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길현 교수/제주대학교 윤리교육과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고 제주미래담론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엊그제 서울에 첫 눈이 내렸다. 겨울이 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단순히 추위로만은 2프로가 부족하다. 눈이 내려야겨울임을 알리는 시각적 효과가 크다. 그것도 하얀 눈이어야 할 것이다. 함박눈이면 금상첨화이다. 만약 검은 눈이 내린다면, 행여 손꼽아 기다리던 첫눈의 환상과 설렘은 번개 불처럼 사라질 것이다.

겨울이 마냥 춥고 힘든 계절만이 아니라 고즈넉한 낭만의 계절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게 눈이라면, 제주의 겨울에서 빼놓으면 안 되는 게 감귤이다. 가을 단풍도 다 가고 삼라만상이 흐릿한 색조를 띠고 있는 타 지역과는 달리 파릇한 잎사귀와 주황색의 감귤이 줄줄이 달려있는 감귤 나무를 보노라면, 제주에서는 겨울이 달아나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제주관광의 출발은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감귤은 적어도 지난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제주도민의 삶에 지줏돌처럼 자리해 온 과일나무이다. 한때는 과장되게 ‘대학나무’라고 할 정도로 한껏 폼을 잡기도 했었지만, 시장개방화의 여파로 미국산 오렌지와 칠레산 포도 등이 대량 유입되면서 제주 감굴 산업에도 어려움이 많다. 그럼에도 여전히 감귤은 제주관광을 견인해 내는 산물로서 부족함이 없다. 더욱이 20년 전에는 수만톤씩 제주 감귤이 북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얼어붙은 한반도의 겨울을 조금이나마 해빙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일조를 하면서, ‘비타민C 외교’로 칭송을 받은 바도 있다. ‘한라에서 백두’가 그렇게 탄생하였다.

2018년 한반도 평화의 시간이 재개되었다, 아직은 갈 길이 멀고, 미흡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지만 남과 북은 물론이고 미중러일 한반도 주변 4강의 흐름도 각기는 모순적인데도 오묘하게 낙관적인 방향으로 결합되고 있다는 징조가 많다. 남북미 정상회담에 이어 남북미중 종전선언과 남북미 평화협정 등이 ‘도둑처럼’ 더 빨리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문재인 정부는 송이버섯 2톤 선물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난 11일부터 2일간 북에 제주 감귤 200톤을 보냈다. 이에 북은 청소년 학생들과 평양시 근로자들에게 전달할 것이라고 한다.

과거에 제주에서 배로 수주일 걸려 북에 감귤을 보내던 때와 비교하면, 10킬로 상자 2만개라서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떻든 군 수송기로 이틀 만에 후다닥 보낸 걸 보면서, 격세지감이 든다. 제주 감귤이 단순한 관광자원만이 아니라 다시 남북한 화해의 도구로 활용되는 걸 제주도민의 한 사람으로서 긍지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아쉬움이 컸다. 이번 제주 감귤 200톤이 북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청와대만 있고 제주도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주가 없는’ 제주산 감귤일 뿐이다. 그러니 태영호 탈북민의 입을 빌려 “귤은 이미 북한에서 덜 귀해져....다음에 북에 보낼 땐 대추가 어떨까”하는 딴죽이 조선일보 한 귀퉁이에 나오게 되는 소이이다.

그럼에도 태영호 전 주영북한공사가 제주 감귤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귤이 북한에서 얼마나 덜 귀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와 관계없이 누구든 앞으로 제주 감귤을 대할 때는, 감귤이 제주도민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한 번 더 돌아보면서, 그냥 내키는 대로 ‘다음에는 감귤 말고 대추를’ 운운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제주산 감귤이 남한에서 여기저기 넘쳐나듯 북에서는 중국산 감귤이 넘쳐나고 있으니, 이제는 제주산 감귤로 생색내지 말라는 듯한 태공사의 저의에 필자는 분을 참기가 어렵다, 태공사의 말대로 “돈만 있으면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된 게 감귤이라고 해서, 제주 감귤에 깃들어 있는 애환과 가치 그리고 미래 역할을 폄하하는 건 도무지 130만 제주도 내·외 제주도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남 탓은 그만하자. 그게 다 제주도민의 역할이 없는 부재한 가운데 감귤 북한 보내기가 진행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도대체 한반도 평화 시대에 부응하는 ‘세계평화의 서 제주’ 도민의 이렇다 할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탈북민이 한 마디 할 때마다 희로애락을 표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제주도정과 제주시민사회단체의 남다른 각성이 요청된다. 앞으로 허튼 소리 듣지 않도록 하려면 그렇다. 청와대와 중앙정부만 쳐다보는 것으로는 제주특별자치의 미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근본적으로 제주도민들이 정신 차려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제주 감귤이 미국산 오렌지와 일본 및 중국산 감귤과 북한에서 경쟁을 벌일 때가 곧 다가오고 있다. 국내시장 개방으로 제주 감귤이 시련을 겪은 바 있는데, 북한시장 개방 이후 거기서 또 밀려나면 그야말로 제주 감귤은 태영호 공사의 말마따나 대추 수준의 과일로 전락하게 될 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건 감귤만이 아니다. 제주관광도 마찬가지이다. 북한관광이 개방되어도 제주관광이 제주감귤과 함께 여전히 품질과 맛 그리고 품격에서 ‘제주다움’의 경쟁력을 발굴하고 신장시켜 나가는 제주도민의 합심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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