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는 어떻게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어제 이정림 씨가 돌아가셨네. 내일이 오쓰야(お通夜:일포)인데 알리고 있네." 제주 제일중학교 1회이시고 민단 이쿠노 남지부 상임고문이신 김남화 선배님으로부터 12월 13일 오전 걸려온 전화였다. 필자는 일중 14회이고 민단 이쿠노 남지부 지단장을 맡고 있었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참석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역시 그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전화를 했네. 오쓰야 시간은 아직 정해 지지 않았지만 정하면 다시 연락하겠네." 오후에 다시 전화가 왔다. 오쓰야는 14일 오후 6시라고 했다. 그날 저녁 한승철 오사카 오현고등학교 총동창회장으로부터도 전화가 왔다.

14일 오전에는 민단오사카본부에서 정식으로 업무연락 공문이 와서 이정림 전 이사장의 오쓰야와 15일 오전 11시, 고별식 날짜와 시간을 펙스로 본부 고문, 각 지부와 산하단체에 보내 왔다. 이정림 전 이사장은 민단본부 고문이기도 했다. 우리 지부에서도 조화를 보내고 필자도 망설임 없이 오쓰야에 참석했다.    

(오쓰야라고 해서 고별식 전날 밤에 제를 지내는 의례는 한국과 달라서 스님이 불경을 외울 때는 조문객이 차례로 제단에 나가서 준비한 향을 피우면서 목례를 하고, 목사가 추도 설교를 할 때에는 마치고 나서 조문객들이 한송이 국화꽃을 헌화한다.) 

"내가 현직 이사장으로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연락도 있었지만, 현직을 떠나니 등을 돌린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김길호 선생은 내가 현직에 있을 때는 별로 얘기도 나누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격려 편지까지 주시니 너무 고맙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1998년 관서흥은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정림 씨는 재일동포 염원이던 보통은행 설립을 위해 이희건 회장을 중심으로 일본 금융청에 인가 신청을 내기 위해 다방면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관서흥은은 1955년 창립된 오사카흥은의 모체이고 시발점이었다. 1980년에 나라현에 코마컨트리클럽을 조성했고 1982년에는 한국에 신한은행을 창립했다. 1993년 일본의 거품경제가 썰물처럼 빠질 무렵 재일동포 금융계는 새로운 재편으로 체제를 일신했다.

오사카흥은은 장래 보통은행으로서 도약을 위해 인근의 동포 신용조합 코베. 나라, 오카야마, 시가의 신용조합을 흡수 병합했고, 1995년에는 일본 금융 당국의 요청으로 중부지방의 기후상은을 구제(救濟) 통합했다. 경영 확대와 함께 1993년에 오사카흥은을 관서흥은으로 개칭하여 1998년 이정림 씨는 이사장에 취임했었다.

승승장구였던 관서흥은이 2000년 어느 누구도 예상 못했던 된서리를 맞았다. 1999년 3월 현재 채무초가라는 이유를 들어 일본 금융청과 금융재정위원회는 관서흥은에 파산선고를 내렸다. 재일동포사회는 민족 금융을 말살하려는 이 부당한 처사에 동포사회가 하나가 되어 일어났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시 이 결론에 대해서 관서흥은은 장래에 보통은행 설립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일본 금융당국은 이것을 하나의 회유책으로 삼고 부실 신용조합과의 통합도 강력하게 권유했다고 항의했다.

그리고 더 큰 의미에서는 일본 정부는 북한계의 조총련 금융기관을 파산 선고 시킨 후여서, 형평성을 위해 한국계 관서흥은도 일본 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파산 선고를 내렸다고 했다. 이 당시 일본 야당만이 아니라 여당인 자민당 거물급 정치가들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만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당시 관서흥은 경영진들은 모두 사임하고 사법 당국의 제재도 받았었다. 이 무렵에 필자는 이정림 전 이사장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제주 출신 중에는 민단 간부들은 많지만 금융계에는 이사장님 혼자 밖에 안 계신데 이번 결과는 너무 안쓰럽고 재일 제주인으로서도 막대한 인적 손실이라고 쓰면서 힘내시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급속히 이정림 전이사장과 기까워지면서 관서흥은의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필자는 작가로서 이것을 써야 한다는 사명까지 느꼈으며, 이정림 전 이사장에게도 꼭 쓰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

2007년 필자는 한국 월간문학이 제정한 제16회 해외한국문학상을 수상했고, 수상자 신작 원고 요청이 있어서 그해 8월호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집행유예"라는 제목으로 관서흥은을 내용으로 쓴 작품을 발표했다.

이정림 이사장에게는 책이 나오기 전에 컴퓨터도 아니고 자필로 쓴 원고를 기념으로 복사해서 우송했다. 며칠이 지나도 받았다는 연락도 없어서 웬일인가 싶어서 전화를 했었다. 그런데, "당신한테 이런  소설을 쓰라고 얘기한 것이 아닌데 이건 너무한 것 아니오!?"

이 첫 마디에 필자는 아연했다. 어디가 어떻게 마음에 안드는 내용인지 말해 달라는 요청에도 무조건 당신하고는 앞으로 얘기도 않겠다면서 피했다. 아니, 노골적으로 외면했고 무시했다. 오사카 동포사회는 좁아서 그후 행사 때마다 자주 만나지만 어색한 겉인사로 넘어갔다.
특히 이정림 이사장과 필자는 같은 이쿠노에 살고 있고 가깝게 지냈을 때 갔던 단골집도 같아서 가끔 마주칠 때가 있었다. 당사자인 전 이사장과 필자도 불편하지만 우리 관계를 아는 주인들도 신경을 쓰곤했다.

김남화 선배님이나 다른 분들도 서로 그러면 안된다고 예전처럼 가깝게 지내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하고, 필자에게는 나이도 밑이니까 그래도 만났을 때는 인사만은 거르지 말라는 선배들의 조언은 지켜왔었다. 이렇게 해서 11년이 지났지만 멀어진 거리는 좁히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갑작스런 부고 소식을 듣고 착잡한심정이었다. 그래도 어제 밤에는 오쓰야도 참가했고 제단의 사진을 찍고 와서 많은 기억의 편린들을 반추하면서 지금 추도 기사를 쓰고 있다.

아직도 필자가 쓴 소설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모른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 한 사람 내용이 좋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이정림 전 이사장은 소설 그 자체, 즉 소설화 시킨 전부를 싫어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필자가 이 추도 기사를 쓰는 것은 이정림 이사장은 제주를 대표하는 재일동포사회의 금융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 전에 돌아가셔서 잊혀버린 제주 신촌 출신 재일동포 조규훈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했다는 사실이다.

조규훈 선생은 효고현에서 고무공장과 산림산업을 경영하면서 오사카 민족학교 백두학원을 설립하고 민단 중앙단장을 역임하고, 단장 재직시에는 동포들과 함께 한국주일대사관과 공사 관저를 확보 후 제공했으며, 고향 조천중학교 설립을 위해 일본에서 설계도와 건축 자재 전부를 보내와서 짓도록 했다. 

이 공적을 신촌 출신인 이정림 전 이사장이 앞장서서 해방 후의 조규훈 선생의 업적을 알리고 2013년 10월 3일, 조천중학교 뒤에 조규훈 헌창비 제막식을 우근민 당시 도지사, 신구범 전 지사, 조규훈 선생 유족, 재일신촌친목회와 지역 주민 등 3백여명이 참석해서 성대히 열었다.

조규훈 선생의 공적 부활과 평가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고인에게는 수여한 적이 별로 없는 무궁화훈장을 한국 정부에서 이례적으로 수여했으니 이것 또한 이정림 이사장의 끈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이정림 이사장 역시 재일동포 금융업계와 사회 발전을 위한 공로로 동백장 훈장을 수여했다.

신촌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일본으로 건너온 이정림 이사장이 재일동포사회만이 아니고 이렇게 다방면으로 활약한 사실은 필자와의 관계가 갈끔하지 못했지만 써야 했다.

이정림 전 이사장님! 고문님!

속세의 부조리와 아픔들이랑 하늘로 올라가시다가 은하수에 말끔히 흘려버리시고 홀가분하게 떠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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