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 훈/ 제주출신으로 제주일고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삶에 정답이 있을까? 크게 보면 그와 비슷한 것이 있을 테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저마다 다르지 않을까 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 구체적인 내용에 이르면 다른 대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죽음 본능의 이론을 따르면, 심지어 불행을 자초하려고 사는 듯한 사람도 있다.

따지고 들수록 이렇게 모호해지는데, 우리 교육은 정답 위주로 간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여기에 대학을 포함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까지 12년 동안 정답을 대는 게 몸에 확고하게 배서 으레 삶에도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끔 되었다. 얼른 대학 입시를 떠올리면 필자의 말에 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공부를 잘하면 대학은 물론이고 전공까지 덩달아 정해진다. 취향이나 적성이 아니라 성적이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된다. 제 정신이라면 참으로 슬픈 일인데도 부모는 물론이고 심지어 당사자까지도 아주 당연하게 여긴다. 쓸데없이 정답만 맞추다 보니 자기 생각을 가질 틈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우리는 이렇게 남의 삶을 천연덕스럽게 산다.

사실의 세계에서야 정답이 있으니까 그래도 괜찮지만, 삶에서도 정답을 강조하다 보면 다른 생각을 무시하고 억누르기 쉽다. 내 방식만 맞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가 일신교와 다신교를 비교하면서 한 얘기는 이 ‘정답’과, ‘다른 생각’에 그대로 적용해도 좋을 것 같다.

“로마인들이 오랫동안 관용을 거부했던 유일한 신은 일신교적이고 개종을 요구하는 기독교의 신이었다. (중략) 3세기에 걸진 모든 박해의 희생자를 다 합친다 해도,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몇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후 1,500년간 기독교인은 사랑과 관용의 종교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기독교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유발 하라리, 조현욱 옮김, 󰡔사이엔스󰡕, 김영사, 2015, 306-7쪽.)

다신교는 여러 신을 믿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데 비해서 일신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을 떠받들기 때문에 교리에서는 심지어 사랑과 관용을 강조하면서도 같은 종교 안에서조차 파가 다르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 내 정답만 옳다고 생각하면 다른 생각들은 그냥 틀린 답일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 다양성은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 인간은 유한하다. 완벽하지 못하다. 당연히 다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과학마저도 이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우리는 알 수 없을 뿐이다(We simply do not know).” 경제학의 틀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케인스가 미래를 두고 한 말이다. 정답이 있고 그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의문과 질문이 없어진다.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의식한 결과다.

그런데 시험에서 정답이 가능해지자면 사실에 관한 것을 낼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예라는 혐의가 있는 대로 한라산의 높이를 묻는 문제를 예로 들면 좋을 것이다. 학생은 기계적으로 외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것을 왜 사람이 기억해야 할까? 책이나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다 나온다. 기계의 역할을 사람이 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사실을 갖고 ‘한라산에 오르는 방법’이라든지 ‘그 산의 자연 생태를 보호하는 방법’ 같은 것을 생각해 보게끔 해야 한다. 이러면 저마다 대답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험을 제대로 치자면 모든 자료를 마음대로 볼 수 있게 시험 시간을 길게 잡고 개성적인 답을 쓰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객관식 시험을 없애든지 그 비율을 최소한도로 줄여야 한다. 우리 교육 현장에서 이른바 주관식이니 서술형이니 하는 시험도 짧은 문장이나 낱말로 답할 뿐 그 본질은 객관식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두 유형 다 오로지 사실을 묻기 때문이다. 이런 걸 질문이라고 한다면, 이구동성으로 창의성을 강조하는 이 인공지능 시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4개나 5개 항목 가운데 그 하나를 답으로 고르는 문제는 윤리적으로도 아주 나쁜 결과를 낳는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수학 시험이 특히 그러한데, 시간이 모자라거나 애초에 손댈 능력이 없어서 제대로 풀지도 않은 채 찍은 것이 요행히도 맞아서 점수를 얻게 되는 경험이 쌓이면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다라는 못된 생각을 키우게 된다.

우리 병폐인 결과지상주의의 뿌리는 바로 우리 교육에도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이 없어서 문제를 풀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기계처럼 빨리 답을 쓰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추론 과정을 밟아 제대로 답을 찾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바른 교육이 되려면 결국 내 독자적인 생각을 담는 글쓰기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흐름이 일상화되면 시험은 동료 학생을 이겨야 하는 끔찍한 경쟁이 아니라 나와 다른 학생의 생각을 비교해 보고 서로 존중해 주는 그런 과정으로 바뀔 것이다.

삶에 정답은 없다. 혹시 있다면, 마땅히 각자가 마련해야 한다. 물론 남이 찾아낸 답을 존중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러면 삶은 다양해지고 이런 게 조화롭게 어울리면 세상은 지금보다는 더 즐겁고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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