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진운동에 내몰린 원희룡 지사

국내 1호 영리병원 허가 이후 후폭풍이 거세다.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촛불 집회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당장 15일 오후 5시 제주시청 앞에서 촛불 집회가 열린다. ‘의료영리화 저지 도민운동본부’는 이날 촛불집회에서 ‘영리병원 철회, 원희룡 지사 퇴진’을 요구할 계획이다. 영리병원 허가의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도 12일 전국 지부장연석회의를 열었다. 이날 노조는 제주 영리병원 철회를 위한 총력 투쟁을 다짐했다. 광화문 촛불 문화제도 열겠다고 했다. 노조 위원장은 “영리병원 반대 투쟁이 곧 보건의료노조의 역사적 사명”이라고까지 했다. 보건의료산업노조 등 시민사회 진영의 반대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리병원 개설 허가는 제주도라는 지역의 문제가 아닌 전국 이슈가 되어 버렸다. 원희룡 도지사는 연일 영리병원 개설 허가가 “불가피한 결단”이었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정작 이 논란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다. 영리병원 개설 허가 결정이 내려진 직후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현 정부에서 의료영리화, 특히 영리병원은 추진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도 “이미 복지부 장관이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이 정부에서 더 이상 (영리병원은) 없다”고 했다. 이 같은 정부의 입장은 녹지국제병원의 허가권자가 제주도지사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에는 외국의료기관 개설 허가권자를 제주도지사로 정하고 있다.(제307조)

녹지국제병원 허가 1차적 책임은 도지사

녹지국제병원 개설 허가 논란의 1차적 책임은 원희룡 제주도지사에게 있다. 하지만 영리병원 개설 문제가 보건의료산업과 공공의료 체계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한다면 정부의 이같은 입장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 밝힌 보건의료 정책 공약의 핵심 중 하나는 ‘보장성 강화’였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 회의에서 김연명 사회분과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의 정책 핵심은 보장성 강화”라고 말했다.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가계가 부담하는 사적 진료비를 낮추겠다는 정책적 의지의 표현이다.

정책의 또 다른 축은 ‘공공성 강화’였다.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공약집에는 ‘재벌에게 특혜주고 국민에게 부담주는 의료영리화 정책 저지’가 분명히 적혀있다. 당시만 해도 국회에는 서비스발전기본법이 계류 중이었다. 서비스발전기본법은 국제의료사업지원법, 관광진흥법과 함께 박근혜 정부 시절 강하게 밀어붙였던 ‘경제활성화 3법’ 중 하나였다. 박근혜 정부는 2012년 7월 이 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법안의 목적은 ‘서비스산업을 통한 경제성장’이었다. 제조업만으로는 경제성장의 한계가 있으니 서비스산업 부분에서 새로운 경제 성장의 동력을 찾자는 게 정부의 논리였다. 법안 내용을 들여다보면 서비스산업 발전을 위한 규제 완화가 핵심이었다. 이 규제완화 대상에 보건, 의료 분야를 포함시키느냐가 당시 쟁점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임기 내내 병원 간 인수합병, 원격 진료 허용 등 보건의료 분야의 영리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보건산업 의료 정책 중 하나인 ‘공공성 강화’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과 대척점에 서 있다.

무너지기 시작한 의료 공공성 강화

하지만 대통령 당선 이후 문재인 정부의 정책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흔들기 시작한 게 ‘공공성 강화’였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의 ‘의료기기 규제 혁신 현장방문’ 행사였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경기도 성남 분당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이날 방문에 대해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의료기기 분야 규제 완화'를 통해 '혁신 성장' 행보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도 같은 날 ‘의료기기 인허가 규제 전면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이는 ‘보장성과 공공성 강화’라는 기조에서 의료 분야 규제 완화를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정책의 변화를 보여준다.

보건의료산업계에서는 이에 대해서 영리병원 허용 등 의료 영리화 대신 의료기기 도입 규제 완화라는 환자 편의에 중점을 둔 부분만 다를 뿐 박근혜 정부의 의료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 ‘의료기기, 제약에 투자하는 게 신성장사업이고 4차 산업혁명이기 때문에 규제 완화를 해야 한다’는 의료 산업화(민영화) 논리라는 비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발표 중에서 보건의료계가 크게 우려한 부분은 ‘의료기기 산업 육성을 위한 산병협력단 설치’였다. 산병협력단은 말 그대로 산업계와 병원이 서로 협력해 의료기기 산업 발전을 이룰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풍부한 진료경험을 지닌 의사들과 의료 산업계의 노하우를 접목해서 보건의료 지식과 기술분야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발상이다. 대학에서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는 산학협력단과 유사한 형태로 병원의 우수한 연구개발 성과를 의료 산업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조직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산병협력단이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병원의 영리목적 자회사(법인) 허용 방안과 유사하다는 데 있다. 현행 법에는 산업 자본이 병원에 직접 투자해 지분을 받는 게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산병협력단이 만들어지면 산업 자본이 의료분야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사실상 의료 영리화를 가능하게 하는 발상이라는 지적이었다. 한마디로 우회적 영리병원화라는 판을 만들어줄 거라는 우려였다.

정부, 제주 영리병원 논란 방관의 핵심은?

이런 정책 변화의 핵심에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초반 ‘소득주도 성장론’을 내걸었다. 당선 직후인 2017년 5월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소득주도 성장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을 성장과 분배의 악순환 구조를 탈피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내세웠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청와대 정책실장 임명 등 그동안 소득주도 성장론을 주장했던 인사들의 발탁도 이를 정책 우선 과제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되었다. 2017년 7월 관계 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에서도 소득주도 성장은 핵심 경제 전략이었다.

소득주도 성장론이 대두된 배경에는 2000년대 이후 경제 침체가 지속되면서 한국 경제의 저성장이 장기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자리잡고 있다. 최근 5년간 한국 경제 성장률은 3%에도 미치지 못했다. 과거 수출주도 성장전략이 한계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가계 소득 증대를 통한 성장전략이 필요하다는 반성도 있었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그동안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한 재벌 위주의 성장, 낙수효과에 기대한 성장이라는 경제성장의 패러다임의 비판과 성찰에서 나왔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경제 철학의 전환을 예고하는 거였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정책 추진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보수 일간지와 경제지를 중심으로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비판적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최저임금 인상이 소득주도 성장의 모든 것이 아닌데도 마치 '소득주도 성장=최저임금 인상'이라는 프레임이 짜여졌다. 자유한국당 등의 비난도 거셌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조짐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노동 정책에서 시작되었다. 소득주도 성장을 이루고 공정경제를 확립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정책 변화는 이와 반대로 간다는 지적도 진보 진영에서 터져나왔다. 진보성향 교수 학자들은 지난 7월 문재인 정부의 과감한 경제개혁을 촉구하는 지식인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들은 최저임금 논란이 경제적 약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부각되어왔던 점을 지적하면서 재벌적폐 청산과 경제 민주화 정책, 비정규직 정규직화 및 노동존중 사회로의 로드맵 확보 등을 촉구했다. 이들의 지적을 요약하면 재벌개혁의 성과는 없고 '을들의 갈등'만 부각됐다는 비판이다. 부동산 보유세 강화 후퇴 등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내세웠던 경제 개혁 과제들이 번번이 무산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였다.

정부 ‘혁신성장’ 경제정책 변화…의료정책 산업화 논리

보수와 진보 진영 양쪽에서 비판이 거세지면서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도 난관에 부딪혔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곤혹스럽다는 표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청와대 경제 정책이 개혁보다는 전통적 성장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신호가 감지되었다.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 방향이 일자리, 분배 등을 강조한 '소득주도 성장'에서 보다 전통적인 성장동력 확보 방안 위주의 '혁신성장'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관측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보건 의료산업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 필요성을 언급했던 시기는 이러한 정책 변화의 과정에서 나왔던 ‘계산된’ 발언이었다. 과거 민주당은 야당 시절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 투자를 끌어들이고 이를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강한 어조로 지적했다.

하지만 지금 문재인 정부의 기조는 출범 초기와 달라졌다. 지난 8월 보건복지부는 ‘의사-환자 간’ 원격 의료 도입을 위해 의료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원격의료는 박근혜 정부 시절 ‘경제 활성화 3법’ 중 하나였던 서비스산업발전법의 핵심 내용 중 하나였다. 2016년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와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 허용과 의료법인의 영리 자회사 허용 등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원격 의료는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상징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은 원격 의료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충남 서산의 한 요양원을 방문해 원격 의료가 본격화되면 관련 기기와 장비산업도 발전하고 고용 인력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의료 영리화가 우려된다면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원격의료 반대를 당론으로 정해 시민사회와 함께 정부를 압박했다. 민주당의 강한 반대 때문에 원격 의료를 위한 의료법 개정안은 2014년과 2016년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되었다. 보건복지부의 원격 의료 발표는 불과 2년 전 민주당의 입장과 대척점에 놓여있다.

원격의료, 영리병원..문재인 정부 보건의료 정책 변화의 핵심

원격 의료 필요성은 보건복지부의 단독 결정이 아니었다. 국회와 정부, 청와대 사이에 의견 조율을 통해 발표된 것이다.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대해 보건복지위 간사인 기동민 의원은 중증질환자나 만성질환자는 포함하지 않고 원격진료가 불가피한 4곳만 포함시키기로 당정청이 조율을 마쳤다고 밝혔다. 당장 보건의료계의 반발이 거셌다. 도서 벽지에 의사가 부족하면 공공 분야에서 의사를 더 채용하면 될 일이지 정부가 의료 사각지대를 핑계로 원격의료를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의사와 의사 간의 진료 효율을 위한 수단으로 한정하겠다”고 밝힌 공약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비판도 있었다.

원격 의료에 대한 입장변화와 함께 문재인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다. 바로 지난 6월 8일 열린 혁신성장 관계 장관 회의였다.

정부 규제 개혁 외치고 기업 건의하고..

이날 회의에서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규제혁신과 관련한 발언을 했다. 이 자리에서 김동연 부총리는 “이해관계자의 대립이나 사회 이슈화로 혁신이 잘 안되는 분야도 규제혁신 방안을 조속히 만들어 정부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당시 김 부총리의 발언을 두고 여러 해석이 분분했다. 무엇인가를 염두에 둔 ‘작심 발언’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김 부총리의 발언 일주일 뒤 ‘작심’의 실체를 추측할 수 있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한국경영자총연합회가 ‘영리병원 설립 허용과 원격 의료 규제 개선 등 9건의 혁신성장 규제개혁 과제’를 기획재정부에 건의한 거였다. 김 부총리의 발언이 규제 완화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2달 후인 8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의 원격 의료 가능성 발언이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나치게 의료 민영화로 가지 않고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원격 진료도 가능하게 해야 한다”면서 원격 의료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오래전부터 의료 산업 진출에 욕심을 내고 있었던 삼성이 발 빠르게 나섰다.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장은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김동연 부총리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삼성은 복제약 규제 개선을 요구했다. 복제약 가격 인상을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만남 이후 김동연 부총리는 의료 관련 규제가 규제 혁신 리스트 우선 순위에 있다는 시그널을 준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방임, 원희룡 도지사의 자충수

이 과정에서 영리병원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입장도 변화가 있었다. 녹지병원 문제를 제주도가 판단할 문제라고 한발 물러선 것이다. 혁신성장을 위한 보건의료 산업 규제 완화의 두 축이 영리병원과 원격 의료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원격의료에 대해서 민주당은 의료 접근성이라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산간벽지, 군부대, 교도소 등의 환자들이 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원격 의료 도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미 당정청 협의는 끝났다. 아직 법안 발의는 되지 않았으나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당정청이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경총은 규제개선 리스트의 핵심으로 영리병원과 원격 의료를 내세웠다. 경총의 요구사항이 어떻게 관철될 것인가. 그것이 문재인 정부의 개혁 의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 박근혜의 길을 따라가는 것 같다. 영리병원 개설 허가가 원희룡 제주도지사만의 단독 결정이라고 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재인 정부의 묵인, 혹은 방임이 없었다면 원희룡 도지사의 결정은 쉽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들었던 원희룡 지사가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을리 만무하다.

공교롭게도 모든 게 기업의 바람대로 되고 있다. 영리병원도, 원격 의료도. 산업계의 ‘빅 픽처’가 정부와의 교감 없이 그려졌다고 믿는 건 순진한 발상이다. 그렇다면 녹지국제병원 논란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정부와 원희룡 도지사가 공동정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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