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보이고 싶은 부분도 있었으며 이 사실은 지금도 번함이 없다.

"김상"이라고 이번에는 마이크로 불러서 찾아가면 그때마다 채혈을 못하고 주위 시선을 의식하면서 나올 때면  더욱 주눅들곤 했다. 지금은 시계 밴드처럼 팔목에 끼는 밴드를 주고 빛과 신호음을 발신해서 연락한다.

1995년 이동 헌혈차가 다시 학교에 왔다. 그해 1월 17일 코베대지진(한신아와지대진재)이 일어난 해였다. 사망자 6,435명, 부상자 43,792명이라는 엄청난 인적 피해여서 이 지진 후 피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제까지는 2백CC였지만 피가 부족해서 지금은 4백CC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는 혈관이 제대로 안 나와서 걱정입니다."

고맙다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간호사의 말대로 4백CC를 헌혈할 수 있었다. 다시 자신을 갖고 헌혈센터에 갔었으나 채혈에 번번히 실패해서 그냥 돌아와야 했던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팔뚝은 혈관이 잘 안 나오지만 손등에는 혈관이 뚜렷하게 나오니까 손등에서 채혈해 달라고 하면 헌혈 규칙상 손등 채혈은 안 된다는 말도 들었다.

한혈을 완전히 포기했을 때 이번에는 겨울철에는 헌혈자가 줄어들어서 피가 부족하다는 뉴스가 나왔다. 망설이다가 다시 2013년 1월 28일 필자는 아베노헌혈센터에 가서 헌혈 신청을 했다.

이번에도 피검사를 위해 몇 군데 주사침을 놓았지만 혈관 찾는데 실패해서 그때마다 담당 간호사는 죄송하다면서 머리 숙였다. 오히려 필자가 미안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일들을 들려주면서 격려(?)했다.

몸이 차거워서 혈관이 잘 안 나오는지 모르니 따뜻한 음료수를 마시고 오라고 해서 계속 두잔을 마시고 그랬지만 안돼서, 처음 담당한 간호사가 결국 베테랑 선배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4백CC의 헌혈을 마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날 석간을 보고 필자는 깜짝 놀랐다. 여성가극단으로 유명한 타카라쓰카시의 시의원이 오사카시에 거주하는 여성과 올렸던 약혼을 <재일 차별로 약혼 파기>라는 기사였다.

2012년 3월 결혼상담소 소개로 알게된 두 사람은 6월에 시의원이 당신을 아주 좋아 한다는 편지를 건네면서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여성은 승낙을 한 며칠 후, 자기 할아버지는 재일 한국인이라고 밝혔다. 여성 자신은 일본 국적이었다.

이 말은 들은 시의원은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면서 약혼을 파기했다.
양가의 부모는 물론 지인까지 인정했던 이혼을 파기한 개인적 소송이 신문 사회면에 크게 보도되었다. 남성 측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정치적 신조에서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여성   측은 <차별 의식에 기인한 것이며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남성 측에서는 "보수파 정치가로서 활동하면서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선거권 부여에 반대하는 등의 정치적인 면을 갖고 있으므로 정치적 신조 등에서 결혼할 수 없다고 샹각했다." 이러한 설명 끝에 약혼은 성립되지 않았다면서 청구 기각을 구했다.

여성은 5천 5백만원의 손해 배상과 시의원 사직을 청구했던 소송은 그해 9월 26일 남성 측의 해결금 백만원을 지급하고, 여성은 시의원 사직을 원하지 않는다는 화해가 성립했다.

타카라시 의회는 여성의 인권을 부당하게 침해하여 의원의 자질에 결함이 있다고 해서 의원 사직 권고안을 가결했지만 시의원은 사직하지 않을 의향이어서 이 소송은 끝났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결혼 할 수 없다."는 차별 문제만을 들추면서 부당하다고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는 것을 필자는 이해할 수 있다.

이와는 정반대로 재일 한국인이 "일본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는 예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인권을 내세워 소송을 건 20대 여성의 용기 있는 행동력에 가슴 뭉클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피는 신선하지 못한 끈적끈적한 피가 틀림없으므로 헌혈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버지의 피를 수혈한 사람에게도 반대로 폐를 끼칠 것입니다."
나이도 60대인데 자신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헌혈을 자중하라는 말을 무우 자르 듯이 얘기를 못하고, 딸이 피의 질을 들추면서 은근히 헌혈 중지를 요구하는 말이 안쓰럽다.

"그럴까? 그래 딸아, 네 말대로라면 아버지의 피가 신선치 못하고 끈적끈적하드라도, 흐르는 그 피의 질과 혼은 어느 누구의 피보다도 순수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지지 않고 딸의 말에 반론을 폈다.

오래간만에 모처럼 헌혈을 하고 귀가해서 본 석간신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는 기사를 일고 필자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헌혈한 필자의 피는 틀림없이 일본인 몸 속에 흐를 것이다.

차원 다른 비교의 대상이지만 같은 날 일어난 인간의 피에 대해서 어떤 아이러니를 느꼈다. 지금끼지 필자는 12회의 헌혈을 했다.

만 70세까지 헌혈이 가능하다고 한다. 몇 개월만에 맞는 헌혈 유효 기간 때마다 필자는 앞으로도 일본적십자에서 70세까지 계속 헌혈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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